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기말고사.(2)
그간 레이븐과 전투해오며 축적된 경험에 의하면, 대략 30합 정도부터 놈의 단검은 내 마나글레이브의 출력을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었다.
이 점을 레이븐이 알고 있다면 그것대로 문제였겠지만, 다행히 레이븐의 기억은 인계되지 않는 듯했다.
된다면 큰 문제였겠지.
홀로그램 레이븐도 회차 플레이를 거듭하며 강해진다는 소리니까.
물수리 떨구기로 접근한다는 선택지가 가장 접근 확률이 높다는 걸 알아낸 것도 훈련에서 수십 번이나 머리가 깨져보며 얻어낸 결과였다.
만약 이 가짜 레이븐이 그 경험을 모두 인계받았다면 물수리 떨구기에 당하지 않았으리라.
30합 정도부터 단검이 부러진다는 것도 당연히 수백 번의 회차를 거듭하며 알아낸 사실이고.
당연히 여기 있는 이 레이븐은 그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러니, 30합까지만 어떻게 전투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다면 나의 승리나 다름없다.
30합이면 적어도 10명 이상은 구출할 수 있을 거고.
당연히 힘들기야 하겠지.
하지만, 똑같이 힘들 거라 예측했던 중간고사도 1위를 거머쥐었다.
기말고사라고 못할 게 뭐가 있겠어.
각오를 다지고, 전투에 돌입했다.
우선 내가 첫수로 고른 것은, 시오레의 추충모(追衝鉾)다.
갓 마나글레이브 대련에 돌입했을 때 아이나가 첫수로 골랐던 기술이기도 하지.
그간 류진만 다뤄왔음에도 돌연 시오레의 기술을 사용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류진의 기술 중에선 첫 타로 내밀만한 기술이 별로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당연히 아이나도 이 점을 지적했었고, 첫 공격으로 내밀기엔 시오레의 기술만 한 게 없다며, 단순한 몇 종류의 시오레의 기술 정돈 익혀두자는 아이나의 말 때문에 배워 둔 기술 중 하나가 바로 이 추충모(追衝鉾)다.
낮은 자세로 치고 들어가 상대방의 목을 노리는 기술.
생각 외로 잘 파고든 것인지, 레이븐은 가까스로 내 첫수를 받아내었다.
굉장히 쉽게 막힐 것으로 생각했는데 말이지.
공격 턴을 가져오는 데 성공했으니, 이대로 쭈욱 위력있게 압박해야만 한다.
두 번째 수는 낮은 자세에서만 파생될 수 있는 류진의 기술, 하현의 수레바퀴.
흔히 게임에서 볼 수 있는 유형의 베기이기도 하다.
짧은 거리를 전진하며, 하단을 휩쓰는 회전 베기.
단점도 게임의 그것들과 비슷하다.
적중시키지 못했을 때 리스크가 크다는 것.
그럼에도 내가 두 번째 수부터 강수를 던진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번 레이븐이 어떤 유형의 레이븐인지 판가름하기 위해서.
전투를 회피하며 시민들의 꽁무니만 쫓아다니는 졸렬한 레이븐이냐.
아니면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 상남자다운 레이븐이냐.
하현의 수레바퀴처럼 리스크가 매우 큰 기술을 던졌을 때의 반응으로 그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내뺀다면 전자일 것이고, 곧바로 응징에 나서려 한다면 후자겠지.
그리고, 이번의 레이븐은 후자였다.
점프로 내 하단 베기를 피한 뒤, 바로 내게 달려들었으니.
…한 번 정도 공격은 허용해줘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고 던져본 기술인데, 전혀 아니네.
경동맥이 지나가는 바로 옆자리에 옅은 상흔이 남았다.
레이븐의 은신은 모든 소리를 차단하는 은신이었기에, 레이븐이 내는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었음에도,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차는 레이븐의 소리가 곧바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좆될 뻔했네.
세 번째 수로 꺼낸 것은 초급 기술, 회축 베기.
당연히 쉽게 막혔다.
애초에 제대로 노린 공격도 아니었으니까.
네 번째 수와 연계하기 위한, 시작에 불과하다.
네 번째 수로 준비해온 것은 바로, 카데르에서 주로 사용하는, 점등 찌르기.
이 또한 아이나가 내게 사용했던 것을 카피한 것이다.
대각선으로 들어오는 회축 베기를 막았다면, 몸이 텅 비게 된다.
마나글레이브의 전원을 차단하여, 막힌 검신을 회수한 뒤, 곧바로 다시 마나글레이브를 작동시켜 빈 몸통을 노리는, 카데르의 기본적인 공격 전략이지.
옅은 상처라도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레이븐은 몸을 비틀어 나의 찌르기를 아주 쉽게 간파했다.
이걸 이렇게 쉽게 피한다고?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네.
레이븐 정도 되는 빌런이 포톤글레이브 사용자와 전투를 해본 적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다니.
곧바로 마나글레이브를 회수하여, 방어에 유리한 류진의 기본자세를 취했다.
이제 레이븐의 턴이니까.
레이븐이 턴을 가져간 뒤, 첫수로 내민 것은 나와 같은 찌르기였다.
이젠 이 공격엔 안 당하지.
무난하게 몸을 틀어 회피했다.
저 첫수 찌르기에 당한 기억이 하도 많아서, 이젠 거의 당하지 않게 됐다.
아이나에게도 그랬고, 레이븐에게도 그랬으니까.
거의 PTSD급으로 뇌리에 잘 각인되어있다.
첫 번째 찌르기가 막혔음에도, 레이븐은 거리를 벌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숙이 내 품으로 파고들 뿐이었다.
아무래도 사거리의 이점을 주지 않겠다는 모양이군.
레이븐의 단검이 내게 쇄도한다.
확실히 아이나의 말 대로네.
많은 검사에게서 보이는 유형이 시오레와 카데르가 혼합된 유형이라 그랬는데, 레이븐도 비슷하다.
몸 쓰는 것에 주저함이 없고, 상대방의 허점을 집요하게 노려온다.
모든 움직임이 검을 보조하는데 치중된 류진과는 확실히 다르다.
류진은 검을 이용한 공격 이외에는 다른 공격을 일절 하지 않지만, 카데르는 손발을 이용한 난투에도 적극적이니까.
대표적인 예시가 레이븐의 네 번째 공격 때였다.
레이븐의 네 번째 공격, 베기를 막아 냈을 땐, 당연히 내 턴이 돌아올 줄 알았다.
문제는 그것조차 레이븐의 설계였다는 거다.
성급한 마음에 역공을 시도하자마자, 오금을 걷어차이고 끝장날 뻔했으니.
그나마 긍정적인 점을 찾아보자면, 5합 정도는 버텨냈다는 것.
총합 7번의 공격을 레이븐의 단검에 가했다.
앞으로 23번의 공격을 단검에 가할 수 있다면, 나의 승리다.
확보한 시민의 숫자도 나쁘진 않다.
현재까지 4명.
설령 30합을 가할 수 없더라도, 12명을 확보해 C 학점으로 기말고사를 마무리 지으면 된다.
관건은 내가 거기까지 버틸 수 있느냐인데.
지금까지는 어떻게 공격을 쳐낼 수 있었으나, 점점 내가 밀리는 형국이 되는 것은 막을 수는 없었으니까.
하는 수 없네.
꿰매는 춤을 사용해야겠어.
여기서 벌써 꿰매는 춤을 사용해야 할 줄은 몰랐다.
최대한 쓰고 싶지 않은 기술이었는데.
꿰매는 춤은 류진의 몇 안되는 반격 기술 중 하나다.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대공 기술로 주로 사용되는 물수리 떨구기도 반격 기술에 포함된다지만, 물수리 떨구기는 앞서 보여줬던 것처럼 공격용으로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허나, 꿰매는 춤은 오직 반격의 용도로만 사용된다.
상대방의 검을 검 끝으로 받아낸 다음, 몸을 옆으로 회전시켜 상대방의 검을 밀어내는 기술.
상대를 밀쳐낸다는 점에서 내게 나쁜 그림만 그려지는 기술이라, 기피될 수밖에 없다.
그래플링으로 금방 다시 붙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은 기술은 아니지.
지금 상황에선 사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사용할 것이란 이야기는 아니다.
레이븐이 최대한 밀착해 있는 지금, 꿰매는 춤을 사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꿰매는 춤은 약간의 안전거리를 확보해야만 확실하게 먹일 수 있다.
최대한 뒷걸음질을 치며, 조금씩 거리를 확보해나갔다.
줄곧 근접전만을 선호해오던 내가 갑자기 거리를 벌리려 하니, 레이븐도 무언가 낌새를 눈치챈 듯, 더욱 내 쪽으로 달라붙기 시작했고.
몇 번의 공격이 오간 끝에, 최소한의 거리를 확보하는 데엔 성공했다.
이제, 꿰매는 춤을 사용하는 것만 남았네.
레이븐의 검을 검 끝으로 받아낸다.
몸을 측면으로 돌려, 회전력을 얻고, 그 힘으로 레이븐의 검을 거세게 밀어낸다.
그리고, 그래플링으로 다시 레이븐에게 접근해, 놈에겐 불리하고, 나는 유리한 거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제 원점이군.
몸 이곳저곳에 상처가 생겨있긴 하지만, 깊은 상처는 하나도 없으니 그나마 안심이 되네.
다시 시오레의 기술로 접근해봐야 하나?
아니야.
첫 수로 이미 시오레를 내밀었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그런 기술을 쓰면 바로 반격당할 게 분명해.
여기선 다소 귀찮더라도 류진의 기술들로만 접근하는게 좋겠어.
전방 회전으로 치고 들어간다.
딱히 공격 성공률이 높은 기술은 아니지만, 제일 무난한 방식의 접근 방법이니까.
이젠 중·상급 기술 사용을 최대한 자제해야겠어.
최대한 초급 기술로만 버텨야 한다.
괜히 많은 기술을 사용해놓고 모두 막히기라도 했다간, 상대방에게 쉽게 대처할 여지를 주는 꼴밖에 되지 않을뿐더러, 나는 아직 류진의 모든 기술을 섭렵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체력 소모가 극심한 류진의 특성상, 30합 이전에 내가 지쳐 나가떨어질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
사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체력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내가 체력이 발목을 잡을 것을 자각한 것은, 망각했던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이었다.
피를 흘리면 흘릴수록, 체력이 소진되는 속도가 가속된다는 사실을.
깊은 상처는 없다지만, 어쨌거나 내 몸에는 상처가 점점 쌓여만 가고 있다.
즉, 체력의 소모도 더욱 가속된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체력 소모가 비교적 덜한 초급 기술로 공방을 풀어나가겠다는, 일종의 보험을 든 것이다.
초급 기술만 사용하겠다 결심한 마지막 이유로는, 상대가 기술에 대한 경계심을 어느 정도 풀었을 때가, 어제까지 열심히 준비했던 기술, 벚꽃 흘리기를 먹이기에 적기라는 점도 있었다.
그렇게, 나의 분투가 시작되었다.
내 딴에는 열심히 있는 패턴, 없는 패턴을 꼬아본답시고 꼬아봤지만, 누적된 전투의 양이 달라서 그런지, 레이븐은 무척이나 쉽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였다.
중간중간 실을 이용해 움직임을 제약해보려는 노력도 해보았지만, 별 소용이 없었고.
게다가, 시민의 확보 속도도 눈에 띄게 더뎌졌다.
전투한 시간이 제법 길었음에도 확보한 시민의 숫자는 고작 8명에 그쳤다.
이렇게 오래 싸웠는데 고작 E 학점이라니.
목표인 C 학점까지 갈 길이 한참 멀었는데.
조급한 마음에 실수가 늘어갔다.
뻔한 공격을 허용해주기도 했고, 명백한 레이븐의 실수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계속 생겨났다.
그럼에도, 벚꽃 흘리기를 먹여주겠노라는 결심 하나만큼은 꺾이지 않고 있었다.
흐릿해진 정신을 다잡고, 레이븐의 움직임에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
정면에서 들어오는 찌르기.
옅은 찌르기였기에, 가볍게 쳐낸다.
곧바로 이어지는 회축.
몸을 아래로 숙여, 역공을 시도한다.
…패링을 하려는 자세네.
공격을 거둬들이기엔 이미 너무 깊이 들어갔다.
곧바로 마나글레이브의 전원을 차단했다.
간신히 얻어낸 역공의 기회를 이렇게 날려버린 건 아깝지만, 패링 당하는 것보단 훨씬 낫다.
다시 레이븐의 공격을 막아 내야 하는 구도로 돌아왔군.
하다못해 공격을 쳐낼 수라도 있다면 좋았을 텐데, 이 자식은 지치지도 않는 건지, 더 맹렬하게 공격해왔다.
때문에, 공격을 쳐내는 건 고사하고, 피하는 것이 전부였다.
아찔한 회피만이 계속되던 중, 제법 심혈을 기울인 듯한 레이븐의 일격이 날아왔다.
그리고, 나는 그 공격을 무척이나 부드러운 동작으로 회피해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의식하고 피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저, 자연스럽게 몸이 반응했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아무튼, 그 일격을 피해낸 끝에, 마침내 나에게도 기회란 게 찾아왔다.
거리, 상황, 분위기, 세박자가 모두 나만의 시간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정도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기회는 없으리라.
곧바로 벚꽃 흘리기의 검식을 밟기 시작했다.
초식.
피어나는 꽃망울처럼, 앞발을 축으로 삼아,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고, 적을 올려 베며 전방으로 도약한다.
이식.
만개한 꽃처럼, 도약과 동시에 두 번째 회전에 들어가, 또 한 번의 참격을 욱여넣는다.
삼식.
저물며 흘러가는 꽃잎처럼, 두 번째 참격이 끝나는 즉시, 다시금 전방으로 도약하여, 적을 베어 넘기며 착지한다.
그렇게, 나는 이미 저물었을 벚꽃을, 6월에 다시 피워냈다.
그리고, 흘려보낸다.
베어낸 것과 함께.
흘려 떠내려간 것은, 베어낸 것만이 아니었다.
줄곧 나의 검에 묻어나던, 미숙함도, 함께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