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입학 첫날. (1)
나는 여전히 성남의 어느 투룸에 있다.
하지만, 분위기만큼은 예전과 다르다.
봄꽃을 시샘하는 추위가 창밖에서 밀려들고 있었으니.
봄의 싱그러움은 아직 찾아볼 수 없지만, 태동하는 봄의 기운은 여기저기에 퍼져있다.
나뭇가지들 위로 수줍게 피어나기 시작하는 꽃망울과 아직은 조금 냉기가 남아있는 땅에서 솟아나는 작은 새싹들이 이를 대변한다.
어느덧 이 세계에 떨어졌던 첫날, 1월 9일을 포함해 60일이 지났다.
내가 여기서 보낸 60일은, 누가 보아도 헛되이 시간을 낭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자신이라고 해야 할지, 타인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이 육신으로 그만큼 열심히 살았다.
이제, 그 노력의 결실을 볼 날이 목전으로 다가왔다.
3월 8일, 현재 시각 오전 7시.
5시간 뒤면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입학식이 시작된다.
트리니티 아카데미는 다카포 드림의 지구, 테라롬에서 가장 유명한 아카데미다.
많은 이들이 다니고자 선망하는 각성자 대상 특수교육시설, 통칭 아카데미 중에서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곳이니.
그것에 이견을 표할 이는 아무도 없다.
수많은 아카데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트리니티 아카데미는 설립 이후 최고의 아카데미 자리를 한 번도 내려놓은 적이 없었으니까.
이 아카데미의 역사는 다카포 드림 세계에 질서와 정의를 가져다준 최초의 어떤 세 영웅으로부터 시작된다.
사상력이라는 초능력이 처음 생겨 이 세계에 혼돈이 도래했을 때, 신성처럼 나타난 삼인방은 그 혼돈을 종식하고, 질서와 정의를 다시 세우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삼인방은 이 세계에 빛을 다시 가져온 삼인방이라는 의미에서 여명의 삼위란 이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여명의 삼위는 혼돈을 종식하는 데엔 성공했으나, 사상력으로 인한 혼란이 다시금 도래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상력의 오용과 남용을 막기 위해 사상력의 사용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교육기관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의 주장은 수포로 돌아갔다.
강력한 사상력을 각성한 이들이 대부분 그 의견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사상력은 선택받은 자들만 사용할 수 있는 힘이고, 구태여 사람들에게 사상력의 사용법을 알려 주어선 안 된다는, 지극히 선민사상적인 이유에서 기원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하여 그들의 의지까지 꺾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의지를 계승한 두 번째 영웅들, ‘천경의 대삼각’은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사상력의 올바른 사용’을 슬로건으로 내건, 최초의 각성자 대상 특수교육시설, 아카데미를 창건했다.
그리고 이 교육시설의 이름은 진심으로 사상력이 올바르게 사용되길 소망했던 자신들의 멘토, 여명의 삼위에서 따온 ‘트리니티’가 되었다.
이것이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시초다.
이토록 오랜 전통과 역사를 보유하고 있다 보니, 트리니티 아카데미는 아카데미 순위 부동의 1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이는 현재까지 아무도 없다.
그 정통성에 먹칠을 한 일이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여명의 삼위의 정신을 이어받았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 트리니티 아카데미, 여명의 삼위도 트리니티 아카데미에 영향을 주었는데, 그렇다면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창립자인 천경의 대삼각도 자신들의 족적을 트리니티 아카데미 어딘가에 남기지 않았을까?
답은 ‘그렇다’이다.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외형은 대삼각에서 따온, 삼각뿔을 모델로 하고 있었다.
그 삼각뿔은 태평양 한가운데에 떠 있는 거대한 땅덩이, 부유섬 아이니르에 있는데, 아이니르 자체가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설립을 위해 만들어진 인공섬이라는 걸 감안하면 실로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으리라.
그리고 나는 오늘 그 세계 최고의 아카데미, 트리니티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트리니티 아카데미로 갈 채비는 진작에 마쳐둔 참이었다.
이제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정들었던 공간이기에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가야만 한다.
할 수 있다.
나라면.
그렇게 각오를 다지고 짐을 챙겨 추억이 새겨진 원룸을 나섰다.
워낙 가진 게 없었기에, 괴나리봇짐만도 못한 초라한 짐이었지만.
* * *
공항은 한산했다.
특이한 점이라면, 높게 잡아도 나보다 두세 살 많아 보이는 청소년들이 공항에 많다는 것이었다.
아마 저들도 트리니티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서 공항에 온 거겠지.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이니르행 한국항공 78편을 타실 분은 출국 절차를 밟아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탈 비행기다.
아이니르행 한국항공 78편.
나는 여권과 짐을 챙겨 출국 심사대로 향했다.
“확인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간단한 출국 심사가 끝나고, 로비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다카포 드림 속 세계의 공항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세계라고 별다를 건 없었다.
로비를 눈으로 쓰윽 훑어도 면세점에 진열된 사치품들만 눈에 들어온다.
전생에서도 한 번도 걸쳐 본 적 없는 명품 양복들이, 금수저 친구가 한두 잔 주면서도 생색을 되게 내던 양주와 비슷하게 생긴 양주들이 이 진열대에 나열되어 있었다.
눈으로라도 소비 욕구를 만족하던 와중, 탑승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시작됐다.
[아이니르행 한국항공 제 78편은 탑승 중입니다. 이 편을 이용하실 손님은 탑승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비행기를 타면 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마땅히 돌아갈 곳도 없다는 걸 아는 나는 대담한 발걸음으로 게이트로 나간다.
통로의 유리창 밖을 보니 내가 살던 곳과는 다르게 이곳의 비행기는 다소 미래적인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콩코드 여객기가 이런 느낌이려나?
내부는 크게 다를 게 없긴 했지만.
비행기 내부로 들어와 주변으로 눈을 흘겼다.
역시나 내 또래를 벗어나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네.
이들도 다 트리니티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신입생이겠군.
혹여나 그중 다카포 드림 속 중요 인물이 있을까 주변을 열심히 살펴보았지만, 그런 이는 보이지 않았다.
더 찾아봤자 의미는 없을 거란 생각에, 중요 인물을 만날 거라는 기대를 빠르게 접고, 이코노미 클래스의 좁은 좌석에 앉아 축 늘어졌다.
다행히 내 옆엔 아무도 앉지 않아 건어물처럼 축 늘어진 내 추태를 볼 사람도 없었다.
늘어져봤자 좁아터진 이코노미 클래스인 만큼, 평범하게 앉아있는 것과 별 차이도 없었지만.
[한국항공에 탑승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비행 되시길 바랍니다. 불편하신 점이 있다면 언제든지 호출 버튼을 눌러 주십시오.]
기내 방송이 끝나고 대략 십 수어 분이 지날 때쯤, 비행기가 이륙했다.
심심한 비행에 나 또한 늘어진 채 꿈나라로 이륙했고 말이다.
* * *
비행기는 생각 외로 금세 아이니르에 있는 트리니티 공항에 도착했다.
간단한 체크인을 마치고, 공항에서 벗어나자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거대한 삼각뿔 형태의 건물이 나를 마주한다.
이게 트리니티 아카데미구나.
묘사하던 것보다 훨씬 크고 웅장하네.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앞엔 한창 직원들이 아카데미 밖까지 나와, 입학 생도들을 강당까지 안내하고 있었다.
나도 그들의 안내를 받기로 했고.
다카포 드림을 읽었다 한들, 글로 본 것이지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구조를 직접 본 것은 아니니까.
…강당은 정문에서 한참 먼 거리였다.
이러니까 안내를 해주는구나.
이 먼 거리를 안내 없이 강당까지 찾아가는 것은 아마도 상당히 힘든 일일 것이다.
그 힘든 일을 반복해왔음에도 군소리 없이 친절하게 안내해준 직원의 담대함에 조금 감동했다.
고작 아카데미 내부인데 한참 먼 거리라니, 과장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지간한 섬 하나 크기를 웃도는 아이니르 면적의 80%를 차지하는 것이 트리니티 아카데미다 보니, 정문에서 강당은 제법 먼 거리다.
강당에 도착해 안내가 끝나자 안내원은 갑자기 어떤 단말기를 꺼내 들곤, 팔을 걷어붙이라고 내게 말했다.
무슨 까닭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쓸데없는 걸 시키진 않겠지’라고 생각하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름이 무엇인가요?”
“박성진입니다.”
그는 단말기를 몇 번인가 조작하더니, 단말기를 내 팔뚝에 갖다 댔다.
따끔.
그가 단말기를 갖다 댄 팔뚝에는 핏방울이 작게 맺혀있었다.
“트리니티 아카데미에 입학한 걸 축하합니다. 박성진 생도. 이로써 박성진 생도는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어엿한 정식 생도입니다. 박성진 생도의 식별번호는 37580입니다. 주사한 시리얼 카드는 이곳 아카데미에서 활동하는 이들 모두에게 이식됩니다. 기본적인 기능은 건강 기능 체크, 통역, 대금 결제 등이 있고, 그 외에도 다양한 기능이 추가되어있으니 직접 사용하면서 차차 알아가시면 됩니다. 기능을 활성화하기 위해선, 핸드폰에 트리니티 아카데미 어플을 설치하시고, 방금 말한 시리얼 카드의 식별 번호를 트리니티 아카데미 어플에 등록하면 어플과 시리얼 카드가 동기화되니 그걸로 자신의 정보를 확인하세요.”
다시금 느끼는 거지만, 다카포 드림 속 세상의 기술력, 대단하다.
개인 정보가 철저히 타인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된다는 사실은 조금 꺼림칙하긴 했지만.
아무튼, 강당 내부에 도착하자 자리는 이미 반 정도 차 있었다.
나도 사람들을 따라 대충 어딘가의 빈 좌석에 앉는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주인 없던 의자에 하나둘씩 주인이 생기더니, 비어있던 강당이 사람으로 가득 찼다.
사람이 가득 차자, 양복을 쫙 빼입은 단벌 신사가 앞으로 나선다.
저 사람이 오스카 샤르마인가.
천경의 대삼각 중 아크투르스를 맡고 있는, 영웅 오스카 샤르마.
현재는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학장을 역임하고 있다.
…작중에선 상당히 잘생겼다고 묘사됐는데, 직접 보니 평범하게 속세에 찌든 중년의 모습으로만 보인다.
여명의 삼위를 계승했다는 대영웅이라도 나이 앞엔 장사가 없나 보다.
그래도, 그의 실제 나이가 수백 살이라는 점, 현역 시절에 고생깨나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는 간다.
양복은 중후한 멋이 어우러져 제법 잘 어울린다만.
오스카 샤르마는 천경의 대삼각이라는 비장한 역할에 비해 상당히 심심한 비중을 차지했다.
비중으로만 따지면 천경의 대삼각 중 스피카, 클로에 뤼미엘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아마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실무와 운영으로 바빠서 거의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뭐, 비중이 적은 만큼 별 신경은 쓰지 않아도 되겠지.
[아- 아-]
지금, 강당 전체에 울려 퍼진 오스카의 목소리가 다카포 드림의 프롤로그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