〈 62화 〉기말고사가 끝나고.(2)
“자, 새 사람이 왔으니, 새 게임을 해야지?”
“뭔 게임?”
“술 게임이지. 다른 게 있겠냐?”
술 게임은 어디를 가도 있구나.
난 술 게임 같은거해본 적 없어서 자신 없는데.
“그럼, 분위기 띄울 겸, 간단한 걸로 하자. 병돌리기 게임 어때?”
“좋지.”
“그럼 병은 방금 다 마신 글렌드로낙 18년으로 할 게.”
저 비싼 글렌드로낙을 벌써 다 마셨다고?
돈 아까운 줄을 모르는 새끼들이네.
“돌리겠습니다! 첫 빠따는 누가 될지!”
병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병의 회전 속도는 점차 줄어들어, 어느 시점에 멈췄다.
멈춘 병의 입구는 카타리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첫 빠따는 카타리나!”
“마시겠다. 부어라.”
“역시 보드카국 출신! 부으라고 하니 잔 가득 부어드리겠습니다!”
그래, 뭐 가득 붓는 건 좋다 이거야.
자기가 마시겠다고 했으니까.
근데 이 자식들은 진짜 돈이 아까운 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어떻게 면세가로도 한 병에 10만원이넘는 술을 저렇게 그득그득 부을 수가 있는 건지.
“이야, 이걸 원샷을 때리네.”
“저게 진짜 상여자지. 알프레드는 그딴 거 없었죠?”
“좀 봐줘… 저건 카타리나가 이상한 거라고.”
“짝사랑하는 여자보다 술을 못 마시는 남자가 있다?”
매번 잊는사실이다.
알프레드가 카타리나를 짝사랑한다는 것.
어찌 보면 잘 어울리는 조합이긴 하다.
마초적인 성향이 강한 카타리나, 생각 외로 세심하고 부드러운 면을 가진 알프레드.
서로 궁합이 좋아 보이는데.
“그럼 다시 돌리겠습니다!”
“베아트릭스가 좀 걸렸으면 좋겠다. 쟤 거의 안 마셨잖아.”
“운도 실력이야!”
뭐, 그렇게 병돌리기 게임이 진행되던 중, 제임스가 돌연 나에게로 바톤을 터치했다.
“이제 이건 지겹다. 다음 술 게임은 박성진이가 정하는 걸로 합시다!”
“좋지.”
“박성진은 술 게임 같은 거 전혀 안 해봤을 거 같은데, 대충 아는 거 있냐?”
유감이지만 없다.
술자리를 나가 봤어야 술 게임을 할 것 아닌가.
적당히 내가 아는 놀이 중에서 술 게임으로 써먹을 만한 것을 어떻게든 생각해 봐야겠네.
아, 그래, 이게 좋겠다.
“술잔 채우기는 어때?”
“그게 뭔데? 설명 좀. 처음 듣는 술 게임인데?”
“이상한 거면 바로 거른다.”
“잔에 술을 90% 정도 채우고, 돌아가면서 동전 같은 걸 넣어. 점점 술잔을 채우는 거지. 넘치게 만든 사람이 그 술을 마시면 돼.”
다들 약간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잘못 고른 건가.
내 생각엔 최선의 수였는데.
“생각보다는 재밌을 거 같네. 그럼 그걸로.”
“근데, 우리 동전 같은 게 없잖아.”
“맞아. 요즘 시대에 누가 동전을 쓰냐? 지폐도 거의 안 쓰는 마당에. 골동품 수집가들이나 잔뜩 모으고 있겠다.”
“베아트릭스 사상력으로 칩 같은 거 만들어 달라고 하면 되잖아.”
“그 방법이 있었네. 만들어줘. 베아트릭스.”
난 임기응변의 천재가 아닐까?
이걸 이렇게 잘 넘기다니.
“자, 이 정도면 되지?”
“명당 2개? 이 정도면 충분하지.”
“자, 그럼 방금 마신 천현우는 제일 앞으로 오시고. 지금까지 한 잔도 안 마신 박성진은 맨 뒤로 꺼지면 되겠네.”
베아트릭스가 두 개의 청록색 칩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뭐야, 베아트릭스. 생각보다 똑똑한 거 아니야?
당연히 큼지막한 칩 같은 걸 만들어올 줄 알았더니, 인원수를 고려한 것인지, 적당히 작은 크기의 칩을 만들었네.
제법 스릴 있겠는데.
“나는 박성진보단 프리실라한테 먹이고 싶으니, 바로 두 개를 넣어야지.”
“오, 천현우, 나이스한 판단. 그럼 나도 두 개.”
“내가 여기서 두 개 넣으면 카타리나 선에서 넘칠 거 같으니, 나는 한 개만 넣을게.”
“되도 않는 핑계 대면서 카타리나 환심 살 각만 재는 스윗독남 역겹다.”
“인정하는 부분.”
스윗 독남이라네.
진짜 미친놈들인가 보다.
“나는 베아트릭스가 마시는 걸 보고 싶으니, 두 개를 넣겠다.”
“아, 좆트롤.”
“선 넘네.”
잔의 술은 어느새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볼록한 술의 표면이 찰랑거린다.
“조용히 해봐! 나 집중해야 해.”
베아트릭스의 손끝에 잡힌 청록색 칩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고작 이게 뭐라고 저렇게 열을 내는 거지.
아니지… 저렇게 진심을 다해야 인싸가 될 수 있는 건가?
칩이 술잔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술은 넘치지 않았다.
“이걸 해내네.”
“프리실라 선에서 넘칠 거 같은데?”
“좋습니다. 좋아요.”
프리실라는 자포자기한 듯한 얼굴로 대충 칩을 아무렇게나 던져 넣었다.
당연히 술잔의 술은 넘쳐흘렀고.
“자, 후딱 마시자.”
“흑기사 써도 돼?”
“할 사람이 있냐?”
“성진이….”
얘가 미쳤나.
나를 암살하려고 하네.
“안해.”
“이거는 인정한다. 성진이도 살아야지….”
“트리니티 아카데미 견제를 위해 오셀롯 아카데미에서 파견된 천재 스파이 등장.”
“박성진 결혼하면 축가 불러준다 그랬는데, 장송곡 먼저 부르겠다.”
다행이다.
너희들 덕분에 내가 살았다.
나야 안심할 수 있었지만, 프리실라는 그렇지 않겠지.
예상대로네.
프리실라는 수심 가득한 얼굴로, 가득 찬 술잔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른 녀석들의 닦달에, 결국 마시긴 했지만.
아무튼, 게임은 계속 진행됐다.
그 과정에서, 나도 몇 잔의 술을 마셔야만 했고.
“자, 그럼 슬슬 분위기도 달아올랐으니, 술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Never have I ever 게임이나 하고 들어가자. 마침 술도 반병 정도 남았는데, 마지막에 걸린 놈이나 놈들이 다 마시는 걸로.”
아, 이거 알고 있다.
영미권 손병호 게임이잖아.
질문자가 무언가를 해본 적 있냐고 질문하고, 해본 적이 있으면 체크를 하거나, 손가락을 접는 게임.
“이거 하겠다고 빌드업을 얼마나 한 거냐.”
“처음은 누가 할래?”
“무난하게 알프레드로 시작하자.”
“그래.”
그렇게, 공포의 진실게임 시간이 시작됐다.
“기타를 한 번이라도 쳐 본 적이 있는 사람은손가락 접어.”
“야, 제이드, 넌 접어야지. 내 거 빌려서 쳐봤잖아. 어딜 튀려고.”
“걸렸네.”
손가락을 접은 사람은 제임스, 제이드, 그리고 의외의 인물, 카타리나였다.
“카타리나, 너 기타 쳐본 적 있냐?”
“베이스 기타를 조금 쳐본 적이 있다.”
“오, 베이스를?”
베이스 기타라.
중후한 소리를 내는 게, 카타리나랑 잘 맞긴 하네.
“그럼, 다음 차례는 천현우네.”
“여자친구, 남자친구 있었던 새끼들 다 접어.”
“야, 천현우 너는 왜 안 접냐?”
“난 여자친구 없는데, 뭔 개소리냐?”
분명 백성연을 가지고 물고 늘어질 생각이네.
“백성연이랑 백년가약을 맺은 사이가 아니었다고?”
“지랄 말고.”
“하, 이건 좀 억울하거든요.”
“야, 박성진, 제임스랑 제이드 빨리 죽이자. 솔직히 쟤들 입만 털고 생각보다술 별로 안 마셨어.”
“우리 친구잖아. 그치?”
솔직히 이 게임은 한 명 저격하는 재미가 쏠쏠한 것도 맞지만, 라이프 카운트가 얼마 안 남은 놈들끼리 몸 비트는 게 더 재밌는 게임이라.
“이번 중간고사 1위 아니었던 사람 다 접어.”
“하, 넌 오늘부로 내 친구가 아니다. 꺼져.”
“그럼, 프리실라는 어떻게 되는 거지? 프리실라는 트리니티 아카데미에서 중간고사를 치르지 않았다.”
“그럼 당연히 안 접는… 아니, 박성진 이 새끼 완전 쓰레기 새끼네.”
“아까 흑기사 못 해줬다고 은근히 싸고도는 거봐라.”
“나 아직 안 취했다. 아니, 취했다 하더라도 이건 반드시 기억했다가 내일아이나에게 일러바칠 것.”
아니, 이게 이렇게 된다고?
자살골을 넣어버렸네.
좆됐다.
심지어 프리실라는 은근히 좋아하는 티를 내고 있었다.
“자기 키가 178cm, 5.84ft가 안 된다. 다 접어.”
“이거 네 키지. 미친놈아.”
“당연하지.”
아, 2cm만 더 컸더라면….
“어? 그러고 보니, 카타리나는 키가 몇이야?”
“난 183cm다.”
“부럽다. 나 3cm만 나눠 줘!”
“주고 싶다고 줄 수 있었으면 얼마든지 나눠 주었다.”
내가 보기엔 베아트릭스의 키 정도면 평범하다.
물론, 이건 내가 한국인이라서 그런 거다.
독일인은 남녀 구분 없이 키가 크니까, 베아트릭스가 작은 편에 속하는 거겠지.
“그럼 내 차롄가? 축구 경기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접어라.”
“하… 알프레드 이 새끼가 억지로 보자고 할 때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좆도 재미없는 공놀이.”
“어어? 박성진, 손가락 움츠러드는 거 다 봤다. 빨리 접어.”
이게 참 애매하다.
분명히 이 몸에 빙의하고 난 뒤론 축구 경기를 본 적이 없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전생에서 축구 경기를 이따금 본 적이 있었던 지라,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접어버리고 말았다.
“내 차례야? 생각보다 골고루 접었네. 완전 황밸인데?”
각자 남은 손가락의 숫자를 볼까.
제임스 1, 천현우 3, 나 2, 제이드 1, 프리실라 3, 베아트릭스 2, 카타리나 3, 알프레드 2.
진짜 황밸 게임이었네.
“야, 알프레드, 살려줘.”
“날 살려주고, 쟤는 죽여줘.”
그렇게, 살아남기 위한 제임스와제이드의 객기가 시작됐다.
알프레드는 고심하는 듯한 표정을 하더니,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 이번은 살려줄게. 낚시 안 해본 사람은 다 접어.”
“살았다. 씨발.”
“나도.”
휴, 위험했는데, 살았다.
물론 제임스의 한 마디에 모든 게 뒤집힐 수 있지만.
“아, 이거 손가락 두 개인 놈들 불편한데, 어떻게 하면 저 4명 다 접게 만들 수 있냐?”
“한국에 가본 적 있는 사람 하면 되지 않나? 마침 너 재작년에 내한 공연도 취소됐잖아. 그럼 한국 가본 적 없지 않냐?”
“와, 씨발. 천잰가? 좋다. 한국에 가본 적 있는 사람 다 접어.”
뭐지, 알프레드는 왜 접는 거지?
쟤가 한국에 갈 일이 있었던가?
“알프레드가 한국에 간 적이 있었어?”
“아,현우 따라 놀러 갔었어. 한 번.”
“구라치시네. 카타리나 간다니까 따라간 거면서. 누가 그런 뻔한 거짓말을 믿냐?”
후, 이걸로 전원의 손가락이 한 개가 됐군.
이제 천현우의 한 마디에 모든 게 걸려있다.
“자, 다들 손가락 하나니까 억울해하지 말고, 곱게 다 마실 준비 해라.”
“대충 해라. 어차피 난 걸려도 다 마실 수 있으니까.”
카타리나쟤는 진짜 말술이네.
괴물이다.
“자, 내가 알기로 생일이 3월인 건 박성진뿐이거든? 자기가 3월에 태어났다. 손가락을 접는다.”
결국엔 내가저걸 다 마시게 생겼네.
한숨을 한 번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주변의 반응이 뭔가 이상했다.
“뭐냐, 너희들 반응이 왜 그러냐?”
“이거 주작임. 아니, 주작이어야 됨.”
“박성진 트리니티 아카데미에서 변사체로 발견돼 충격.”
“이건 네 사심이 들어가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프리실라. 증거를 보여줄 수 있나?”
프리실라가 트아카 어플을 실행하여 자신의 정보를 공개했다.
생년월일이 표시되는 칸에는, 3월 21일이라 적혀있었다.
그것을 본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긴 침묵을 깬 것은 알프레드였다.
“어… 그냥 다 같이 마시는 게 좋지 않을까?”
“벌칙은 벌칙인데.”
“나 기숙사에 가고 싶어. 졸려.”
“아니, 아이나한테는 그냥 술 게임 벌칙이었다고 하면 되지.”
“그걸 믿어줄까?”
“우리가 말해주면 되지. 뭐가 문제냐.”
“야, 말해줘도 거절 안 했다고 잔소리 존나 들을걸. 내가 밤에 여자랑 단둘이서 술 마셨는데, 그게 나탈리아 귀에 들어간다? 나는 그날로 황천 익스프레스 티켓 끊어야 돼.”
그렇게, 자기들끼리 옥신각신 다투기 시작했다.
자기들이 벌칙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결론은 대충 윤곽을 보이고 있었다.
그냥 둘이서 마시게 둬도 상관없지 않겠느냐는 결론의 윤곽이.
분위기가 반전된 데에는 괴벨스 뺨치는 선동력을 자랑하는 천현우·제임스 듀오의 입김이 컸다.
“그럼 둘이서 오붓한 시간 보내라!”
“무슨 일 생기면 우리가 변호해줄게.”
“박성진, 빨리 마셔라. 그렇다면 별일 없을 거다. 괜히 천천히 마시지 말고.”
“나는 카타리나, 너처럼빨리 못 마신다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들 작별 인사만을 남길 뿐이었다.
결국, 이 넓은 테이블에는 프리실라와 나만이 앉아있게 되었다.
새하얬던 프리실라의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른 것으로 보니, 상당히 취한 것 같았다.
원래 술이 별로 강하지 않은 모양이네.
하긴, 양주를 그렇게퍼마셨는데, 아무리 이 세계의 인간이라도 취할 놈은 취하겠지.
“그냥 나 혼자 다 마실게. 넌 먼저 돌아가.”
“…넌, 나랑 있는 게 싫어?”
돌연프리실라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좆됐다.
얘는 주사가 우는 타입인가 보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너 취한 것 같아서 그래. 먼저 돌아가서 쉬라고.”
“나, 히끅, 안 취했어! 그리고, 난 너랑 있고 싶다고!”
눈물을 질질 흘리며 저 말을 하니, 그저 난감할 따름이다.
“나는널 좋아하면 안 돼?”
나는 말없이 술을 잔에 부었다.
“그것도,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양보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단숨에 들이켰다.
“대답해달라고!”
다시 한번 잔에 술을 들이붓는다.
잔의 술이 차오르며 꼴꼴거리는 소리를 낸다.
그 소리 이외엔, 프리실라가 울먹이는 소리만이 들려오고 있다.
대답 없이 술만 목구멍에 털어 넣은 것이 네 잔째.
“나는 포기 안 해.”
프리실라가 거칠게 펍의 문을 닫고 사라졌다.
오늘따라 유난히 술맛이 쓰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