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기말고사 대비 기간?(2)
착 가라앉은 분위기가 강의실을 지배하는 데는 며칠도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기말고사가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제임스와 제이드가 이번 시험은 이미 망했다며, 매일 술판만 벌이고 있는 것만 보아도 어떤 느낌인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으리라.
어디서 술을 구해왔는지는 모르겠다만.
“1학년 1학기 기말고사가 이 지랄인데, 앞으로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행보가 어떨지, 참 기대된다. 씨발거.”
“자퇴나 할까?”
“거기까지.”
…대충 이런 느낌이다.
나도 이해는 한다.
고작 생도들을 상대로 레이븐을 내보내다니, 어떤 미친 작자의 발상인지 궁금해질 정도니까.
누군지 대충 짐작은 간다만.
아무튼, 솔직히 누구에게나 버거운 임무라, 좌절하고 있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내게도 마찬가지고.
“야, 박성진.”
“왜?”
“같이 어디 좀 가자.”
“가긴 어딜 가. 기말고사가 얼마 안 남았는데.”
아이나가 스읍하는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켰다.
눈빛이 차게 식은 게 보인다.
내가 잘못한 건가?
“어허, 주인님이 부르시잖냐. 어딜 노예가 도망가려고.”
“그래, 이 자식아. 너는 평생 아이나를 모시고 살아도 모자랄 판인데 감히 명령을 거역하려고 들면 안 되지.”
“성진아. 팔자 고칠 수 있을 때고치자.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우리랑은 대화도 안 하려 하는 아이나가 데이트신청을 했다? 이거는 뭐 사실상 결혼하자는 이야기나 다름없거든요?”
아이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은 날 이후로도, 좋아한다는 어필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우린 반쯤 커플 취급을 받고 있다.
내 취급이 영 좋지 못하긴 하지만.
원체 숫기가 없는 나라, 많은 상황을 아이나에게 끌려다닌다는 게 그 이유였다.
뭐, 보이지 않는 격의 차이도 작용했다.
명문가의 차기 당주인 아이나와, S클래스라는 이름 이외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평민 1에 불과한 나의 신분 차이는 어마어마했으니까.
당연히 내가 아이나에게 잘해줘야 한다는, 그런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사실 그것만으로 끝나면 다행이다.
같은 S클래스 애들은 날 아이나의 공식 노예쯤으로 취급했으니까.
근데 난 진짜 유급하면 안 되는데.
B는 받아야 한다고.
나는 필사적으로 내 아군이 되어줄 사람을 구했다.
그래, 프리실라나 카타리나 정도면 내 편이 되어주겠지?
그들에게 눈길로 SOS요청을 보냈다.
그것이 최악의 수가 되리라곤 예상치 못했지만.
“둘이 물고 빨고 잘했잖아? 재밌게 보내!”
“박성진, 너는 내가 저번에 한 이야기는 귓등으로 들었나?”
이게 아닌데.
“아이나는 남자 운도 없어. 첫 남친이 하필이면…. 아니다. 둘 다 불쌍하니까 여기까지만.”
올리비아의 막타에, 내 정신은 너덜너덜해졌다.
분위기상으론 내가 그랜절이라도 박아야 할 분위기인데.
아, 모르겠다.
중간고사는 1위였으니, 기말고사는 좀 대충 치지, 뭐.
까짓거 하루 정도야 아이나의 충실한 개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고.
나는 냉큼 아이나 쪽에 달라붙었다.
“미안, 바로 가자.”
아이나의 싸늘했던 표정이 조금은 풀렸지만, 여전히 차가움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내 대처가 늦어도 많이 늦긴 했나 보다.
그녀는 내 손을 거칠게 붙잡고는 강의실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성진아, 지금은 네 스스로가 병신같다고 생각하겠지만, 나중 되면 네가 병신이라는 걸 깨닫게 될 거다. 제발 정신 차리자!”
“나는 나탈리아를 모시면서 사는데, 애가 분에 겨운 줄을 모르네.”
“너 정도면 괜찮은 거지. 자식아. 난 제인이 5만 달러짜리 기타 부숴 먹었을 때도 한마디도 안 했어.”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겠지. 그리고 못한 네가 호구인 거고. 근데, 너 제인이랑 헤어졌다고 하지 않았냐?”
“그래서 후회 중이다. 그때 화를 냈어야 했는데.”
…내가 많이 잘못했네.
근데, 어디 가는 거지?
“그래서, 어디 가는데?”
“서문.”
“서문엔 왜?”
“그냥 따라와. 짜증나게 하지 말고.”
아이나의 그르렁거림에 나는 잠자코 그녀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나와 아이나의 뒤를 밟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도모른 채.
* * *
아이나가 내 손을 잡고 이끈 곳은, 백화점이었다.
아이나가 이런 곳을 온다고?
사람들은 다 똑같구나.
아이나라고 다를 건 없었네.
“이 향, 어때?”
“잘 모르겠는데. 머리 아파.”
“빨리 대답해.”
“라벤더 향이랑 오렌지 향이 나는데. 괜찮은 거 같아.”
결코 대충 대답한 게 아니다.
성심성의껏 대답하고 싶어도, 나는 화장품에 대한 조예 같은 게 전혀 없었던지라, 내 수준에선 이게 최선의 대답이었다.
솔직히, 입X로랑이니, 조 X론 런던이니,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가 맡기엔 다 그게 그건데.
아무튼, 그녀는 여러 개의 향수를 시향해 보더니,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찾은 듯했다.
“이건 어때?”
“장미 향이랑, 위스키? 비슷한 나무 향이 나네. 이건 좀 괜찮다.”
“그래? 그럼 이거 하나 주세요.”
“1,500크레딧입니다.”
미쳤네.
대충 15만원 정도라는 거 아니야.
여자들의 금전 감각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너도 남성용 향수 하나 살래?”
“게이도 아니고, 무슨 남자가 향수냐.”
“그래, 나도 그냥 해본 소리야.”
상남자는 향수 같은 걸 뿌리지 않는다.
그런 건 외도지.
“근데, 방금 그 향수 엄청 비싼 거였잖아. 크레딧 그렇게 막 써도 돼?”
“집에서 쓰던 거보다 훨씬 저렴한 건데?”
음.
그래.
내 금전 감각을 그녀에게 빗대는 게 잘못된 거구나.
아무튼, 그녀의 쇼핑은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화장품만 본 것이 벌써 1시간째.
아까 머리가 아프다고 한 것은 농담이었지만, 이젠 정말 이 지긋지긋한 화장품 냄새에 머리가 아파왔다.
화장도 별로 안 하면서, 무슨 화장품을 이렇게 오래 보는 거람.
“자, 가자.”
“이제 쇼핑 끝났어?”
“무슨 소리야? 이 건물은 11층짜리야. 아직 1층에도 볼 게 많이 남았고.”
앞으로 넘어야 할 고개가 열 개나 더 남았구나.
10층은 식당이고, 11층은 영화관이니까, 여덟 고개인가?
그걸 생각해도 한참 남았네.
그래도 토를 달지는 않았다.
그녀가 무서워서…는 아니고, 오늘은 그녀의 말을 잘 듣기로 한 날이니까.
* * *
고개는 여덟 개가 아니었다.
그래, 여자들은 쇼핑 코스를 왕복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내 잘못이지.
아무튼, 열다섯 고개를 지나, 마지막 고비인, 1층에 도착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쥬얼리 샵이었다.
“귀고리 같은 거라도 사게?”
“아니, 반지 맞추려고.”
반지라.
그때 빌런이 끼고 있던 반지가 생각나네.
꽤 좋은 효과를 가지고 있었는데, 아쉽다.
“뭐, 마음에 드는 거는 있고?”
“음, 아직.”
“그래, 고르면 말해.”
하루 종일 걷기만 하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이제 그냥 앉아서 쉬고 싶다.
“너도 와서 봐야지.”
“내가 왜?”
“너도 낄 거니까.”
당황스럽네.
이렇게급하게 진도를 뺄 이유가 있나?
“박성진 생도랑 아이나 생도 아니세요? 두 분이 커플이셨구나. 몰랐네요.”
“아직….”
“네, 맞아요.”
난 아직 그녀의 고백에 제대로 대답한 적이 없다.
근데, 왜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걸까.
“그럼 이 제품은 어떠세요? 14k 커플링인데…”
“금 말고, 백금은 없나요?”
“있긴 한데… 백금 반지는 거의 다 밋밋해서요. 가공하기 좀 어렵거든요. 예쁜 반지는 금쪽에 더 많아요.”
“이건 백금 아닌가요?”
그녀가 진열장의 반지 하나를 가리킨다.
멋들어지게 가공된 반지가 진열장의 불빛을 받아 번쩍이고 있었다.
가격이….
“야, 7,500크레딧이잖아!”
“우리 10,000크레딧 받았었잖아. 기억 안 나? 나 그거 말고도 크레딧 벌어둔 거 많아.”
“아니, 그래도 이건 너무 비싸잖아. 각자 자기 크레딧으로 살 거 아냐? 나 크레딧 말고 현금 한 푼도 없어. 트리니티 아카데미에서쭉 생활 해야 한다고.”
“그래? 그럼 일단 네가 가진 크레딧으로 사. 아카데미 밖에 나가면 내가 이 반지 가격에 맞춰서 돈 줄게. 그럼 된 거 아냐?”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고… 돌겠네, 진짜.”
오늘따라 아이나가 이상하다.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저희도 진열만 해놨지, 진짜 팔릴 거라고 생각해서 내놓은 건 아니라….”
“할게요. 이걸로.”
“아니, 한 번만 다시 생각하자.”
“난 이미 정했다니까? 저 반지 8호 껴요. 얘만 몇 호인지 체크해주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아,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이유라도 좀 알고 싶다.
“음, 18호네요! 8호, 18호, 마침 물건은 둘 다 있으니까, 지금 바로 가져올게요.”
“네.”
“하아.”
“돈 준다고. 그만 한숨 쉬어.”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복에 겨운 소리로 들리겠지만, 솔직히 부담스럽다.
나는 아직 그녀와 사귀고 있다는 생각이 없지만, 굳이 그녀와 교제한 기간을 생각하면 대충 한 달 정도가 되었으리라.
근데, 나에게 이 정도로 잘해주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그 짧은 기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레 이런 급격한 심정 변화를 나타내는 것일까.
“착용해보세요. 둘 다 손이 예쁘셔서,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자, 끼워 줘.”
“그….”
“끼워 달래도.”
아이나가 왼손을 내밀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녀는 왼손 약지로 내 가슴을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내민왼손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직원의 말대로, 은빛으로 빛나는 반지는 가늘고 긴 그녀의 손에 잘 어울렸다.
“음, 괜찮네. 그렇게 비싼것도 아니고. 기분 내기엔 적당한 거 같아.”
반지를 끼워 준 뒤, 고개를 들어, 아이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바라보는 방향으로, 반지가 끼워진 왼손을 과시하듯 흔들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전에 볼 수 없던 음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나는 얼른 그녀가 보고 있는 쪽으로 눈길을 돌렸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였을까?
“결승전에서 좋아한다고 말했던 상대가 아이나 생도였나봐요? 사이가 되게 좋으신데요? 평소에 잘해주시나 봐요.”
“맞아요.”
“되게 잘 어울리는 커플 같아요. 오래 가시면 좋겠네요.”
“자, 이젠 내가 끼워 줄게. 손 줘봐.”
내가 손을 내밀기도 전에, 아이나는 알아서 내 손을 가져갔다.
어느샌가 반지는 내 손에 끼워져 있었다.
“잃어버리지 말고, 꼭 끼고 있어야 해?”
두렵다.
이걸 잃어버렸을 때 일어날 후환이.
“대답.”
“응.”
“그럼됐어. 오늘은 나 따라다닌다고 수고 많았어. 다음엔 네가 하고 싶은 거 하자.”
아이나가 내 손을 꼭 잡았다.
오늘도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너 약했냐?”
“그럴지도? 너같은 애를 좋아하게 된 걸 보면, 제 정신이 아닌 것 같기도 해.”
“나는 널 아직 한 번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네가 날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정말로?”
그리고, 그녀는 내 볼에 입술을 맞췄다.
소리가 날 정도로, 진하게.
“내가 마음이 변하지 않게 붙잡아도 모자란 주제, 건방지게 그런 소리나 하고.”
“반대로, 넌 나한테 너무 과분한 사람이라서 그래.”
“그걸 기회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기회는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아.”
“그럼, 지금이라도 잘 붙잡아야 할까?”
“너 하기에 달렸겠지?”
과연 내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