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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화 〉기말고사가 끝나고.(1) (61/173)



〈 61화 〉기말고사가 끝나고.(1)

[박성진. 시험이 종료됩니다.]

시험은 끝났다.

혼탁함은 모두 베어낸 꽃잎과 함께 흘러나갔다.

그것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메우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아직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마땅히 기뻐할 일이었음에도, 까닭 모를 아쉬움만 가진 채, 훈련실 밖으로 나갔다.

바깥에선, 아이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끝내겠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다는 증거였다.

“좋은 검무(劍舞)였어. 꽃은 지는 순간마저도 아름다운 법이지.”
“다 네 덕이지. 뭘.”
“이제 나는 너에게  이상 가르칠 것이 없어. 완벽한 벚꽃 흘리기를 사용할 수 있다면, 나머지 기술도 스스로 잘 터득할  있을 거야.”
“나는 아직 네 도움이 더 필요한데?”

아이나가 사뿐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온다.

그리고, 내 품에 안겼다.

“그렇게말해주길 바랐어.”

그녀에게서 어딘가 익숙한 냄새가 난다.

짙게 깔리는 나무 향 위로, 장미와 시트러스 계열의 향이 떠오르는 듯한 향.

분명히 어디선가 맡아본 향기다.

“네 마음에 든다고 했던, 그 향수야.”

그랬었던가?

기억은 가물가물해도, 몸이 이 향을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맞는 것 같다.

“맞는  같네.”

아이나는 한동안 내 품에 안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은은한 향기와 그녀의 온기에 잠겨있는  시간이 싫을 리 없지.

 길었던 시간은, 누군가의 훼방으로 막을 내렸다.

“아무리 시험이 끝났다지만, 시험장에서도 애정 행각이 하고 싶냐! 이 새끼들아! 나가서 해라!”

훼방꾼의 정체는 바로 빈센트였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아무래도 코 꿰이는 건 제가 먼저일 것 같네요.

“나가자. 아이나.”
“그래.”

아이나는 자연스레  손을 잡는다.

나는 깍지 사이로 들어오는 손가락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가 흘러가고 싶은 대로 가게 두었다.

그리고, 그 작은 뒷모습을 쫓을 수 없는 하얀 그림자는, 숨죽여 신음을 삼킬 뿐이었다.

* * *

현 시각, 우리가 있는 곳은 부유섬 아이니르 아래의 작은 암초, 통칭, 뱀머리 암초다.

아이니르와 바로 맞닿은, 코앞의 암초라곤 하나, 본래 이곳에 들리기 위해선 외출증이 필요했다.

이런 작은 암초에 무슨 볼일이 있어 외출증까지 끊겠냐 묻는 이도 많겠지만, 생각외로 꾸준히 사람이 드나드는 곳 중 하나다.

남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한 섬인 만큼, 손맛이 좋은 대형 어종을 낚기에 굉장히 좋은 장소인지라, 낚시에 관심을 가지는 생도들이 많이 오간다.

S클래스에선 알프레드가 그중 하나고.

물론, 기말고사가 끝난 지금은, 이곳에 오는 데 외출증 따위도 필요 없으며, 이런 곳에서 한적하게 낚시나 즐길 놈도 없었기에, 우리 둘만의 장소였다.

아이나가폴짝폴짝 바위 위를 뛰어다닌다.

물이끼가 뒤덮인 암초 위라, 내 눈에는 위태롭게만 보였지만.

그리고, 내 불길한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다만, 그 대상이 달랐을 뿐이다.

발을 헛디뎌, 넘어진 것은 오히려 나…가 아니었다.

어느샌가 아이나의 팔이 내 목을 받치고 있었으니.

“뭐해?”

한심하다는 눈으로  내려본다.

…한심해 보일만 하지.

“고마워.”
“대체 이런 애가 어떻게 벚꽃 흘리기를 완성한 건지 모르겠네.”

나도 모른다.

그저 몸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니.

“나름대로 연습을 많이 했거든.”
“그래 보이긴 하더라.”

물이끼가 눌어붙지 않은, 적당히 마른 바위 위로 자리를  그녀가 말했다.

“의외네.”
“뭐가?”
“네 성격 상, 이런 데선 절대 안 앉을 거 같아서. 더럽다고  줄 알았어.”
“더러운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게 우리 가문의 업인데, 이런 정도로 더럽다고 하겠어?”

더러운 일을 하는 게 가문의 업이라.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말이네.

괜한 말을 했나 싶기도 하고.

이럴 땐 화두를 돌리는 게 좋지.

“근데, 아이나, 너는 이번 여름 방학에 뭐 할 거야?”
“글쎄, 원래 일정이 많았는데,전부 취소할까 싶네.”
“갑자기 왜?”
“그럴 만한 이유가 생겼거든.”

그럴 만한 이유가 생겼다?

아이나는 원래 무척이나 바쁜 몸이시다.

나 같은 범인과 어울릴 시간 따윈 없는 사람이란 말이다.

차기 당주라곤 하나, 아직  입지가 확고하지 않아, 가문 내나, 외적으로나 해야할 일이 많을 텐데, 그걸 전부 취소해도 괜찮다고?

대체 무슨 이유일까.

“혹시 그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안돼.”

개인적인 사정인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고.

“안되면 말고.”
“그러는, 너는  할 생각인데?”

그러네.

나는 딱히 방학 때 무얼 할 것이라 정해둔 것이 없구나.

보통빙의물의 주인공이라면, 다른 캐릭터들의 기연을 훔쳐먹으며 성장이라도 했겠지만, 아쉽게도  세계는 딱히 훔쳐낼 만한 기연도 없다.

분명 아티팩트라던지, 이런저런 설정은 존재했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은 숨겨진 아티팩트 같은,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탓에 아카데미 밖으로 나갈 이유가 전혀 없긴 하다.

돈이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무일푼인 내가 집으로 돌아가서 무얼 하겠는가.

하다못해 주인공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을 수 있다면 응당 그리했겠지만, 아직은 주인공 꽁무니를 뒤쫓아 다녀봤자 얻을 수 있는  아무것도 없어서, 그리 할 이유조차 없었다.

천현우나, 베아트릭스나, 노느라 바빴으니.

“정해둔 게 없네. 아마 아카데미에 계속 있지 싶은데.”
“아카데미에 계속 있겠다고?”
“뭐, 집에 가도 할  없어서.”
“아, 너는 그랬었지.”

그녀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점점 아이나도 표정이 다양해지네.

언제나 무미건조한 얼굴을 하던 그녀였는데.

신기할 따름이다.

“별로 신경 안 써도 돼.”
“아냐,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사실 별로 미안해할 일도 아니다.

나야 아싸로 살아온 것이 익숙한데다, 이 불우한 과거도 전부 나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나야 그걸 알 턱이 없지만.

“정 갈 곳이 없으면, 방학 기간 동안 나랑 지내지 않을래?”

미츠루 가문에서 지내라고?

그거 완전 나쁜 아이디어인걸.

가시방석도 그런 가시방석이 따로 없겠다.

“아냐, 그렇게 신경 안 써줘도 돼.”
“선심을 베푸는 의미가 아니야. 너니까 해주는 게 당연한 거야.”

내가 얼굴이  붉어지네.

아이나의 이런 면모를 볼 때마다 새롭다.

소설 속 캐릭터랑은 영 딴판인 모습.

이렇게 열렬하게 구애해오니, 마음이 조금 기울 수밖에 없잖아.

“마음은 고마운데, 안 그래도 돼.”
“그래, 그럼 말고.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면 말해줘. 소유지 내에 빈집은 많아.”

과연 급이 다른 사람답네.

땅 주인인 걸로 모자라서 집까지 많다?

평생 아이나님을 모시고 살라는 너희들의 말이 옳았어.

나중에 모든 일을 해결하고 나면, 여생 정도는 평생 아이나한테 잡혀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잡혀 살고 있나?

“생각해 볼게.”

이야기는 거기서 멈췄다.

이제 뱀머리 암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불어오는 바닷바람 소리, 부서지는 파도 소리뿐이었다.

과거에도 아이나와 단 둘이 있을 때 이런 고요한 분위기가 심심찮게 연출되긴 했었지.

허나, 그때의 침묵은 어색하게만 느껴졌다면, 지금의 침묵은 조금 느낌이 다르다.

서로를 이해하고 있기에, ‘그 이상 말을 꺼내지 않겠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

현재 아이나의 낯빛을 본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차갑던 표정만 짓던 그녀가 아닌, 부드러운 미소도 지을 줄 아는 그녀를 보았다면 말이다.

많이 너그러워진 그녀의 태도에, 장난기가 발동했다.

“돌아갈까?”
“조금은… 이대로 있을까 싶네.”

조용히 다가온 아이나가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대답한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그녀의 긴 머리칼이 내 손등을 간질인다.

그래, 내 인생에 이런 날이 얼마나  있겠어.

이 순간을 즐기는 게 좋겠지.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이 광경을 시샘한 순풍이, 비릿함을 몰고 온 것이리라.

그리고, 그 짠 내는 모두 장미 향기와 나무 향기에 묻혀 사라졌다.

남는 것은 시원함 뿐이었다.

“박성진.”
“어?”

아이나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아무것도 아냐.”

싱겁기는.

그나저나, 내가 아이나의 허리에 팔을 감고 있었던가?

* * *

해가 바다에 잠기는 순간까지도 우리는 뱀머리 암초에 있었다.

달과 별이 하늘을 수놓은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아카데미로 돌아왔다.

아이나가 아카데미에 돌아온 것은 어찌 알아차린 것인지,아이나의 부엉이가 어디선가날아와, 그녀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럼, 내일 보자.”
“넌 집으로 안 돌아가?”
“조금은 아카데미에  있으려고.”
“왜? 집이 편하지 않아?”
“그런 게 있어.”

아이나는 그렇게 말하곤, 여자 기숙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뭐, 정리할 게 있는 거겠지.

나 또한 남자 기숙사로 향하려는 순간, 핸드폰의 알림이 울렸다.

[James Fitzgerald]
▶ 지금 당장 리피 에스투어리로 옵니다 실시
[박성진]
▶ 뭔 개소리냐

…대답은 없었다.

위치가 리피 에스투어리인 것으로보아하니, 기말고사가 끝난 김에 맥주라도 한잔하려는 모양이네.

나쁜 의도는 아니겠지.

근데, 이러면 서문으로 돌아가야 하잖아.

귀찮네.

* * *

리피 에스투어리에는 꽤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천현우, 카타리나, 제임스, 제이드, 베아트릭스.

의외의 인물로 프리실라와 알프레드도 있었고 말이다.

아니, 이 자식들, 맥주가 아니고, 양주를  병씩 마시고 있었네.

징한 놈들.

“드디어 오셨네! 모셔오기도  힘들어요! 아내한테 잡혀 산다고!”
“그래서,  부른 거냐?”
“우리 박성진이는 인기도 많아요. 글쎄, 처음에는 S클래스 멤버 거의 다 부르려고 했거든?  온 애들은  거절한 애들이고.”
“나는 그런 초대 못 받았는데?”
“너랑 아이나는 당연히 예외지. 미친 새끼 아니야. 이거.”

하긴, 아이나는 받아봤자 칼같이 거절했겠지.

아이나가 안 가는데,  혼자  수도 없고.

“근데, 왜 인제 와서 부른 거냐?”
“글쎄! 우리 화이트레이디님께서 박성진이가 오면 오겠다고 그러길래, 바로 구라를 깠죠. 있으니까 당장 오라고.”
“아니,  그런 구라를 치냐.”
“오면 없어도 같이 마셔줄 줄 알았는데, 너 없으니까 바로 간다고 그러더라. 그래서 황급히 불러봤습니다.”

대충 알겠다.

고추새끼들끼리만 마시기엔 뭣하니까, 프리실라를 불렀는데, 도망가려고 하니, 묶어두기 위해서 불렀다 이거네.

카타리나는 여자 아니냐고?

뭐, 여자는 맞지.

뇌가 영락없는 남자의 뇌라는 점만 빼면.

베아트릭스?

베아트릭스에게서 여성적인 매력이라곤 저 커다란 궁둥짝과 가슴뿐인걸.

…그게 여성의 매력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미 예쁜 여자친구가 있는 제임스와 제이드에겐 별로 와닿지 않을 것이고, 카타리나를 좋아하는 알프레드에게도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즉, 베아트릭스는 그냥 인원수를 채우기 위한 토템에 불과한 거지.

제일 여성적인 분위기를 내는 프리실라를 잡아두고 싶은데, 잡아두기 위해선 내가 필요하고.

“설마, 여기까지 와서 도망치는 건 아니겠지? 네가 고추 달린 남자면 그래선 안 된다.”
“아니지, 병신아. 저 새끼 고추가 자기 거냐? 아이나 거지.”
“흠, 완벽한 논리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같이 마시자. 성진아.”
“크흠, 너와 아이나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건 아니지만, 너 하나를보겠다고 찾아온 프리실라의 얼굴을 봐서라도 조금은 같이 마시는 게 좋지 않겠나?”

다른 녀석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알프레드와 카타리나까지 그렇게 말하니, 어쩔 수 없네.

정작 당사자인 프리실라도 새하얀 피부만 벌겋게 달아올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안쓰럽고.

“오냐, 이 형님께서 같이 마셔주마.”
“감사합니다! 박성진 대협!”
“대협이 뭐냐?”
“동양인 새끼들만 알아듣는 소리 하지 말라고!”
“꼬우면 공부해라.”

…아무래도 오늘 밤은 지옥이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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