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중간고사 공개 토너먼트.(7)
슬슬 나갈 채비를 해야겠군.
나는 생도복으로 복장을 환복했다.
솔직히, 아직도 이놈의 넥타이는 매는 게 익숙지 않다.
다들 어떻게 그렇게 빨리 매는 거람.
…고작 넥타이를 매는 데 장장 10분이라는 시간이 소요될 줄이야.
그래도, 10분이란 시간 동안 헛물만 켠 것은 아니라 다행이군.
이 정도면 꽤 옷 맵시가 살아있다고 할 수 있었다.
아닌가?
그냥내 착각일지도.
그나저나 승자조 결승이라.
나한테는 참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비록 그랜드 파이널 진출은 아니지만, 승자조 결승 진출도 충분히 엄청난 영광이지.
그것도 내겐 엄청 과분한.
기왕이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면 좋겠지만, 남은 놈들은 죄다 여간내기가 아니라, 여기가 내 한계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기권을 한다거나, 일부러 패배한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의욕 문제에 가까웠다.
현재 패자조를 포함해 남은 사람은 알프레드, 아이나, 천현우, 올리비아, 베아트릭스.
베아트릭스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엄청난 강자로 평가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놈들 뿐이니, 의욕이 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지금까지야 요행으로 어떻게든 잘 버텨왔다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에휴, 모르겠다.
이젠 생각하는 것도 귀찮아졌다.
자세한 건 트리니티 스타디움에 가서 생각해보자고.
* * *
와, 어제보다 어째 사람이 더 많은 거 같냐.
결승전에는 이 트리니티 스타디움이 꽉 차는 게 아닌가 몰라.
어, 저기 천현우다.
“패자조 경기는 이겼냐?”
“후, 아니.”
“네 상대가 누구였지?”
“알프레드.”
얘도 참 운이 지지리도 없는 놈이다.
패자조에서 또 알프레드를 만나다니.
멘탈이 엄청 깨졌겠는데.
승자조에서 한 번 자기를 탈락시켰던 사람이 패자조로 와서 자신을 또 탈락시켰으니, 멘탈이멀쩡하면 그게 보살이지.
“힘내라. 대진운이 안 좋았던 걸 어쩌겠냐.”
“아니, 그냥 내가 부족했던 거지. 우리 클래스에서 최약체 취급받던네가 카타리나랑 알프레드를 이겼는데.”
“그건 그냥….”
“운으로 이겼다는 소리는 하지 마라. 다른 사람들은 이번 시험 잘 보려고 얼마나 연습했는데. 그 말은 혼자 생각해.”
“그러네, 내 생각이 짧았어.”
분위기는 순식간에 서먹해졌다.
그렇게 된 데엔 나의 지분도 없다 말할 수는 없으니, 먼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난감했다.
“여기 있었나. 천현우. 박성진과 함께 있었군.”
“안녕, 카타리나.”
“그냥 길 가다 만났어.”
역시 멘탈갑 카타리나인가.
광탈했다고 주눅 든 기색이 전혀 없네.
“넌 어쩐 일로 여기 있어?”
“천현우를 응원하고 있었다.”
“아, 둘은 친한 사이였지. 아쉬웠겠네.”
“조금은 아쉬웠지. 하지만 승부의 세계는 원래 그런것 아닌가. 이길 때가 있다면, 질 때도있는 거지. 다음에 잘하면 된다. 나도, 천현우도.”
담담하네.
지극히 카타리나다운 반응이었다.
“그럼, 이제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아니, 널 응원할 생각이다.”
“나를? 왜?”
“네 경기는 보는 맛이 있어서 재밌다.”
감개무량하네.
카타리나에게 인정도 받고.
이런 미인에게 응원을 받는다니, 갑자기 의욕이 솟는걸.
“고마워.”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면, 우승해서 돌아와라.”
“너무 무리한 걸 요구하는데.”
“알프레드를 이겼으면, 나머지도 이길 수 있다.”
“그랬으면 좋겠네.”
[세 번째시험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생도 여러분은 모두 새로 배정된 훈련실로 입장해 주십시오.]
“분발하도록. 객석에서 응원하지.”
“그럼 나도 간다. 열심히 해라. 박성진.”
“그래, 고마워.”
이번에 배정된 훈련실은 어딘지 볼까.
777번 훈련실.
슬롯머신이냐.
부디 훈련실 번호처럼, 내게 행운이 따라준다면 좋겠네.
* * *
훈련실에 먼저 도착한 것은 나였다.
모범생답게 먼저 기다리고 있던 알프레드와 달리, 껌 좀 씹어봤을 것 같은 누나의 이미지의 올리비아는 경기 시간이 거의 다되감에도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차라리 안 왔으면 좋겠다.
꽁승 날먹하게.
그리고, 올리비아가 훈련실에 나타났다.
“안녕?”
“어… 안녕.”
“우리 처음 붙어보는 거 같은데, 맞지?”
“그럴걸?”
“음, 네 경기들은 잘 봤어. 특이하던데? 잘 해보자. 이번 경기, 기대하고 있으니까.”
무섭다.
마이페이스 기질이 강한 올리비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처럼 읽기 어렵다.
아이나는 성격이 까칠하다곤 해도 기본적인 심성 자체가 비틀려있다거나, 꼬인 건 아니다.
하지만, 이따금 올리비아는 그런 면이 드러났기 때문에,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퇴폐미가 느껴진다며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천성이 아싸인 내게 퇴폐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는 사람은 아무래도 부담스럽기 마련이었다.
[사용자가 인식되었습니다. 사상력을 동기화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사용자, 올리비아 테이셰이라, 박성진의 사상력의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시험의 설정이 완료되었습니다.]
“드디어 네 번째 경기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여러분. 최대한 많은 경기를 여러분께 중계해드리고싶습니다만, 방송에 나가는 경기는 한정되어있죠. 경기의 시작에 앞서, 한 가지 양해의 말씀을 구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패자조 경기와 승자조 결승이 동시에치러지기 때문에, 방송 경기는 승자조 결승에서만 추첨이 이뤄질 예정입니다. 많은 양해 바랍니다.”
으, 이번엔 내 경기가 아니겠지.
“그럼, 오늘의 방송 경기를 추첨하겠습니다. 오늘 경기를 추첨해주실 분은 여러분도 아마 깜짝 놀라실 겁니다. 히어로 팀, 클레어 드 시엘의 멤버, 에스메랄다 롤랑입니다!”
박수 소리가 트리니티 스타디움 전체에서 들려온다.
에스메랄다 롤랑이면 그럴 만하지.
그녀가 속해있는 히어로 팀, 클레어 드 시엘은 5인의 소수 정예 팀인데도 세계영웅연맹의 히어로 팀 순위 탑 10 안에 드는, 엄청난 강팀이니까.
후, 에스메랄다가 시험 첫날 왔어야 하는데.
에스메랄다 정도면 연락처를 교환할만하니 말이다.
박수 소리가 멎어들자, 에스메랄다가 대형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냈다.
음, 불합격.
외모는 대단하지만… 키가 너무 작다.
난 페도가 아니라고.
에스메랄다는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추첨 기기의 버튼을 살며시 눌렀다.
수십 개였던 공의 개수는 이제 확연히 줄어, 눈으로 보고 샐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탈락자들이 늘어, 경기의 수가 줄었기 때문이다.
“이번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주인공들이 있는 곳은! 921번 훈련실입니다! 도미닉 메이어 생도와, 라일라 디아브 생도가 있는 곳이군요!”
휴, 이번엔 내가 아니군.
다행이다.
“도미닉 메이어 생도,순위권에는 자주 드는데, 1등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는 비운의 생도죠.”
“맞습니다. U클래스의 탑 3를 꼽으라면 항상 들지만, 이상하게도 1등은 하지 못하네요. 큰 무대에 약한 체질일까요?”
“그에 반해 라일라 디아브는 이번 중간고사가 첫 순위권입니다.”
“라일라 디아브 생도, 전보다 많이 성장했다는 말이 많습니다. 기대되는 유망주인 제롬 르클레어 생도를 꺾고 이 자리까지 왔어요! 과연 그랜드 파이널까지 진출할 수 있을지!”
저 경기는 라일라가이겼던 걸로 기억하는데.
도미닉도 참 불쌍한 친구다.
항상 순위권에 듦에도 결국은 1등을 못 하니….
뭐, 그래도 U클래스 상위권이라는 이름이 어디 가지는 않으니, 꽤 괜찮은 히어로 팀에 들어가지만.
“도미닉 메이어 생도와 라일라 디아브의 승자조 결승전! 만나보시죠!”
이제, 나도 시작인가.
[카운트 다운, 5, 4, 3, 2, 1,0,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 * *
“오랜만에 보네. 에스메랄다.”
“그러게요. 클로에님.”
“일선에서 물러나니 어때?”
“편하고 좋네요. 진작에 이럴 걸 그랬어요.”
“저도 은퇴한 지 얼마 안 됐을 땐 그랬었는데 말이야. 요즘에는 현장이 가끔 그리워지더라고.”
“에이, 설마요.”
에스메랄다는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그녀는 지금이 무척이나 편했다.
사실, 다른 각성자들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다는 게 즐거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클로에는 다르다.
그녀는 한창 현역으로 활동하던 시절에도, 그것을 숭고한 의무라고 받아들이기보단, 즐거운 놀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었으니.
“우리 생도들은 어때?”
“나쁘지 않았어요.”
“고작 그 정도 반응이야? 실망인데.”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생도들이 다 일찍 탈락해버렸거든요.”
그 말에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망주라며 외부의 기대를 한 번에 모았던 생도들이 대거 탈락하거나, 패자조로 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근데, 소식은 들었어?”
“무슨 소식이요?”
“클레어 드 시엘 팀이 예전에 생포했던 그 빌런의 이름이 뭐였지?”
“저희가 잡았던 빌런이 한 둘이 아닌데, 그걸 다 기억하고 있을 리는 없잖아요.”
에스메랄다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얼굴도 제대로 못 마주칠 클로에에게, 이런 반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이렇게 대답할 수 있는 것도, 에스메랄다와 클로에의 친분이 상당히 두터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왜있잖아. 그리폰 교도소에 단신으로 습격했던 미친년. 자기 친구는 무죄라면서,석방해야 한다고 떠들고, 머리에 뿔 두 개 난…”
“아! 기억나네요. 세레나 스튜어트?”
“맞아요!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걔가 왜요?”
“얼마 전에 석방됐대.”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잡아들인 빌런에게 크게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대부분은 사살했고, 생포한 순간부터는 자신의 소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음, 하긴, 죄질이 무겁다곤 해도, 그 주장이 사실인 걸로 밝혀졌고, 시간도 꽤 지나긴 했으니 형기가 만료될 만도 하네요. 그 빌런의 사상력은 많이 위협적이긴했지만, 사람을 해친 건 아니니까. 뭐….”
“근데 있잖아. 그 빌런이 우리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고 싶다고 인터뷰를 했거든?”
“네?”
에스메랄다는 새된 목소리를 냈다.
그만큼 황당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모르겠어. 나도. 왜 그런 이상한 소리를 했는 지는.”
“아무리 그래도, 빌런이었던 사람을 교수로 받아주는 건… 조금 그렇지 않나요?”
“뭐 어때? S클래스 교수직을 맡고 있는 빈센트도 전과 있어. 이건 비밀인데, 오스카도 음주 운전 전과 있다?”
“하아… 그렇게 말하시면 할 말은 없지만요. 그래도 저라면 안받을 것 같아요. 죄질의 결이 다르잖아요.”
클로에는 이미 마음을 굳힌 것으로 보였다.
이렇게 된 클로에의 생각을 뒤바꿀 수 없다는 것쯤은, 에스메랄다도 알고 있었다.
근데 왜 굳이 그 확인 사살 작업을 자신에게 하는 것일까.
에스메랄다는 클로에를 만나기로 한 것을 조금 후회했다.
“그래서, 교수로 고용하기엔 영 별로야? 네가 생포하는 공이 가장 컸다며, 그럼 네가 그 사람에 대해 제일 잘 알 거 아냐. 위험한 거 같아?”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답은 정해놓고 물어보시는 거 아니에요?”
“에이, 그래도 네 의견도 중요하지.”
“뭐,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요.”
클로에는 조금 고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알고 있었다.
그 고민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그럼, 영입 결정!”
“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
“관리하기 어려울 거에요. 성질머리가 좀 있는 사람이라.”
“젊었을 때 빈센트만 하겠어.”
그렇게 말하곤, 클로에는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그 모습을 본 에스메랄다는, 자신도모르게 덩달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사실, 에스메랄다는 아까부터 목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괴짜스러운 성격을 가진 클로에의 장단에 맞춰주는 건 친분이 있는 에스메랄다에게도 상당한 신경을 요하는 일이었기에,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때문에, 에스메랄다가 클로에를 따라 차를 마신 건, 그 차가 맛있어 보여서라기보단, 갈증에 의한 반사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이 차, 엄청 좋은데요?”
“이거? 동양에서 마시는 동백꽃 차래. 괜찮지?”
“그러게요. 다음에 몇 번 사 마셔봐야겠어요.”
그 뒤론,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가 오갔다.
아까와 같은 이야기가 오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에스메랄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