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기말고사 대비 기간.(1)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이다.
가벼운 조식을 먹고, 심장약 한 알을 입안에 털어 넣은 뒤, 강의실로 향한다.
강의실로 들어서자, 평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날 덮쳤다.
경직된 분위기라고 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금세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보편적으로 강의 시간보다 늦게 강의실에 도착하는 빈센트가 웬일로 다른 생도들보다 강의실에 먼저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에 늘 앉던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내 옆자리에는 아이나가 아주 자연스러운 얼굴로 앉아있다.
이제 이 자리 배치도 익숙하네.
내 도착 이후로, 베아트릭스, 올리비아, 제임스, 제이드가 강의실에 들어온다.
그들도 평소와는 뭔가 다른 분위기에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이다.
올리비아만 제외하고.
올리비아는 평소와 똑같이 풍선껌을 불며 핸드폰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래, 모두 왔구나.”
“교수님이 웬일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응, 그건 너희 기말 고사가 얼마 안 남았기 때문이란다.”
여기저기서 탄식 소리가 쏟아진다.
벌써 기말고사가 눈앞이라니.
나도 몰랐던 사실인걸.
“기말고사는 뭐한데요?”
“저번 중간고사는 빡셌는데, 기말고사도 어려워요?”
“아, 제발 이상한 조건 좀 안 붙이면 안 돼요?”
“조용, 이번 기말고사에 대해서 말해주마.”
부산스러운 분위기가 얼추 정리되자, 빈센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장 중요한 걸 말하마. 이번 기말고사는 절대 평가다.”
“아, 또 이상한 거 하려나 보네.”
“에휴, 중간고사보다 더 힘들겠네.”
보통 절대 평가라면 좋아해야 정상이겠지만, 이곳은 다르다.
트리니티 아카데미에서 절대 평가 형식의 시험이 치러진다는 것은, 임무 완수형 시험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당연히, 임무의 내용도 그리 쉽지는 않다.
“시험의 내용은 간단하다. 시민들이 모두 안전지대로 대피할 때까지 빌런의 공격을 버티면 된다. 참고로 이번 시험에 등장하는 빌런의 모델은 너희에겐 레이븐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테일러 세스다.”
알고 있던 전개와 다르진 않네.
그렇다고 해서 시험이 만만한 것은 아니다.
상대가 그리폰 교도소의 수감자, 레이븐이니까.
“테일러요? 아이구, 씨발, 이번 시험도 망했네.”
“아니, 무슨 U레벨 빌런을 상대해요. 우리가. 이건 너무한 거 아니에요?”
“애초에 상대가 테일러면 저희보다 밑 클래스 애들은 아예 상대도 못 하지 않나요? 별로 공정한 시험이 아닌 거 같은데.”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
트리니티 아카데미가 무리수 두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곤 해도, 그 정도로 막장 운영을 하진 않는다.
“당연히 아니지. S클래스, U클래스의 생도들에게만 치러지는 시험이다. 원래 테일러 세스보다 훨씬 약화된 마이너 카피고.”
“아, 그럼 그래도 좀 할만하겠네.”
“그걸 생각해도 별로 쉬울 거 같지 않은데.”
“근데, 테일러 세스가 누구야?”
베아트릭스… 너는 중간고사를 보고 나서도 변한 게 없구나.
다른 생도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젠 베아트릭스의 무지함에 익숙해진 걸까.
“유명한 빌런 있어. 지금은 그리폰 교도소에 수감당해 있지. 은신 계통 사상력을 주로 사용하는 각성자로 널리 알려져 있고, 아티팩트까지 소유하고 있어서, 존나 세고.”
“성진이는 아는 게 많네.”
“네가 멍청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냐?”
제임스의 쓴소리에 베아트릭스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베아트릭스를 옹호해줄 마음은 없다.
제임스의 말은 명백한 사실이니까.
“아무튼, 오늘부터는 너희끼리 훈련하는 게 아니고, 테일러 세스의 공격 패턴과 사상력을 복제한 더미와 훈련을 진행하게 될 거다.”
“근데요. 만약 이번 시험에서 테일러를 처치하면 어떻게 되나요?”
“뭐? 당연히 최고점이지. 근데 그런 녀석이 나오긴 하겠냐?”
“생각해보니까 그러네요. 그냥 시민들 구하는 거에 포커스를 맞추는 게 낫겠네.”
빈센트의 말은 정확하다.
비단 S클래스만이 아니고, U클래스에서도 테일러를 처치하는 녀석은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모용린 정도가 테일러를 압박하긴 하나, 모용린조차도 처치하지는 못하니까.
“자, 아무튼 훈련장으로 간다. 실시!”
빈센트의 구령에 제대로 호응하는 녀석은 한 명도 없다.
다들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굼뜨게 훈련장으로 움직일 뿐이다.
물론 빈센트는 그런 걸 전혀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 * *
훈련장에 도착하자, 이미 시험에 대비 중인 U클래스 생도들의 모습이 보인다.
당연하게, 그들도 모두 넋을 잃은 표정이다.
뭐, 상대가 상대니까.
“자, 모두 훈련실에 들어가라. 설정은 내가 맞춰줄 테니.”
[사용자가 인식되었습니다. 사상력을 동기화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사용자, 박성진의 사상력의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훈련의 설정이 완료되었습니다.]
훈련실 반대편에 테일러의 형상을 한 홀로그램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양심적이네.
아티팩트는 복제 안 해놓은 걸 보니.
[카운트다운, 5, 4, 3, 2, 1, 0,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시스템의 안내 메시지가 끝나는 즉시, 테일러의 모습을 한 홀로그램이 사라진다.
곧바로 세컨드 어빌리티를 발동시켜, 마나의 기류를 읽기 시작했다.
대기 중에 가만히 떠다니는 마나들 사이를 무언가가 재빠르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테일러의 홀로그램이겠지.
내게 은신 감지 사상력이 있다고는 인식하지 않았는지, 거침없이 나를 향해 질주한다.
…움직이는 속도가 급이 다르네.
은신 감지 계열의 사상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벌써 여기서 훈련이 끝났을 확률이 높다.
그나마 나는 세컨드 어빌리티에 유사 감지 효과가 있으니 망정이지.
마나글레이브를 작동시켜, 놈이 파고들 위치를 적당히 베어 가른다.
그리고, 홀로그램은 그것을 비웃듯, 아주 매끄러운 동작으로 내 공격을 회피했다.
이걸 피한다고?
카타리나의 가속이 절호조에 달했을 때랑 비슷한데?
놀라운 일은 연속으로 일어났다.
최소한의 동작만으로 내 공격을 회피한 것으로 모자라, 그 짧은 틈에 나에게 반격까지 넣은 것이다.
심지어, 상처에서 피가 쏟아지기 전까지는 그 사실조차 몰랐다.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교수들이 생도들을 가벼이 여길 법하네.
아무리 S클래스가 트리니티 아카데미 내에선 날고 기는 수준이라곤 해도, 이런 미친놈들이 날뛰는 현장에서 직접 뛰어봤으니, 생도 정도야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
여태까지 나도 꽤 많이 성장했다고 느꼈는데, 이렇게 현격한 갭의 차이를 눈으로 보고 나니, 약간의 절망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 감정에 지배당해서 좌절해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해야지.
나는 자세를 고쳐잡았다.
류진의 기본자세로.
그리고, 실을 뽑아내어 그래플링을 시작했다.
어떻게 되먹은 게 약화됐다는 놈의 뛰는 속도가 내 그래플링보다 빠른 거냐.
이해할 수 없네.
아무튼, 내가 선보일 수 있는 류진의 기술들을 최대한 활용하기 시작했다.
속도는 테일러의 쪽이 빠를지 몰라도, 테일러의 무장은 단검이다.
리치 상의 우위는 내게 있다.
그걸 최대한 살리며, 다양한 공격을 시도했다.
* * *
훈련실의 밖에는 여섯 명의 S클래스 생도가 있었다.
백성연, 베아트릭스, 제이드, 제임스, 올리비아, 카타리나.
이들은 모두 테일러의 홀로그램에게 1분도 버티지 못한 생도였다.
그렇다고 그들 중에 낙심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상대가 레이븐이었으니, 모두가 그럴만했다는 감상이었다.
“둘이 맨날 같이 다니더만, 좀 늘긴 했네.”
“아이나가 성깔이 좆같아서 그렇지, 실력 가지고 태클 거는 애는 없었으니까.”
“잡기술을 버린 박성진 나오나요?”
“보기보다 근성은 있는 모양이군.”
척 보기에도 박성진의 검술은 상당히 많이 진보해있었다.
검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이들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수준이었지만, 저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근데, 쟤네 요즘 좀 느낌이 이상하지 않냐?”
“그렇긴 해. 박성진이랑 대화할 때는 성질도 안 부리고.”
“에이, 아무리 그래도 아이나인데. 걔 성격엔 박성진 같은 애는 급에 안 맞는다고 하지 않겠냐?”
“성진이랑 아이나랑 사귄대?”
딱히 말을 안 하고 있던 것이지, S클래스의 대부분은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눈치채고 있었다.
당연히 베아트릭스는 제외하고 말이다.
다만, 냉혈한인 아이나와, 광대 기질을 가진 박성진이 어울릴 것으로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기에, 반신반의하고 있을 뿐이었다.
결정적으로, 둘은 타인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으며, 이성 관계가 괴멸적이라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었다.
“이야기 나온 김에 아이나 쪽이나 한 번 볼까. 알프레드는 이미 봤고.”
“잘하고 있네. 얘는 뭐 우리가 걱정할 수준이 아니긴 하지.”
“아휴, 다른 아카데미면 절대 평가로 꿀 빨고 있을 텐데, 이게 뭐냐.”
그렇게, 그들의 관심사는 빠르게 기말고사로 되돌아갔다.
* * *
은신만 있으면 모르겠는데, 저 빌어 처먹을 공간 왜곡은 하향을 처먹인 게 저 모양이라니.
진짜 너무 부조리하다.
이게 갭의 차이라는 건가.
내 몰골이야 말할 것도 없이 처참했다.
오른손을 잃었고, 복부에는 내장까지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왼쪽 다리는 사실상 뼈대만 남아있다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이동은 그래플링에 의존하고 있었다.
어차피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최후의 객기라도 부려봐야겠네.
얼마 전에 익힌 류진의 중급 기술이라도 시도해봐야겠어.
상대방의 검을 휘감아 오르는 기술, 비산하는 용오름을.
솔직히 말해 성공률은 극도로 낮다.
비산하는 용오름은 상대의 무기 길이가 길 때 주로 사용하는 카운터 기술이니까.
단검을 상대론 그다지 용이하지 못한 대처법인 것이다.
하지만, 이거라도 해봐야지.
어쩌겠어.
신중하게, 차분하게, 상대의 검을 바라본다.
몇 합 정도는 흘려도 괜찮다고 생각해야 한다.
어차피 이 승부는 길면 길어질수록 내 패색만 짙어지는 승부니, 확실한 결정타를 노리는 게 더 중요하다.
상처가 점점 늘어난다.
그럼에도 집중을 잃어선 안 된다.
아직, 아직도 아니야.
오직 한 번의 기회만을 노린다.
그리고,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한 번의 기회가 마침내 내게 찾아왔다.
놈이 얕게 쳐내는 것이 아닌 깊게 받아낸다는 선택지를 골랐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홀로그램의 대각선 방향으로 파고들며 앞으로 뛰었다.
나의 마나글레이브를 상대의 단검에 휘감는 듯한 감각으로, 마나글레이브에 힘을 싣는다.
그 행동에서 얻은 회전력으로, 상대방의 배후로 넘어간다.
이제 이 녀석의 목을 치기만 하면…!
[승자, 테일러 세스. 훈련이 종료됩니다.]
결국 실패했네.
비산하는 용오름을 사용한다는 전략 자체가 틀리진 않았던 거 같은데.
아무래도 사용하는 데 걸린 시간이 너무 길었나 보다.
그나저나, 다른 애들은 얼마나 버텼을까?
훈련실 밖으로 나오니, 알프레드, 아이나, 프리실라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훈련실 밖에 나와 있었다.
근데, 분위기가 썩 좋아 보이진 않는다.
다들 빈센트 앞에 모여 뭔가를 항의하고 있었다.
“약화된 게 이거라고요?”
“이건 C만 받아도 1등 하겠는데.”
“장난치지 마세요. 진짜.”
과연 U레벨 빌런이다 싶긴 했지.
서드 어빌리티인 영혼을 거두는 자는 애초에 없는 사상력이나 다름없었음에도 이 정도였으니.
약화시킨 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시험에선 이거보다 강하게 나올걸? 아님 말고.”
“미치겠네.”
제임스의 그 한 마디는, S클래스 생도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기엔 충분했다.
그렇게 모두가 이번 시험의 난이도에 절망하고 있을 때, 두 명의 사람이 무리에 추가됐다.
“아, 이번 시험 빡세겠는데?”
“아깝다. 좀만 더 버티면 이길 만 했는데.”
알프레드와 프리실라였다.
이 둘은 그래도 은신에 대한 대처가 잘 되는 편이니, 오래 버텨도 이상할 건 없지.
아이나는 분투 중인가 보네.
그녀의 훈련실에 가까이 가는 순간, 훈련실의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끝났어?”
“내가 마지막이야?”
“그렇더라고.”
“넌 몇 번째였는데?”
“뒤에서 네 번째? 나 다음에 알프레드랑 프리실라가 같이 나왔고, 네가 마지막이었으니까.”
돌연, 아이나가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래도 열심히 한 성과는 있나보네. 잘 했어.”
이거, 상당히 부끄럽네.
“둘이 진짜 사귀냐?”
“둘 다 우수생이긴 하지만, 아이나가 훨씬 아깝다는 걸 부정할 순 없군.”
“잘 모르겠고, 여자친구 생긴 박성진씨는 치킨 쏘셔야 하는 게 맞다 생각합니다.”
“와, 존나 배신감 드네. 솔로팸 혼자 탈출하네. 내일 박성진 뒤졌으면.”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니라고 말하려다 참았다.
그러다가 정말 유혈사태를 볼 수도 있을 거 같은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 순간, 빠득, 하고 이가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낸 건지는 몰라도 너무 선명해서 살벌하다.
거 연애 좀 할 수도 있는 거지.
너무 미워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