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기말고사 대비 기간?(3)
트리니티 아카데미에 입학한 뒤, 내 생활 습관은 상당히 건강하게 개선됐다.
매일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던 과거와는 달리, 12시에 취침하고, 7시에 기상하는 것이 이제 몸에 익었다.
7시에 기상하고 나면, 북문 공원의 짧은 코스를 한 바퀴 돌고 기숙사로 돌아온다.
그러면 대략 7시 반에서 7시 40분경이 된다.
아침 산책을 끝내고 기숙사로 돌아와 씻고조식을 먹은 뒤, 가벼운 티타임을 즐기다 강의실로 가는 게 내가 하루를 시작하는 방법이다.
…티타임이라 해서 내가 무슨 점잔빼면서 유난떠는 걸 좋아하고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차를 마시게 된 것에 가깝지.
이사장인 클로에가 자신은 차를 좋아한다며, 1위 선물로 여러 종류의 차를 몇 박스나 보내온 것이 그 원흉이었다
이렇듯,현재 나는 무척이나 건전한 삶을 영위하는 중이다.
뭐, 그렇다고 내 삶이 특별히 무언가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그냥 기분이 약간 상쾌한 정도?
벌써 잔의 차가 벌써 다 떨어졌네.
마침 시각도 8시 40분이니, 슬슬 강의실로 출발해야겠다.
아, 반지를 끼는 걸 잊을 뻔했다.
끼고 가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
몸서리가 쳐지네.
* * *
“벌써 약혼반지까지 맞추셨네. 아이구.”
“성진좌! 성진좌! 성진좌!”
“저 정도면 프로포즈 멘트도 아이나가 먼저 준비했겠네.”
“그, 성진아, 네 능력에 가능해 보이진 않지만, 졸업하기 전에 최소한 혼수라도 준비하자…. 축가는 내가 아는 밴드 보컬 한 명 구해다 줄게. 걔 목소리 좋거든?”
이미 예상한 반응이라, 그리 당황스럽지는 않다.
근데 아직 결혼은 너무 이른 거 아닌가?
“조용. 박성진, 아이나, 내가 남의 연애사에 간섭할 자격은 없지만, 그 나이에사랑 놀음에 빠지는 건 좀 자제해라. 졸업부터 해야지. 그래야 결혼을 하든 말든 할 거 아니냐.”
“아니, 제이드도 여자친구 있고, 제임스도 있잖아요. 왜 저한테만 뭐라고 하세요. 교수님이 결혼 못 해서 그러시는 거죠.”
“닥쳐.”
“맞네.”
“맞긴 뭘 맞아. 너희 교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근데, 개당 7,500크레딧 짜리 반지나 사러 쏘다니는 게 제정신이라고 생각하냐? 응? 나 때는 생각도 못 할 짓이었다.”
역시 라떼충은 어딜 가도 존재하네.
근데, 반지 가격은 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아니, 교수님이 이 반지 가격을 어떻게 아세요?”
“이미 교수들 다 안다. 아니, 교수들만 아는 게 아니고, 이사장님까지 아신다. 어떤 정신 나간 년놈들이 15,000크레딧 짜리커플링를 맞췄다고 소문이 파다하더라. 근데 그게 내 생도들인 줄은 몰랐네?”
“아.”
도무지 반박할 수가 없네.
빈센트가 라떼충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가 한 말은 모두 정론이다.
“아이나, 너는 할 말 없니?”
“제가 사줬어요. 좋아하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제발 날 비참하게 만들어주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정도면커플링이 아니고 그냥 개목줄을 차고 다녀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노예한테 커플링을 선물해주는 주인님? 이런 게 현실일 리 없다.”
“너무 스윗해서 주작 같죠? 박성진을 자퇴시키려는 미인계라고 생각해야?”
“아침 드라마 시나리오도 이거보단 현실성 있음.”
“근데 진짜면 자퇴해도 되는 거 아니냐? 아이나 정도면 박성진 뒤질 때까지 먹여 살릴 수 있잖아.”
이 세계가멸망하지만 않는다면, 그러는 게 현명하긴 해.
그게 아니라서 문제인 거지.
빈센트는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머리를 휘저었다.
“그냥 너희들 알아서 해라. 시험 조지고 유급을 하든, 나중에 자퇴를 하든, 내 일 아니니까.”
“저는 알아서 잘해요.”
나는 잘할 자신 없는데.
솔직히 유급당할까 걱정인 수준이고만.
“그래, 결과를 보면 알겠지. 훈련장이나 가자.”
* * *
이번에는 저번보다도 버틴 시간이 짧았다.
은신 위주로 상황을 풀어나가면 그래도 버틸 만한데, 공간 왜곡 위주의 공격을 하니까 답이 안 보이네.
“교수님, 공간 왜곡은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알아서 잘해라. 네 여자친구 보고 물어보던가.”
“아니, 그게 아이나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걔 오늘 기록 갑자기 확 좋아졌던데? 뭔가 깨달음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겠냐.”
갑자기 기록이 좋아졌다고?
어떻게 한 거지?
“아이나, 팁 있으면 좀 알려줘. 나 진짜 유급하면 좆돼.”
“비밀이야.”
그렇게 말하고, 아이나는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대체 무슨 방법이길래 나한테도 안 알려주는 건데.
“벌써 부부 클리닉 사랑과 전쟁 들어가나요?”
“박성진 인생 최대의 위기다. 이건.”
“이 형님이 주인님께 잘해주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거늘, 귓등으로도 안 들은 게냐! 갈!”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상냥했던 아이나인데.
뭔가 숨기고 싶은 게 있는 거겠지?
그렇게 믿어.
아니, 그래야만 한다.
“여자친구한테 까였으니, 내가 팁을 안 줄 수가 없구나.”
“빨리 알려주세요.”
“사실, 진짜 레이븐의 공간 왜곡에는 마땅한 타개책이 없어. 이건 약화된 레이븐이라 통하는 방법이라는 걸 알아둬라.”
“그래서, 그 방법이 뭔데요?”
“약화된 레이븐의 공간 왜곡에는 최소 시전 거리와, 최대 시전 거리가 정해져 있어. 그리고 한 번 왜곡을 사용하고 나서 다음 왜곡을 재시전 하는 데엔 약간의 쿨다운이 있지. 즉, 최대 사거리에서 간을 보며 왜곡을 한 번 사용하게 만들고, 왜곡을 사용할 수 없는 최소 거리까지 다가간다면, 공간 왜곡은 없는 능력으로 만들 수 있다.”
팁이라면 팁이긴 한데, 별로 크게 도움 되는 팁은 아니네.
실전에서 시도하기엔 상당한 난이도가 있는 방법이라.
애초에 보이지도 않는 놈인데다, 움직임도 하도 재빨라서 최소 거리를 꾸준히 유지해줘야 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에 가까우니.
“그게 전부인가요?”
“그럼, 뭐가 더 있겠어.”
“아녜요.”
“알아들었으면 후딱 훈련실 안에 들어가라.”
빈센트가 준 팁이 아예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분명 어떻게든 레이븐의 최소 거리 내로 들어간다면 공간 왜곡을 무력화할 수 있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다만, 그걸 지속하기가 너무 어려울 뿐이지.
* * *
레이븐과의 전투는 아직도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염병할 공간 왜곡은 도대체 대처를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네.
빈센트가대처랍시고 알려준 건 크게 도움도 안 되고.
갑갑한 마음을 떨치고자 스카이라운지에 들렀다.
몇 안 되게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공간이라.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친 것은, 잔뜩 심술이 난 표정의 프리실라였다.
“안녕, 프리실라.”
“여긴 왜 왔어.”
요즘 들어 프리실라가 내게 쌀쌀맞다.
내게 그녀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가 싶어 과거를 돌아보아도. 전혀 떠오르는 게 없다.
“그냥, 기말고사 생각 하니까 갑갑해서. 나 너한테 무슨 잘못한 거 있어?”
“없는데? 왜? 무슨 잘못한 게 있는 거 같아?”
“아니, 너 나한테 삐졌잖아.”
“안 삐졌는데?”
이 여자들 특유의 화법이 정말 싫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아이나와 카타리나를 좋아한다.
카타리나는 무척 직설적인 편이고, 아이나는 때때로 거짓말을 하긴 하지만, 여자들 특유의 성질머리를 돋구는 화법은 사용하지 않으니까.
“말하기 싫으면 됐어. 나중에 말하고 싶을 때 이야기해.”
“안 삐졌다니까?”
“안 삐졌으면 안 삐진 거지, 왜 화를 내?”
“네가 말귀도 못 알아듣고, 눈치도 없어서!”
그녀가 소리를 빽하고 지른다.
나는 흠칫하고 그녀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선다.
그래, 솔직히 내가 눈치가 없다는 건 인정한다.
근데, 그녀가 내게 딱히 무언가 눈치를 준 적이 있었던가?
잘 모르겠다.
“지금도 그러지. 자기는 아무 잘못도 없다는 거처럼!”
“내가 언제 그랬어?”
“거짓말이나 하고….”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는데?”
내가 프리실라에게 거짓말을 했던가?
그녀와 나눈 대화 하나하나 일일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프리실라를 화나게 할 거짓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걸 내 입으로 말해줘야 돼?”
“아니, 진짜 모르겠다고.”
“너, 아이나랑 그냥 훈련만 하는 사이라며? 그냥 관심이 가는 정도라며, 좋아하는 건 아닌 것처럼 말했잖아!”
“그건 내가 아이나랑 사귀기 전이잖아.”
“갑자기 마음이 변한 이유가 뭔데?”
그런 일이 있었는데, 마음이 변하지 않는 게 이상한 것 아닐까.
물론 나와아이나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프리실라는 모르니, 이해는 한다.
“원래 나랑 아이나는 썸타던 사이기도 했고….”
“하, 둘이 그런 사이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았어. 근데,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얼마 전에 아이나가 나한테 고백했었거든.”
프리실라의 낯빛이 변한다.
아마도 내가 먼저 고백했다 생각했으리라.
나도 아이나가 내게 먼저 고백을 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뭐야, 그런 이유였어? 이제야 그년이 어제 그런 행동을 한 게 이해 가네.”
“그건 또 무슨 소린데?”
“됐어. 넌 몰라도 돼.”
프리실라가 나를 밀쳐내고 스카이라운지를 떠났다.
프리실라가 저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녀도, 나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노골적으로 내게 눈치를 주고 있었긴 하다.
단지, 나에게는 아이나가 있었기에 그걸 외면한 것이지.
따지고 보면 아이나보다 프리실라가 더 먼저 내게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프리실라는 내가 빙의하기 전부터 이 몸의 주인과 아는 사이였으니까.
그렇기에, 어쩌면 내 생각보다 그 마음이 훨씬 클 수도 있다.
굳이 오셀롯 아카데미에서 트리니티 아카데미까지 전학 온 것을 보면 말이다.
물론 내 자의식 과잉일 수도 있겠지.
허나, 트리니티 아카데미에 전학 온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까지 말한 걸 보면, 그것이 사실일 가능성은 충분히 높다.
만약, 프리실라도 내게 마음을전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아쉽게도 난 여자의 마음은 잘 모른다.
좋게 좋게 프리실라가 나에 대한 마음을 접게 할 방법 따윈 전혀 모른단 말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방관하기에도 뭣하다.
아마 자기 주관이 뚜렷한 프리실라는 어떻게든 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고 할 테니까.
내가 치정 싸움을 경험하게 되는 날도 오는구나.
…좋다는 건 아니다.
딱히 경험하고 싶지도 않고.
물론 이세계로 간다면 하렘을 차리는 게 국룰이라고 외칠 남자들도 버젓이 있겠지.
나도 그에동의한다.
여럿의 미녀를 끼고 사는 것을 싫어하는 남자가 누가 있겠는가.
단지, 그걸 실현하기엔 많은 장애물이 있어서 실현하지 못하는 것이지.
일단 법의 제약도 있고, 다른 여자에게 칼침을 맞을 위험도 있다.
안 그래도 독점욕이 강한 아이나인데, 헛짓거리했다간 언제 내 목이 날아갈지 모른다는 공포도 도사리고 있고.
마지막으로, 아이나를 외면하기엔 내가 그녀에게 진 빚이 너무 많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다못해 둘이 사이라도 좋으면 어떻게 쇼부를 쳐보겠는데, 둘은 원래도 성격이 잘 맞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지는군.
근데, 어제 아이나가 프리실라에게 대체 뭘 했길래 그런 반응을 보인 거지?
진심으로 화가 난 표정이었는데.
밤에 일어난 일이라면 내가 알아낼 방법도 없다.
여자 기숙사와 남자 기숙사는 분리되어있으니까.
그렇다고 둘이 독대를 한 것 같지는 않았다.
뭐였던 걸까.
머리를 싸매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괜찮은 해결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분명 나는 갑갑함을 해소하기 위해 여기에 온 건데, 어째서 갑갑함이 늘어만 났을까.
한숨이 절로 나오네.
그때였다.
작은 청서 한 마리가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런 곳에 청서가 다 있네.
근데, 보라색 눈을 가진 청서도 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