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전학생.
중간고사가 끝난 지 나흘이 지났다.
외출을 나갔던 생도들 대부분은 아카데미로 돌아온 상황.
S클래스라고 다르지 않았다.
강의실에 착석해있는 10명의 생도가 그 증거다.
“다들 잘 놀다 왔냐?”
““네!””
“그래, 잘 놀다 왔으면 됐다. 성적에 너무 연연하지 마라. 시험이야 못 볼 수도 있는 거지.”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S클래스에서 성적이 나쁘다고 낙담할 이유가 전혀 없다.
S클래스라는 것 자체가 이미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최상위권 학생이라는 뜻이니까.
물론 유급이라는 예외도 있긴 하지만, 그 정도로 성적이 나쁜 녀석은 없을 것이다.
원작에서도 유급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너희들에게 전할 말이 하나 있다.”
이 시기에 무슨 이벤트가 있었던가?
그런 건 없었던 거 같은데.
“전학생이 한 명 왔다. 다들 인사해라.”
전학생?
S클래스에 전학생이 왔다고?
또다시 미래가 바뀐 건가?
S클래스 생도 전원이 U클래스로 승급할 때까지 전학생은 한 명도 없었는데?
“안녕하세요. 프리실라 칼라일이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화이트레이디?”
화이트레이디잖아?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라이벌 아카데미로 항상 거론되는, 오셀롯 아카데미의 유망주.
아직은 유망주에 불과하지만, 나중에는 오셀롯 아카데미의 최고 아웃풋으로 거듭나는 사람이, 여긴 왜?
게다가, 프리실라 정도면이 S클래스내에서도 상위권에 들어가는 각성자다.
경쟁자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라, 나한테는 별로 좋지 않다.
“그 이름으로 불리는 건 조금 어색하네요. 그냥 프리실라라고 불러주세요.”
“그래, 간단한 자기소개만 하고 들어가라.”
“프리실라 칼라일이에요. 오셀롯 아카데미에선 파르두스 클래스였어요.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클래스로 치면 여러분과 같은 S클래스죠. 잘 부탁해요. 혹시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물어보셔도 좋아요.”
“오셀롯 아카데미에서 굳이 트리니티 아카데미로 전학 온 이유가 뭐야?”
내가 궁금했던 점을 알프레드가 먼저 질문해주네.
궁금한 게 당연하다.
오셀롯 아카데미는 트리니티 아카데미 못지않게 좋은 아카데미다.
따지고 보면트리니티 아카데미보다 좋은 점도 많다.
트리니티 아카데미가 세계 최고의 아카데미라곤 하나, 모든 점에서 최고인 것은 아니니까.
“오셀롯 아카데미는 좀 폐쇄적인 분위기거든요. 저는 그런 분위기를 싫어해요. 트리니티아카데미는 좀 자유로운 분위기인 게 마음에 들었어요.”
그럴듯한 이유다.
트리니티 아카데미가 아카데미 순위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건, 역시나 그 정통성 때문이다.
그리고, 전통이 오래된 집단의 특징은, 폐쇄적인 분위기가 강하다는 것.
하지만, 트리니티 아카데미는 반대의 성향을 띄고 있다.
가장 오래된 아카데미이면서, 가장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추구한다.
프리실라는 아마 그런 점을 높게 사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아니에요. 아무것도.”
왜 말을 하다 끊는 건데.
듣는 사람 답답하게.
“가장 좋아하는 영웅이 누구야?”
“라이나 릴케요.”
“졸업하면 하고 싶은 건?”
“글쎄요. 아직 생각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어요.”
“그럼…”
“이제 됐다. 자리에 가서 앉아라.”
프리실라는 잘 부탁한다는 인사와 함께, 고개를 꾸벅 숙이곤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화이트레이디라는 이명답게, 모든 게 하얀색인 그녀의 외모가 눈에 들어온다.
플래티넘 블론드, 하얀색에 가까울 정도로 옅은 회색의 눈동자, 창백한 피부까지.
“하실 말씀이라도?”
“아냐. 아무것도.”
즉각적인 그녀의 반응에 나는 반사적으로 손사래를 쳤다.
할 말은 무슨.
“집중해라. 시험 끝났다고 강의도 끝난 건 아니다.”
“네.”
빈센트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그래도 시험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후의 강의라 그런가, 내용은 별 거 없었다.
이번 시험에 대한 복기가 대부분이었다.
“왜 박성진과의 경기는 복기 안 하세요?”
“맞아요. 1위여도 복기는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인정하는 부분.”
“1위라고 편애하시네.”
꼬우면 니들도 1위 하던가.
난 전혀 불만 없는데.
“너희들은 정말 쟤랑 한 경기의 복기가 의미 있을 거 같니? 내가 하는 복기는 보편적으로 어떠한 방법의 대처가 유의미한지에 대해서 논하는 거야. 박성진의 전략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해?”
“아뇨….”
“미친놈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하지 마. 그리고 박성진은 너희의 사상력에 맞춰가는 맞춤형 전략을 짜왔어. 맞춤형 전략을 카운터치고 싶었으면 처음부터 너희가 한 바퀴 꼬아서 맞춤형 전략을 의미 없게 만들었어야지. 그대로 다 당해줬는데, 무슨 복기할 게 있겠어.”
“그래도 지적할 게 아예 없었던 건 아니잖아요.”
“흠,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
아니, 내 완벽한 전술에 결점이 있었다고?
그럴 리가.
“일단 박성진, 너는 기본기를 많이 길러야 돼. 애들이야 아직 실전 경험이 부족하니까 네 전략에 쉽게 당해줬겠지만, 현실에는 영악한 빌런들이 차고 넘쳐. 네가 짜온 전략이 안 먹힐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렇겠죠.”
“이번 중간고사는 모두 정석적인 전투로 진행되었다면 넌 단 한 경기도 잡아내지 못했을 거다. 물론 네가 그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좋은 전략을 준비해온 거겠지. 하지만 그 전략이 통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 기본기를 길러 둬라. 알겠나?”
“네.”
음, 이건 분명히 맞는 말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잔머리를 굴려 이긴 것이지.
제대로 된 각성자의 싸움에서 이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각성자 대 각성자를 싸움을 하기엔, 아직 내 수준이 지나치게 떨어지니, 어쩔 수 없잖아?
이겼으면 된 거지.
그래도 기본기를 키워야 한다는 말에는 적극적으로동의하지만.
“그리고, 너는 사람들의 안전을 너무 신경 쓰지 않아. 몇몇 영웅들이 빌런을 잡기 위해 시민들의 희생은 필수불가결적이라는 말을 하기는 한다만, 그런 영웅들은 어디까지나 소수에 불과하고, 그 말을 내뱉은 뒤로 만인에게 지탄받았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영웅이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은 사람들의 안전이다. 승리가 아니라.”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네가 알고 있는 것을 과신하지 마라. 맞춤형 전략이라는 건 상대방을 확실하게 알고 있을 때만 짜는 거다. 빌런 중에선 알려진 사상력과 다른 사상력을 가진 빌런이 많다. 게다가, 사상력은 성장하면서 어떠한 방법으로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더더욱 과신해선 안 된다. 이번 중간고사에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네.”
영웅 짬밥을 오래 먹은 빈센트답네.
하나도 빠짐없이 맞는 말이다.
이번 중간고사야 S클래스 생도들의 사상력과 성장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니, 맞춤형 전략을 짜올 수 있었지만, 빌런들이 넘치는 현장에선 맞춤형 전략을 짠다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하자. 가도 된다.”
“수고하셨습니다. 교수님.”
“오냐, 너희들도 수고 많았다.”
빈센트가 강의실을 나가자,다른 생도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전학생인 프리실라에게로 향했다.
“오셀롯 아카데미는 어때?”
“그냥, 평범해. 다른 점을 꼽자면, 그래도 내륙이라 외출하기 편하다는 점?”
“아, 좋겠다.”
저 점은 진짜 좋네.
트리니티 아카데미가 자유롭다고 하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방침과 분위기가 그렇다는 것뿐.
남태평양 한가운데 고립된 섬에서 자유롭다 해봐야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안 그래도 사회와 격리된 장손데, 분위기마저 폐쇄적이면 그건 감옥이지.
“그러고 보니, 제이드도 영국인 아냐? 프리실라랑 이야기가 잘 통하겠네?”
“난 스코틀랜드인이야.”
으, 여기도 영국의 상태는 똑같구나.
스코틀랜드인이라고 딱 구분짓는 거봐.
“그래? 미안. 난 잘 몰라서.”
“아냐, 그럴 수도 있지.”
“근데, 프리실라는 중간고사 잘 봤어?”
“나? 잘 본 편이라고 해야되나? 3등이니까, 잘 봤다고 하는 게 맞겠지?”
벌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네.
내년이면 U클래스에 들어가겠어.
“묻고 싶은 게 있다. 프리실라.”
“카타리나라고 했지? 궁금한 게 뭔데?”
“아까 말하다 끊은 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거지?”
“아… 그거? 그냥, 트리니티 아카데미에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어서 전학 온 거라고 말하려 했어.”
프리실라에게 신경 쓰일 정도의 인물이 트리니티 아카데미에 있던가?
잘 모르겠다.
애초에 프리실라는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생도가 아니라, 영웅이 된 뒤의 이야기만 나와서.
“실례가 안된다면, 그게 누군지 물어봐도 되나?”
“박성진인데?”
나?
나 때문이라고?
내가 그렇게 유명했나?
뭐, 이번 중간고사에서 임팩트가 크긴 했지만, 나 때문에 전학을 올 정도라는 건 뭔가 이상한데.
다른 녀석들도 커다래진 눈으로 날 쳐다본다.
난 모르는 일인데.
“박성진과 친분이 있는 사이였나? 몰랐다.”
“맞아, 아는 사이야.”
이때, 아이나의 눈이 가늘게 변하는 것을,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럴 겨를도 없었다.
나도 무척이나 당황했으니까.
프리실라와 내가 아는 사이라니.
“헌데, 너는 스코틀랜드인이고, 박성진은 한국인 아닌가? 어떤 사이로 알게 된 거지?”
“난 사실 오셀롯 아카데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어. 그래서 고등부는 트리니티 아카데미에서 다니려고 했거든? 그래서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을 봤지.근데, 그날 내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 성적을 완전히 망쳐버리고 말았지.”
“그렇다면, B에서 A클래스 정도로 배정을 받았나 보군.”
“맞아. B클래스를 배정받았지. 근데 B클래스에서 시작할 거면, 트리니티 아카데미를 다닐 이유가 없잖아? 오셀롯 아카데미를 계속 다닌다면, S클래스와 동등한 수준인 파르두스 클래스에서 머물 수 있는데 말이야.”
오셀롯 아카데미가 어지간히도 싫었던 모양이다.
스코틀랜드에서 한참 떨어진 이 트리니티 아카데미까지 오려고 하다니.
“그게 박성진이랑 무슨 상관이 있나?”
“그때 시험장에 박성진도 같이 있었거든. 나한테 너무 낙담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커피 한 잔을 사주더라? 그때는 그냥 이상한 애라고 생각하고 넘겼지. 근데, 그때 그 이상한 애가 트리니티 아카데미 S클래스의 1위더라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
당연하지만 난 전혀 모르는 이야기다.
지금의 박성진이 아닌, 과거의 박성진이 저지른 일이니까.
“그래서, 그 일을 계기로 다시 만나 보고 싶었다?”
“맞아. 사실, 그때는 별생각 없었어. 오셀롯 아카데미에 있는 다른 애들이랑 똑같은, 고리타분한 애인 줄만 알았거든. 근데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중간고사 공개 토너먼트를 보니까, 흥미가 가더라.”
“그래서, 다시 만나보니 어떤 거 같은데?”
대화에 갑자기 끼어든 것은, 아이나였다.
“그때랑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그때는 엄청 우울해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별로 안 그렇네.”
“…우울한 얼굴이었다고?”
“응, 시험망친 나 보다도 훨씬 안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좀 어이없기도 했지. 누가 봐도 자기 상태가 훨씬 안 좋은데, 팔자 좋게 내 걱정이나 해주길레. 아무튼, 그런 건 됐고, 박성진. 나랑 한 판 붙자, 응? 나, 이래 봬도 꽤 강해.”
시험은 끝났어도, 내 팔자는 쉽게 펴지 않으려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