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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화 〉기말고사 대비 기간.(5) (58/173)



〈 58화 〉기말고사 대비 기간.(5)

‘몸은 가볍게, 머리는 무겁게’라는 말이 있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실천하기 참 어렵다는 점만 제외하면.

알다시피, 내 몸은 둔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머리가 비상한 것도 아니다.

아마 가벼워서 물에 던지면 둥둥 뜨겠지.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런 소리를 꺼낸 것은 아니다.

레이븐에게 승리하기 위해선 가벼운 몸, 무거운 머리, 둘  필요했으니까.

그간 레이븐의 홀로그램을 상대해오며 느낀 것은, 녀석은 단순히 몸만 민첩한 것이 아니라는 거다.

사고도 민첩했다.

하물며 진짜 레이븐도 아닌, 레이븐의 행동을 모방한 것에 불과한 홀로그램이 저 정도로 영악할 수 있다는 것에 감탄할 정도였으니.

능력도 성가신 능력뿐이라, 상대하는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수밖에 없었다.

사실 레이븐은 한국인의 후예가 아니었을까?

은신암살자충인 걸 보아하면 합리적 의심인데.

굳이 따지면 레이븐은 코리안 시크릿 웨폰보다 악질이긴 하다.

게임은 밸런스 때문에 공격할  은신이 드러나기라도 하지.

레이븐의 은신은 레이븐이 공격을 시도해도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내겐 은신 감지 능력 비슷한 것이 있긴 하다만, 반쪽짜리에 불과해서, 내게도 레이븐을 상대하는 건 여간 짜증 나는 일이 아니다.

은신 감지 능력이 없는 놈들이 들으면 분개할 이야기겠지만.

그래도 상대가 레이븐이라는 점이 장점으로 작용할 때도 있었다.

바로  세컨드 어빌리티의 성장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점.

레이븐을 상대하기 위해선 세컨드 어빌리티의 상시 사용이 강제돼서, 자연스레 늘 수밖에 없었다.

검신의 색깔이 변한 것까진 아니었지만,  의지로 마나를 어느 정도 컨트롤  수 있게 됐다는 점은 고무적이었다.

그래봐야 대기중의 마나를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게 다지만.

어찌 됐든, 기말고사는 점점 목전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에 대비하는 나의 자세는 빈말로라도 좋게 평가하기 어려웠고.

…내가 기말고사 대비가 엉망이 되어가고 있는 이유는 당연히 여자 문제 때문이다.

살면서 여자란 걸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여자들 치마폭에 안겨 헛짓거리만 하며 보낸 날만 해도 제법 된다.

물론 이 또한 내 상황을 합리화하려는 변명에 불과하지만.

뭐, 그래도 지금은 좀 나은 형편이다.

이젠 모두 자기 일한다고 바쁜 터라, 어울리는 사람이 없어서.

당연히 혼자 남은 내가  수 있는 거라곤 연습뿐이다.

마나글레이브를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슬슬 류진에 대한 감은 잡아가고 있다.

이젠 아이나 없이도 스스로 훈련을  수 있는 정도는 되었으니.

게다가, 중급 기술도 이제 제법  쓸 수 있게 되었다.

어디까지나 훈련에서지만.

후, 류진을 그럭저럭 다룬다고 말할  있을 정도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려나.

여름 방학 내내 연습만 해도 부족할 거 같다.

아니, 어쩌면 1년이 지나도 불가능할지도.

그래도 둔재인 내가 이정도로 발전했다는 것만 해도 놀랄 일이다.

…대부분이 아이나의 공이긴 하다만.

아이나라는 좋은 스승이 없었다면, 아마 아직도 붕쯔붕쯔거리는 실장검법이나 사용하고 있었겠지.

아, 아이나의 눈에는 지금도 실장검법으로 보이겠구나.

슬픈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다 내 실력이 부족한 탓인걸, 어쩌겠나.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그렇게, 훈련실의 이용 시간이 다 될 때까지,  연습은 끝나지 않았다.

* * *

“얘들아, 오늘은 기쁜 소식 세 가지 있다.”

빈센트가 살짝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다.

우리가 기쁜  아쉬운 건가?

정말 빈센트답네.

“뭔데요? 기말고사 안 친데요?”
“그럴 리가 있겠냐?”
“그거 말고 좋은 소식 없는데.”
“기말고사의 난이도에 조정이 있다.”

빈센트의  말에 다들 환호성을 지른다.

베아트릭스는 어디서 가져온 건지 아예 부부젤라까지 꺼내 불고 있다.

…살 타는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사상력으로 만들어 낸 물건인가보다.

역시, 내가 광대 기질이 있다곤 해도, 베아트릭스처럼 타고난 미친년을 상대할 수는 없구나.

뭐, 그래도  정도로 기뻐할 일이긴 하지.

“원래는 너희들이 훈련할 때 사용하는 홀로그램보다 강하게 등장할 예정이었지만, 그건 너희에게 무리인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훈련용 홀로그램의 스펙과, 시험에 등장하는 홀로그램의 스펙은 완전히 동일할 거다.”
“진작 그랬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난이도를 내려준 거에 감사해라.”

다행이네.

나도 별로 자신 없었거든.

자신 있는 녀석이 누가 있었겠느냐 만은.

“두 번째 더 좋은 소식은, 이번 기말고사는 중간고사와 똑같은 환경에서 진행될 거라는 점이다.”
“하,  좋긴 한데, 솔직히 시가지 지겨워서 죽을 거 같아요.”
“그럼, 다른 도시로 바꿔줄까? 너희 건물 위치 다 바뀌고 나면 어디서 막아야 유리한지 전부 다시 외워야 하는데, 괜찮냐?”
“아닙니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윽, 또 그 홀로그램 도시인가.

나야 지형을 빠삭하게 외우고 있어서 좋긴 하지만, 천현우 말마따나 지겨운 건 어쩔  없다.

“그러면, 세 번째 좋은 소식은 뭐예요?”
“이게 가장 좋은 소식이지. 이번 기말고사는 아무리 못 쳐도 낙제점이 없을 예정이다.”

뿌우―!

베아트릭스의 부부젤라가 더 큰 소리를 낸다.

원래 같았으면 진작 제임스나 천현우가 저 기행을 말렸어야 했건만, 다들 기쁨에 겨워 말릴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그래, 뭐, 베아트릭스 마음대로 하게 두는 것도 나쁠 건 없지.

“이게 옳게 된 아카데미지.”
“기쁨의 기타 연주 한  가겠습니다.”
“이번 시험은 나도 자신이 없었는데, 마침 잘됐네.”
“근데, 낙제점이 없으면 다들 최소점만 받고 대충하는 거 아니야?”
“설마, 그런 애가 나오겠어?”

뭐, 백성연의 걱정이 틀린 것은 아니긴 하다.

S클래스면 사실상 오를 만큼 오른 자리라, 대충 알박기만 하고 대충하는 사람 정도야 얼마든지 나올 수 있지.

올리비아가 대표적인 그런 예시고.

“그런 경우는 당연히 낙제점 처리다. 그건 용납할 수 없어.”
“뭐가 됐던 개꿀이잖아?”
“낙제점 없는 거에 감사해야지. 리얼루다가.”

고개를 돌려 올리비아를 쳐다보았다.

…혀 차는 소리를  올리비아의 썩어들어간 표정이 눈에 띈다.

정말 올리비아답네.

“올리비아 생도, 불만 있나?”
“아니요.”
“근데 표정이 왜 그따위냐고. 어?”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왜  분위기 좋은 데 초를 치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솔직히 올리비아랑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만 봐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평소에 짓는 표정부터가 타인의 반감을 사기 쉬운 스타일이다.

벌레라도 씹은  같은 뚱한 표정.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힘든 묘한 웃음.

두 가지 표정밖엔 짓지 않는 사람이니.

나라고 다를 건 없다.

나도 올리비아와는 친해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빈센트라고 그걸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다음엔 조심해라.”
“네.”

…그렇게, 또 오늘의 강의가 시작됐다.

* * *

강의가 끝난 현재.

내가 있는 곳은 당연히 훈련실이다.

낙제점이 없어졌다곤 하지만, 최대한 좋은 점수를 받는 게 나으니까.

[사용자가 인식되었습니다. 사상력을 동기화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사용자, 박성진의 사상력의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훈련을 설정해주세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중간고사 때 지겹도록 보았던 그 홀로그램 도시를 또  손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생각에 역겨움이 치밀어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건, 비라던지, 밤이라던지, 하는 귀찮은 환경은 설정돼있지 않다는 것.

[훈련의 설정이 완료되었습니다.]

하도 오래 보다 보니, 이제 레이븐의 저 생김새도 나름 정감이 간다.

사실 정감은 원래 갔을지도 모른다.

레이븐의 외관은 꽤 멋있거든.

착 달라붙는 바디수트가 그녀의 몸매를 강조하고, 흑사병 의사 가면을 연상케 하는 가면도 멋지니까.

…어쨌거나, 지금은 내 적이지.

[카운트다운, 5, 4, 3, 2, 1, 0,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카운트다운이 끝나는 즉시, 레이븐이 나에게로 돌진했다.

요즘 들어서 깨달은 것이지만, 이렇게 레이븐이 돌진해주면 오히려 고마워 해야했다.

스스로 공간 왜곡을 봉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오히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공간 왜곡만 사용하는 게 훨씬 골치 아프다.

마나글레이브를 작동시키고, 류진의 다양한 기술들을 활용해 최대한 레이븐을 압박한다.

물론 수준 차이가 극심해서, 제대로 된 압박이 가해지지는 않는다.

그냥 말이 압박이라는 거지.

그래도, 압박이 전혀 안 되는 수준은 또 아니다.

맹렬한 몸동작에서 나오는 회전력을 이용하는 기술이 대부분인 검법, 류진과 초록빛의 검신의 출력이 합쳐져 나오는 위력이 대단히 우수했기에, 레이븐이라고 마냥 내 공격을 무시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니 내 사상력들은 레이븐에게 상성이 상당히 유리하군.

반쪽짜리긴 해도 은신도 감지할  있고, 그래플링을 사용하면 거리를 좁히는 것도, 벌리는 것도 편하니 말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지금까지 사용했던 것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그래플링을 요구한다는 것일까.

지금까지는 대충 이동하는 용도로만 그래플링을 써왔는데, 류진에 사용되는 그래플링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기본적으로는 몸의 균형을 잡는 데도 필수적이었고, 큰 동작이 끝난 뒤 찾아오는 허점을 방어하기 위한 동작 변환을 위해서도 따로 그래플링을 사용해야 한다.

그 이외에도 상당히 귀찮은 점이 많이 있지만, 가장 귀찮은 점은 역시 실이 꼬이지 않도록 실 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비유하자면, 자신을 마리오네트로 사용하는 꼭두극을 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설명하기 조금 어렵네.

결론만 말하자면, 류진의 성장과 퍼스트 어빌리티의 성장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류진을 성장시키기 위해선 퍼스트 어빌리티, 미명의 거미도 반드시 성장시켜야 하는 대신, 미명의 거미가 성장하면 그만큼 류진의 실력도 함께 성장한다.

…이것도 나를 강하게 만드려는 아이나의 계획이었을까?

결국 류진을 잘 사용하기 위해선, 미명의 거미를 더 많이 사용해야만 하니까.

찐사랑이라고 해야 할지, 무서운 여자라고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네.

뭐가 됐던, 덕분에 내 그래플링 실력은 전에 없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몸에 전혀 힘을 주지 않고, 실의 움직임만으로 일상적인 동작은  커버할 수 있는 정도?

섬세한 동작까지는 무리지만.

그래도 이는 확실히 전투에 도움이 된다.

이렇게 장기전을 요구하는 전투에서는 체력이 판가름을 내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실을 이용해 움직임을 보조하게 되면, 조금이라도 체력을 아낄 수 있으니.

생각보단 훈련이 즐겁네.

아, 단지 시험이 앞이라서 그렇게 느끼는 건가.

막상 기말고사 당일이 되면 괴로울 것 같기는 하다.

중간고사 때도 그랬지만, 나는 긴장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라.

윽, 이번엔 생각보다 오래 버티지 못했군.

잡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어서 그런가.

좀  공격적인 기술 위주로 구성해서 다시 레이븐에게 도전해 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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