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화 〉오해. (18/173)



〈 18화 〉오해.

동아리실은, 난잡함 그 자체였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영화잡지와 포스터, 그리고 수북하게 쌓인 에너지 드링크 캔까지.

영화감상 동아리라기보단, 모솔아다히키찐따 모임에 가까워 보인다.

…나한테 아주 잘 맞겠는데?

“야, 서찬욱, 신입부원 왔다. 지원서 처리해줘.”
“신입부원이 왔다고?”

뭐야,  사람이 여기서 왜 나오지.

서찬욱, 제롬이 속해있는 U클래스의 생도다.

몇몇 전투에서 막타만 치고 가는 것 이외에는 큰 비중이 없는 캐릭터였지만, 그래도 U클래스라는 것은 적어도 트리니티 아카데미에선 상위 0.01퍼센트 내에 드는 강자라는 소리다.

“자, 여기 동아리 지원서야. 꼼꼼하게 적을 필요는 없고, 대충 적어서 줘.”
“알겠습니다.”

동아리 지원서에 특이 사항은 없었다.

생년월일, 현재 소속된 클래스, 지원동기만 적어내면 됐다.

“흠, 2005년생에, 생일은 3월 5일, 오? S클래스네? 지원동기는… 진짜 대충 적었네. ‘그냥 영화가 좋아서’라고?”
“네.”
“그래? 그럼 가장 재밌게  영화가 뭐야?”
“저는 귀환자요.”

가장 재밌게  영화가 귀환자라는 말에 서찬욱의 얼굴이 밝아진다.

반대로 부단장으로 보이는 옆의 남성은 그다지 성에 차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이런 부원이 와야지. 너는 영잘알이구나. 진짜 영화를 좋아하는  맞네.”
“아오, 또 자기랑 비슷한 힙스터 왔다고 좋아하는 거 봐.”
“닥쳐라, B딱이.”
“U클래스라고 유세는 더럽게 떨어요. 하여튼.”

역시 사람은 잘나고 봐야한다.

그래도 U클래스 정도면 잘났다고 유세 떨 수준은 맞았지만.

“그래서, 성진이 너는 귀환자의 어떤점이 마음에 들었지?”
“단순명료하고 목적에서 탈선하지 않는 직선적인 스토리, 처절함을 잘 녹여낸 주인공의 연기, 인공조명을 사용하지 않아 자연광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녹여낸 촬영 기법, 멋들어진 연출, 대사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리함을 이겨내고 잔잔하고 절제된 배경 음악과 분위기만으로 주인공의 심상을 표현한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크으, 역시 뭘 아는 친구야. 보라고, 너 같은 팝콘무비충과 다르게 진짜 영화가 뭔지 알고 있잖아.”
“거 틀니 딱딱거리는 소리  그만 내쇼.”

아무래도 부단장과 단장의 영화 취향은 완전히 상극인 거 같다.

나라고 팝콘 무비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세계의 팝콘무비는 아무래도 식상했다.

그도 당연한 것이, 주변에 실제로 초인들이 널려있는데 뭣하러 초인이 나오는 영화를 본단 말인가.

이들에겐 히어로물이 판타지가 아닌, 다큐멘터리나 액션물 정도의 감상이리라.

당연하게도 내가 살던 세계의 블록버스터급 히어로 영화에 비해 매출도 적게 나오는 편이었다.

“저희 담당 지도 교수님은 누구인가요?”
“앨리스 교수님이셔. 알아?”

모른다.

다카포 드림에서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인물이다.

앨리스가 누구야.

“아뇨. 몰라요.”
“그렇구나, 모를 수도 있지. 앨리스 교수님은 무척이나 친절한 분이셔. 지금 동아리실 꼬라지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어가시거든.”

…그건 친절이 아니고 방종이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렴 어때.

어차피 나는 딱히 동아리 경진 대회 같은 것에 참여하고자 이 동아리를 선택한 것도 아니다.

그냥 귀찮은 일을 하는 게 싫을 뿐이라 영화감상 동아리를 선택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하던 터치하지 않는 교수라면, 오히려 좋았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감상은 제대로 해야 해. ‘재밌었다’, ‘좋았다’, ‘또 보고 싶다’ 등의 아무렇게나 갈겨 쓴 감상평은 절대 용납 안 해주셔.”
“그 정도면 괜찮아요.”
“그럼 됐어. 우린 그거 말곤 하는  없거든. 우리 동아리의 단원이 된  환영한다.”
“그래, 환영한다.  이름은 제이콥이다. 제이콥 카메론.”

내가 살던 세계의 어떤 영화 감독님이랑 이름이 아주 비슷하네.

그분은 영화를 아주 기가 막히게  찍으셨는데.

“그럼 주된 동아리 활동은 그냥 영화를 보고 감상평을 적는 건가요?”
“엉, 그리고 그걸 레포트로제출하기만 하면 돼.”

아주 좋아.

가끔 영화가 보고 싶을 때 와서 영화나 보고 가면 되겠다.

이제 훈련이나 하러 가야…

“어디 가는 거야. 영화는 보고 가야지.”
“훈련하러 가는데요?”
“뭔 훈련 같은 소리야? 동아리에 왔으면 신입부원 환영회을 하는 게 국룰이잖아? 이거 얼마 전에 새로 개봉한 영화니까 같이 보면서 치킨이나 뜯자고.”

그래, 가끔은 휴식을 취하며 영화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절대 금닭한지 두 달이 넘어가서 그런 것은 아니다.

믿어줘.

…그리고 그들이 내게 보여준 영화는 끔찍했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회사의 B급 영화였는데, 촬영부터 시작해서 배우의 연기까지 모두 엉망이었다.

그 영화가 얼마나 별로였는지에 대해선 더 이상 말하지 않도록 하겠다.

정 그것이 궁금하다면 내 옆의 서찬욱과 제이콥의 표정이 평가를 대변해주고 있었으니, 그걸 보시라.

그래도 치킨은 잘 먹었습니다.

“저는 이제 가보겠습니다.”
“어, 그래. 종종 찾아와라. 다음에 보자.”

이제 뭘 할까.

훈련을 하긴 늦었고, 기숙사로 돌아가자니 이른 시간이다.

간단하게 야식이나 좀 먹고 들어갈까.

* *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서문은 흔히 생각하는 번화가의 모습으로, 음식점과 오락거리가 가득하다.

물론 이 ‘흔히 생각하는’이란 문구를 단순히 지구 감성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데, 지금 내가 서 있는 서문의 거리는 지구의 흔한 번화가라기보단, 사이버펑크 풍 게임에 등장하는 중심가에 가까운 느낌이다.

사방에 가득한 네온 사인, 그와 대비되는 모노크롬톤의 메탈릭한 건물들.

갑작스럽게 서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내가 야식을 먹기 위해 선택한 장소가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서문이라서다.

물론 음식점이 서문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서문 이외의 장소에 위치한 음식점은 대체로 분위기 있는 고급 레스토랑이 대부분이다.

야식으로 스테이크를 썰지는 않잖아?

물론편의점에서 단출하게 때워도 그것을 야식이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는않았다.

서문의 거리,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많이 띄는 것들은 펍이다.

미성년자만 입학할 수 있는 곳에 무슨 술집이냐고 묻겠지만, 이 세계의 인간은 보통 세계의 인간보다 훨씬 강하다고 말한 것을 잊지 마시라.

이것은 단순히 육체의 강건함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면역력이나 기타 체내 대사 또한 훨씬 뛰어나다.

당연히 알코올 분해 능력도 내가 살던 세계의 인간보다월등할 수밖에 없다.

이전의 세계에선 소주 두 병이면 술을  마시는 축에 속하지만, 이곳에선 주량이 소주 두 병이라 하면 술을 정말 못 마시는 편이었다.

굳이 지구 감성으로 비유하자면, 소주 한잔에 바로 취해서 쓰러지는 정도?

이런 세계다 보니, 맥주는그저 아이들도 마실 수 있는 음료 정도의 취급에 불과했다.

법적으로 주류가 아니라는데 어쩌겠는가.

그러니 사실 펍은 이 세계의 지구, 테라롬의 기준으론 술집이 아니다.

오직 지구 감성에 익숙한 나만이 펍을 술집이라 부를 뿐이다.

아, 술 땡기네.

딱히 우울하다거나, 잊고 싶은 일이 있어 알코올에 의존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잔이 부딪치며 나는 쨍-하는 소리, 즐거움이 만면한 얼굴로 가득한 이 광장에서 술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뭐, 그래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술을 마신다는 분위기를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말한대로 테라롬의 인간들은 맥주 따위로는 전혀 취하지 않으니.

나도 야식 먹으면서 맥주나 좀 마실까.

“어, 박성진.”

여기서 카타리나를 마주칠 줄이야.

오늘도 훈련에 매진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오늘은 훈련 안 해?”
“나도 가끔은 일탈을 즐기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누구나 그렇겠지.”
“보아하니 너도 맥주를 마시러  모양인데, 같이 마시지 않겠나?”
“그래.”

당연하죠.

여기서 거절할 수 있는 놈이 있다면 그 새끼는 100% 고자다.

그녀는 나를 이끌고 리피 에스투어리(Liffey Estuary)이라는 펍으로 들어간다.

“흠흠, 그냥 묻는 것이지만, 너는 에일과 라거중에서 어느 쪽을 선호하지?”

그녀는 주문을 마치자마자 뜬금없는 질문을 해왔다.

아, 이거, 단순한 질문이 아닌가 보다.

테라롬에선 찍먹이냐, 부먹이냐만큼 중요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다만,  질문은 다소 결과가 노골적으로 보이는 질문이라는 것.

찍먹과 부먹은 엄대엄으로 갈리는 편이지만, 라거냐, 에일이냐는 대부분이 라거를 선택할 것이다.

뭐, 그것에 딱히 이의를 가지지는 않는다.

맥주는 청량감으로 마시는 게 대부분인데, 청량감에선 라거가 에일을 압도하니까.

그중에서도 한국인은 특히 라거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는 유감스럽게도 에일파다.

청량감은 모자라도 상관없다.

풍부한 바디감과 홉의 풍미를 더 느낄  있다면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나는 에일파지.”
“역시 박성진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맥주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을 이제야 만나다니. 기쁘군. 미국인인 제임스는 그렇다 쳐도, 영국인인 제이드녀석마저 라거를 선택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휴, 다행히잘 선택한 것 같다.

“여기 주문하신 맥주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린다.

나는 그 동작의 의미를 받아들이곤 가볍게 잔을 맞부딪힌다.

“건배.”
“건배.”

차가운 에일이 위장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게 인생이지.

“박성진.”
“왜?”
“너는 좋아하는 여자 없나?”

푸흡.

마시고 있던맥주를 뿜어버리고 말았다.

 들어오네.

“그건 갑자기 왜?”
“그야 다른 S클래스의 생도들은 전부 좋아하는 여자가 있지 않나.”
“뭐?”

얘네가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어?

내가 아는 캐릭터 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아는 것은 제이드뿐이다.

제이드는 현재 시점으로 B클래스의 나탈리아라는 여자와 교제 중이고, 아카데미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한다.

“몰랐나?”
“누, 누가 누굴 좋아하는데?”
“아, 너는 고등부 입학이니 모를 만도 하겠군. 알프레드는 나를 좋아한다.”

알프레드가 카타리나를좋아했었다는 설정은 본 적 있다.

근데 그것이 아직도 지속되는 것인지는몰랐다.

“그럼 제이드를 제외한 나머지는?”
“천현우는 백성연과 사이가 좋지 않나. 둘은 아주 부부가 따로 없더군.”

그 둘은 그냥 친구라고 생각됩니다만.

“걔네는 그냥 친구로서 사이가 좋은 거뿐이잖아.”
“남녀 사이에는 우정이 성립할 수 없다. 분명히 서로 호감이 있으니 그러는 거다.”
“그건 그냥 친구 사이라니까 그러네.”
“아니다. 나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카타리나가 딱딱한 성격인 것은 누차 말했지만, 이 정도로 외골수인지는 나도 몰랐다.

“뭘 근거로 말하는데?”
“그냥 여자의 감이다. 둘은 사귄다고 공언하지만 않았을 뿐, 아마 잠자리에도 같이 들었을 거다.”

이 여자가 드디어 정신이 나갔나 봐.

못하는 말이 없네.

“하아… 그래. 그럼 제임스는?”
“제임스는 아카데미 밖에 여자친구가 있다.”

아, 하긴, 제임스는 트리니티 아카데미에 입학하기전부터 기타 신동으로 유명했다는 설정이었지.

그는 아카데미의 방학 기간엔 직접 밴드 활동도 하는 프로 기타리스트다.

비록 밴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건 보컬이라지만, 기타리스트도 보컬에 준하는 수준으로 인기 있다.

게다가 S클래스면 세간의 주목도굉장히 많이 받았을 테니, 누구나 그의 여자가 되고 싶어 할 것이다.

“자, 이제  차례다. 나머지를 다 알려주지 않았나. 너만 말하면 된다.”
“대체 그게 왜 궁금한데?”
“듣기로는, ‘남자는 모여서 뭔가를 마실 때 여자 이야기 이외엔 하지 않는다’던데.”

씨발, 틀린 말은 아니네.

“없어.”
“없다고? 그럴 리가. 분명히 너도 마음에 드는 여자가 한 명은 있을 것 아닌가.”
“없다니까 그러네.”
“아, 혹시 아이나인가?”

무슨 오해를 하는 거야.

아이나는 날 싫어한다고.

“걱정하지 마라. 누구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으마. 아이나에겐 내가잘 이야기 해주겠다.”
“아, 제발. 이상한 오해  그만해.”
“아니다. 천현우가 이야기한 걸 들었다. 알프레드에게 지고 울적한 표정의 아이나 곁에서 애틋한 표정으로 그녀 곁을 지켰다지?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사랑하는 이성이 생기는 것은 세상의 당연한 이치다.”
“아악!”

그녀의 단단한 오해를 푸는 데는 장장 두 시간이 걸렸다.

분명히 나는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편히 쉬고 싶었을 뿐인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였을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