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제비꽃.
현재 이곳은 트리니티 아카데미.
꼭두새벽에 잠에서 깨버린 김에, 아침 비행기를 타고 일찍 트리니티 아카데미로 돌아왔다.
중간고사가 끝나서 그런지, 사람은 그다지 많이 보이지 않는다.
다들 노느라 바쁘겠지.
나도 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냥… 같이 놀 사람이 없는 것뿐.
아싸의 삶은 원래 그런 것이다.
딱히 갈 곳도 없던 나는 북문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딜가도 미래적인 분위기만 잔뜩 느껴지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내가 살던 곳의 향취가 느껴져,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 바로 북문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생도와 교수들은 이 넓은 북문 공간을 조금이라도 다르게 활용하자고 주장하지만, 그렇게 되면 난 조금 마음이 아플 것 같다.
유일하게 정감이 가는 장소라.
나는어제 산 기계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북문의 산책로를 활보했다.
북문의 산책로를 따라 걸으니, 곳곳에 청서들이 먹다 남긴 개암나무의 개암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이런 분위기가 나는 공간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을 텐데, 왜 이 세계의 사람들은 북문의 공원을 싫어하는 걸까.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박성진?”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아이나가 서 있었다.
“아이나?”
이런 곳에서 아이나를 마주치게 될 줄이야.
조금 의외다.
“여긴 무슨 일이야.”
“그냥, 산책도 할 겸.”
“부모님은 잘 뵙고 왔어?”
“응, 그랬지.”
대화는짧게 끝났다.
아이나와 나 사이에 그럴듯한 접점이 없었다는 것도 있었지만, 둘 다 사교성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점이 더 컸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 문제는 아닌 거 같다.
그런 것치고 사교성이 뛰어나지 않은 카타리나와는 제법 잘 이야기를 나눴으니.
왜 아이나만 보면 이런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걸까.
나는 이 어떻게든 이 어색함을 깨부수고자 입을 열었다.
“너는 어디 안 가?”
“갈 곳이 어딨어.”
“놀러 간다던가, 집에 돌아간다던가.”
“딱히.그러고 싶지 않네.”
양쪽 모두 정말 사교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대화다.
검술 지도를 해달라는 이야기라도 꺼낼까 했지만, 그정도로 아이나와 내 관계가 좋지 않았던 터라, 그냥 입을 다물기로 결심했다.
…침묵의 시간은 길었다.
서로 눈도 마주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시간이5분을 훌쩍 넘겼으니.
계속 가만히 있기도 뭣했던 터라, 나는 하던 산책이나 마저 하기로 했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아이나도 내 뒤를 쫓아왔다.
왜 따라오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담대함이 내겐 없었다.
사실, 담대함이 필요했다기보단, 그냥 쪽팔릴 거 같아서 묻지 않은 거지만.
누가 봐도 내 뒤를 졸졸 쫓아오는 행색으로 보이긴 하나, ‘나도 산책하는 중이다’라고 대답하면?
그것에 대한 마땅한 변론이 없지 않은가.
나를 쫓아온다는 물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묵묵히 걸었다.
말없이 걷기만 한 지 40분, 벌써산책로의 끝이 보인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확실히 이 몸이 좋긴 하네.
원래 이 정도 걸었으면 어딘가에 앉아서 쉬어야 할 텐데, 아무렇지도 않고 말이야.
그래도, 갈증을 느끼는 건 똑같네.
나는 산책로 끝에 놓인 자판기로 가, 파인애플맛 탄산음료 두 캔을 뽑았다.
아이나가 이걸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뭐 어때.
자기 돈도 아니고, 내가 사주는 건데.
불만 있으면 안 마시면 되는 거지.
나는 음료수 캔을 아이나에게 내밀었다.
“잘 마실게.”
다행히도 잘 마신다.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또 다시 어색한 침묵이 시작되려던 찰나, 이번에는 아이나가 먼저 말문을 텄다.
“1위, 축하해.”
“고맙다. 너도 수고 많았고.”
아이나가 먼저 이런 이야기를 꺼내다니.
고무적이네.
“그리고, 미안해.”
“뭐가?”
“지금까지 널 무시했던 거.”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던가?
아니었던 거 같은데.
“네가 얼마나 노력해왔는지, 이번 중간고사에서 알 수 있었어. 덕분에 나의 부족함도 깨달을 수 있었고. 그런 네가 볼 때는, 내가 부족해보일 수도 있었겠지. 이젠 네가 한 말. 이해할 수 있어.”
“그 정도까진 아닌데….”
“갑자기 이런 말을 해도 너는 이해하지 못하겠지. 괜찮아. 내가 널 이해하니까.”
당황스럽다.
그랜드 파이널에서 나한테 지고 맛이라도 가버린 건가?
“응, 그래. 이해해줘서 고맙다.”
얼떨떨해하는 나의 반응에, 그녀가 피식 웃었다.
“이럴 때는 빈말로라도 나도 널 이해하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가?
역시 잘 모르겠다.
이성과의 대화는 내겐 너무 어려운 과제다.
아니, 이성 이전에, 아이나라는 인간 자체가 내겐 어렵다.
차라리 기말고사에서 다시 1위를 하는 게 더 쉬울지도.
“널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서.”
“그냥 해본 말이야. 나도 네가 날 이해할 거라곤 생각 안 해. 그냥… 그래 주길 바랐어.”
“왜?”
“노력하는 사람의 인정을 받는다는 건, 나도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니까. 사람들은 내 노력을 인정해주지 않아. 그냥 좋은 집안, 좋은 사상력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이 자리에 섰다고 생각하지. 난 그게 싫었어. 내가 지금까지 보내온시간들이 무의미해지는 것 같아서.”
그건 아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S클래스에서 노력을 하지 않는건, 올리비아뿐이다.
“넌 충분히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고. 그리고 널 만나고 나서, 내 생각이 바뀌었어. 지금까지 한 내 노력은, 사실 부족한 것일 수도 있겠다고 말이야.”
“아냐, 넌 잘하고 있어.”
“정말 그런 거라면 좋겠네.”
아이나가 먼 산을 바라본다.
그녀가 자주 하던 행동이다.
다만, 오늘의 아이나는 조금 달랐다.
평소처럼 빈 곳만을 바라보는 허무한 눈이 아닌, 소중히 여기던 것을 되찾은듯한 눈.
내 대답에 만족한 것일까?
그랬으면 좋겠다.
“나도 모르게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해버렸네. 아무튼, 1위 진심으로 축하해.”
“누구나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을 때가 있지. 가끔은 말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약점을 노출시키는 건 그다지 좋은 행동이 아니야.”
이 세계에도 스폰지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 대사는 뚱이가 한 대사 중에서도 꽤 멋진 대사니까, 나도 따라 써먹어야지.
“누군가가 그랬어. 기분이 나아지고 싶으면, 마음속에 있는 걸 털어놔야 한다고.”
“부정하고 싶지만, 오늘은 그 말이 맞는 거 같네.”
잘 먹히네.
역시 스폰지밥은 어느 세계에서나 통한다니까.
“그래, 다음에도 기분이 안 좋으면, 누군가에게 마음속에 있는 걸 털어놓으라고.”
“내겐 그럴만한 사람이 없는걸.”
“왜 없어? S클래스에 있는 친구들도 있고, 빈센트 교수님도 있잖아?”
“…친구? 걔들은 내 친구가 아니야. 그냥 같은 클래스의 애들이지.”
그녀는 미묘하게 표정을 찡그렸다.
아니, 저 말이 진심이라고?
뭐, 그래. 같은 반 친구들과 사이가 안 좋은 경우도 많으니, 같은 반이라고 친구라는 건 내 선입견에 불과하다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른 클래스 녀석 중에 아이나와 사이가 안 좋다고할 사람은 거의 없다.
기껏해야 성격이 상극인 올리비아 정도?
그들이 아이나와 친구가 아닌 게 아니다.
아이나가 친구가 되려는 애들을 밀어내고 있을 뿐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이나에게 그들을 친구라고 생각하라 강요할 수도 없다.
자신이 그럴 생각이 없다는 데, 내가 무슨 수로 그 생각을 바꾸겠는가.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면, 다른 애들한테 말해보던지.”
“너라면 괜찮을지도 몰라.”
바람이 분다.
달달하고 부드러운 제비꽃 향기가 코끝을 지나갔다.
그 보라색 꽃의 향기는, 아이나의 연보랏빛 눈동자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바람이 그친다.
꽃의 향기를 전해다 줄 기류가 없었음에도, 그 잔향은 여전히 이곳을 맴돌고 있다.
제비꽃 향기는 그렇게 강렬하지 않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나 알싸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럼, 나한테라도 털어놓던지.”
“그럴 일이 생기면, 그럴게.”
그녀는 단숨에 음료수 캔을 비워 버리고, 고개를 돌려 트리니티 아카데미로 향한다.
무언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만을 멍하니 바라볼 뿐.
그제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알싸함은, 향기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