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동아리.
발데크 가문은 독일의 유서 깊은 가문 중 하나로, 현재는 헤센주에 흡수되어 사라진 발데크 공국의 주인이었다.
헤센이라 하면 그것이 어디인고 싶어 잘 와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의 대도시로 유명한 프랑크푸르트라 하면 다들 바로 알아차릴 것인데, 이 프랑크푸르트가 헤센에 위치해 있다.
당연하게도 과거 독일 왕국의 수도이자, 현재는 독일의 손꼽히는 대도시인 프랑크푸르트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발데크 공국에 비해 더 유명한 것은 지당한 사실이겠지만, 발데크 공국은 사실 그렇게 이름 없는 도시까지는 아니었다.
비교적 온난한 기후를 띄는 헤센 지역은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아온 것으로 밝혀졌지만, 그 역사가 오래된 것에 반해 경제기반이 열악했다.
그렇기에 헤센은 주로 용병을 파견하는 것을 국가의 주요 수입원으로 삼았고, 오랜 파병에서 세운 공 덕분에 헤센군은 노련하고 용맹한 전사들이라는 세간의 평가를 얻을 수 있었다.
그 헤센군 중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워 출세한 것이 바로 발데크 가문의 시조였다.
발데크 가문은 파병에서 세운 공을 인정받아 작위를 하사받았고, 자신들의 고향인 헤센 지역을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용맹한 피를 이은 자손들은 더 많은 공을 세웠고, 그들의 영지는 추후 신성 로마 제국의 허가를 받아, 발데크 공국으로 승격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밑바닥에서 일어나 제후의 자리까지 올라선 발데크 가문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지만, 그들 또한 세월의 풍파를 피해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발데크 공국은 꽤 오랜 기간 공국의 지위를 지켰으나, 결국 시대의 흐름에 따라 결국엔 프로이센에 합병되었다.
그리고, 현재는 독일 헤센의 한 지역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이것을 단순히 지나간 과거로 치부하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는 것이, 발데크 가문은 그 영토는 상실했을지 몰라도, 그 지위와 명예마저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발데크 가문의 서사시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과거 자신들의 영토에선 여전히 굳건한 입지를 자랑했다.
그리고 여기 이 베아트릭스라는 소녀는, 그 찬란한역사를 가진 발데크 가문의 차녀다.
귀족 집안의 공녀로 자라온 그녀는 옹알이를 시작할 적부터 모자람 없는 사랑을 받아와서인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사춘기의 방황을 겪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는 어릴 때의 순수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
“베아트릭스, 과제를 매번 까먹나? 그냥 하기 싫어서 안 해오는 거지?”
“아, 진짜 까먹었어요.”
…이렇듯, 베아트릭스는 사랑스러운 소녀지만, 어리숙한 면도 많았다.
그것을단순히 순수함으로 치부할 것인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는 보는 사람의 선택이다.
나는 어느 쪽이냐고??
음… 내 생각엔 멍청함이 맞는 것 같다.
머리로 가야 할 양분이 몽땅 다른 곳으로 가버린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 다음엔 꼭 해와라. 부탁이다.”
“네!”
“대답만 하지 말고.”
이렇게 말하면 내가 다소 베아트릭스를 폄하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녀는 칭찬할 점도 많다.
사실 영특한 면이 더 많았다.
사리분별은 확실히 할 줄 알고, 사교성도 좋으며, 예의도 바른 소녀라는 걸 생각하면, 그녀의 바보같음은 큰 결점이 되진 못했다.
오히려 백치미로 작용했다면 모를까.
“카타리나! 성진! 현우! 성연아! 어디 가는 거야?”
“우리? 동아리 가입하러 가는데?”
“응? 동아리가 있었어?”
“OT 안 갔다 왔어? 거기서 동아리 소개해 주잖아.”
“OT가 있었어? 몰랐네.”
셋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베아트릭스… 너 아카데미 좀 열심히 다녀….”
“하지만 아무도 안 알려줬는걸?”
“그런 건 스스로 하는 거다. 베아트릭스. 우리는 아카데미에 놀러 온 게 아니잖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알아서 찾아서 해야 한다.”
카타리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베아트릭스를 질책한다.
“그럼 너희는 OT 다 갔다 온 거야?”
“아니, 우린 갈 필요가 없다.”
“뭐야! 그럼 나는 왜 가라는 건데?”
“그야 우리는 한참 전부터 트리니티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었으니까. 너와 박성진은 올해 고등부 입학이지 않나.”
베아트릭스는 여전히 알 수 없다는 표정이다.
이렇게 보니 새삼 외모라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그녀가 조금만 더 못생겼더라면 답답함을 참지 못한 나의 주먹이 그녀의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았을 테니.
하지만 그녀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얼굴에 띈 눈부신 미소를 보면 차마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성진아, 너도 갔어?”
“아니? 나는 관심 없어서 안 갔는데?”
“거봐, 성진이도 안 갔다잖아!”
“박성진은 알아서 자기 할 일을 잘한다.”
그 말에베아트릭스는 부루퉁한 표정을 짓는다.
“몰라.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된 거 아냐? 나도 너희 따라서 동아리 신청하러 갈래.”
“…좋을 대로 해라.”
베아트릭스는 총총걸음으로 우리 대열에 합류한다.
“근데, 너희는 어디로 갈지 정했어?”
“나는 무투파니, 권각술과 격투 기술을 가르치는 쪽의 동아리로 선택하려 한다.”
카타리나가 그럼 그렇지 뭐.
나보다 더한 훈련벌레가 바로카타리나다.
틈만 나면 훈련, 또 훈련 생각만 하는 게 거의 훈련하는 기계 수준이었다.
동아리는 취미나 친목질 위주로 가입해도 아무 상관이 없었음에도, 그녀는 자신을 단련하는 데에 도움이 될만한 동아리에만 가입하려 했다.
…아무래도 카타리나랑 결혼하는 남자는 힘들지 않을까?
쥐어짜이는 삶….
아무튼, 그런 카타리나의 한결같은 모습을 보면 그녀는 소설의 시나리오에서 절대 벗어날 일이 없어 보이는 캐릭터다.
“현우 너는?”
“나는 종이접기 동아리.”
이게 천현우의 가장 의외인 점이다.
나 또한 종이접기에 어느 정도 소양이 있는 편이지만, 나는 타인이 올린 다이어그램을 따라 접는 수준에서 그친다.
그렇지만 천현우 저 녀석은 설정상 한 작품의 다이어그램 없이, 흔히 CP라 부르는, 종이의 주름 패턴만을 보고 한 작품을 완벽히 완성할 수 있는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 현우 종이접기잘해?”
“나름.”
“신기하네. 난 학이랑 종이비행기 밖에 접을 줄 몰라. 그마저도 다른 동양인 친구가 알려준 거야.”
“그것만 접을 줄 알면 된 거야.”
베아트릭스의 초롱초롱한 눈길이 내게로 다가온다.
“그럼 성진이는 뭐 할 거야?”
“나? 글쎄다. 아직 생각 중인데, 아마 영화감상 동아리로 하지 않을까 싶네.”
나는 영화를 제법 좋아한다. 아니, 많이 좋아한다.
그래서 이 세계의 영화에도 관심이 많았다.
물론 느긋하게 영화를 시청할 시간 따윈 별로 없었으니, 시청한 영화의 숫자는 적었지만.
“성진이는 영화를 좋아하는구나. 무슨 영화를 좋아해?”
“나는 귀환자를 가장 재밌게 본 거 같아.”
그 말에 다들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멋지지 않나?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것으로 모자라, 야생 늑대에게 습격당해 죽을 고비에 처했던 남자가 결국엔 살아남아 자신을 배신한 친구에게 앙갚음한다는 처절한 복수극. 좋잖아?
“박성진… 의외다. 네가 그런 영화를 좋아할 줄이야.”
“그 영화는 너무 불친절하던데.”
“성진이 무성 영화 같은 거 좋아하나 봐.”
“그건 좀 선 넘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나는 무성 영화를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는다.
침묵의 미학과 절제된 베이스 음악으로 구성된 무성 영화는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면 혹시 틀니를 끼고 다니냐는 질문을 받았겠지.
“그럼 베아트릭스는 어떤 동아리에 가입하려고?”
“무슨 동아리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맛있는 걸 먹는 동아리는 없어?”
베아트릭스는 미식가다.
그것으로 모자라 대식가이기까지 하다.
보통의 사람이 베아트릭스만큼 처먹는다면 살이 뒤룩뒤룩 쪘을 것이다.
아, 이것은 베아트릭스가 먹는 양에 비해 말랐다는 소리가 아니다.
단지, 그녀의 몸매만 봐도 그녀의 위장으로 꾸역꾸역 쑤셔 넣은 것들이 전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부럽다. 누구는 다이어트 한번 하려면 닭가슴살이랑 계란 흰자, 샐러드만 처먹어야 하는데. 그것도 소금 안 친 날 것으로.
그런데 저 년은 먹어도 먹어도 그 살이 보기 좋은 부위에만 붙네.
다른 여자들이 베아트릭스를 시샘하는 것이 이해가 갔다.
“미식 동아리 같은 게 있다곤 듣긴 했어.”
“오! 그럼 그걸로 해야겠다!”
베아트릭스는 벌써 입맛을 다신다.
이 세계의 인간들은 자기 얼굴이 아까운지를 모르나.
왜 저렇게 훌륭한 면상을 달고 깨는 짓만 골라서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성연이는 어디 가입할지 확인하자.”
“성연이는 뻔하지. 봉사 동아리 하지 않겠어? 성연이는 중등부에서도 봉사 동아리였어.”
“나도 그럴 것 같긴 했다.”
“나는… 이번에는 다른 걸 해보려고.”
카타리나와 천현우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나는 그녀가 어느 동아리를 선택할지 이미 알고 있으니 별로 놀랄 건 없었지만, 중등부에서 봉사 동아리만을 자처해오던 백성연이 돌연 다른 동아리를 선택하는 것은 그들에겐 조금 놀라운 일일지도 모른다.
“무슨 동아리?”
“독서 동아리에 가입하게.”
“독서라… 백성연 너에게 잘 어울린다.”
“이것도 성연이 다운 선택이네.”
“다른 애들은 무슨 동아리에 가입했으려나.”
나머지는 이 자리엔 없었지만, 다카포 드림의 애독자인 나는 그들이 어디에 가입할지 전부 알고 있다.
일단 아이나는 암살술 동아리에 가입한다.
중등부 때는 아예 암살술 동아리의 단장을 역임할 정도였으니, 고등부도 암살술 동아리를 선택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아이나는 가업과도 연관이 있는 동아리를 선택하니 그 결정이 납득가겠지만, 알프레드와 제임스가 선택할 동아리는 듣고 나면 다소 위화감이 들 것이다.
그들이 선택한 동아리는 뜬금없게도 밴드 동아리니까.
사실, 정확히 따지자면 그들이라는 말은 조금 어폐가 있다.
알프레드는 자의로 밴드 동아리에 가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임스가 그를 강제로 가입시키는 것에 가깝다.
제임스가 알프레드를 꼬실 이유가 뭐가 있냐고?
알프레드는 곱상한 외모에 어울리게 간드러지면서도 약간의 저음이 곁들여진, 축복받은 목소리의 소유자다.
그 목소리에 보컬의 재능이 있음을 알아본 제임스가 알프레드를 밴드 동아리로 끌고 가는 것이다.
물론 말은 강제라고 했으나, 막상 들어가고 나면 알프레드도 나름 즐겁게 동아리 생활을 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둘, 올리비아와 제이드는 온라인게임 동아리를 신청하겠지.
같은 게임 동아리를 신청한 올리비아와 제이드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둘의 실력은 극과 극이다.
제이드는 설정상 정말 끔찍하게 게임을 못한다.
흔히 말하는 심해를 넘어, 내핵에 서식하는 무언가로 분류해도 될 정도로 게임을 못한다.
그에 반해, 올리비아는 이게 정녕 여자가 맞나 의심될 정도로 게임을 잘했다.
물론 그녀가 중증의 게임 폐인인 것도 한몫했겠지만.
“어, 여기서 슬슬 갈라져야겠다.”
“잘 가! 내일 보자!”
“수고해라.”
“바이바이.”
“다들 동아리 잘 들어가고.”
영화감상 동아리는 작중에서 등장하지 않았는데, 어떤 동아리 일까?
약간의 기대감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