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배부른 식사를 끝내고 호은은 한여울을 데리고 케이크 가게로 갔다. 숙소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코스였다.
“아저씨! 나 이거 다 사도 돼요?”
케이크 진열대를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쳐다보는 한여울은 어느 것 하나 고르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 다 먹는 거로 결정을 내렸다.
“돈은 나중에 갚을 거니까…….”
“안 갚아도 돼. 내가 여울이 사 주고 싶어서 여기 데려온 거잖아?”
“정말요?”
“응. 정말이지.”
한여울은 방방 점프를 하며 신난 감정을 드러냈다.
“사장님. 진열대에 있는 케이크 하나씩 다 주세요.”
“하나씩 포장해 드릴까요. 아니면 케이크 모양으로 만들어 드릴까요?”
“케이크요!!!”
호은의 대답을 가로챈 한여울은 자신이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걸 깨닫고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케이크를 받아 본 기억이 없어서요. 아저씨 저 초도 사 주면 안 돼요?”
“사장님. 초도 같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진열대에 있는 케이크는 조각 케이크였다. 한여울이 고른 조각을 합치자 케이크 모양이 완성됐다. 잘 포장된 케이크 상자를 품에 안은 한여울은 어쩐지 꼭 울 것만 같았다.
케이크를 받아 보지 못했다는 그녀의 말은 그동안 어떤 과거를 보냈는지 내포하는 듯했다. 호은은 잠시 고민하다가 도인호에게 귓속말했다.
“싫습니다.”
“내 부탁이라도?”
미간을 찌푸렸던 도인호는 자신의 옷자락을 잡고 빤히 올려다보는 호은을 보고 두 눈을 감았다.
“그럼 너 빼고라도 할래.”
“그건 안 됩니다!”
눈을 번쩍 뜬 도인호는 어쩔 수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여울아! 이제 숙소 가자. 데려다줄게.”
한여울은 차를 타는 순간까지 케이크를 놓지 않았다. 훔쳐 갈 사람이 없음에도 불안한 모양이었다.
한참을 도로를 달리다 보니 어느새 이능력자 협회 서울 본사에 도착했다. 한여울이 묵고 있는 숙소 앞에 주차했다. 백화점에서 쇼핑한 것의 반은 나중에 택배로 보내 주기로 했다. 나머지는 두 사람이 직접 쇼핑백을 들었다.
“숙소에서 케이크 같이 먹어 주면 안 돼요?”
현관문 앞에 멈춰선 한여울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부탁했다. 초를 챙겼을 때부터 그녀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눈치챘던 호은이기에 그러겠노라고 답하며 숙소에 들어갔다.
“그럼 우리는 케이크 세팅하고 있을게. 여울이는 손 닦고 올래?”
“네!”
화장실로 들어간 여울을 확인하며 호은은 숙소에 있는 다른 에스퍼에게 양해를 구해 그녀가 5분 정도는 거실로 나오지 못하게 막아 달라 부탁했다.
식탁 위에 케이크를 올려 두고 꽂은 촛대 위로 도인호가 불을 붙였다. 이능력으로 컨트롤 중인 불은 촛농이 녹아내리지 않게 만들었다. 그사이 호은은 현관문을 열었다. 우르르 들어오는 사람들은 호은이 말했던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 왔다.
호은은 오케이 사인을 보내는 도인호를 보며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한여울을 확인했다.
“언니, 뭐 때문에 그래요?”
한여울의 눈을 손으로 가린 에스퍼가 그녀를 식탁의 앞으로 데려왔다. 에스퍼라 감각이 예민한 한여울이었으나 숙소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두 아저씨가 자신과 같이 케이크를 먹어 주기로 했는데 가 버린 걸까? 내심 불안한 마음으로 앞을 가린 손이 치워지길 기다리던 그녀는 마침내 앞을 볼 수 있었다.
“여울아! 협회에 온 걸 축하해!!!”
불 꺼진 부엌의 가운데 파란색 불이 붙은 케이크를 들고 호은이 서 있었다.
-팡!
왼쪽에서 들리는 미니 폭죽 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토끼 가면을 쓴 여섯 명이 한여울에게 축하한다며 손뼉을 쳤다.
“저기 가서 입으로 바람을 불어서 케이크 불을 끄는 거야.”
“…….”
“그러면 소원이 이루어져.”
호은은 한여울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친절히 알려 줬다. 그녀는 토끼 가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케이크가 있는 쪽으로 조심히 걸어갔다.
“소원 빌면 정말 이루어져요?”
“그럼.”
고작 불을 끄는 행위로 소원이 이루어지는 거냐며 아이답지 않은 질문을 한 한여울은 호은에게 재차 물었다. 그녀는 확신에 찬 답변을 듣고 나서야 눈을 감고 양손을 모았다.
“후우!”
푸른 불이 사라지고 부엌은 순식간에 암흑이 되었다.
달칵, 스위치 옆에 있던 도인호가 불을 켜며 여섯 명의 토끼 가면을 탐탁지 않게 쳐다봤다. 아무 말도 못 하는 저들은 타이거였다. 아직 한여울과 정식적으로 인사한 적은 없어 호은이 가면을 쓰고 오라고 한 듯했다.
케이크로 파티를 하고 싶어 하는 한여울을 눈치챈 호은이 저들을 부르길 희망해 도인호는 어쩔 수 없이 허락했으나, 그것만 아니었다면 저 가운데에 있는 한여름과 호은을 같은 공간에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케이크 나눠 먹어요!”
“그럴까?”
호은은 타이거 쪽을 쳐다봤다. 반설아와 월랑은 한여울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아 말을 해도 괜찮았지만, 어쩐지 그녀들도 입을 꾹 닫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먹을게!”
도인호는 타이거가 눈치껏 꺼지길 바랐으나 식탁에 재빠르게 앉는 한여름을 보며 결국 그릇을 챙기는 호은의 옆에 꼭 달라붙어 그를 도왔다.
“부르길 잘했네.”
호은은 뒤를 돌며 한여울에게 손동작으로 말을 거는 타이거를 봤다. 머지않아 저 토끼 가면을 벗고 한여울에게 진실을 말하며 서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걸 생각하니, 그녀가 더는 외롭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케이크 다 먹고 우리도 얼른 집에 가자.”
“좋아요.”
도인호는 호은이 말을 끝내자마자 대답하며 남들 몰래 그의 뺨에 입 맞췄다. 빨리 가자는 도인호 나름의 애교였다.
“그런 건 침실에서나 하는 게 어때?”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토끼 가면이 불쑥 두 사람 사이를 끼어들었다.
“이런 자리 만들어 줘서 고마워.”
목소리의 주인공은 한여름이었다.
“여울이도 원했을 거야.”
“그랬을까?”
한여름은 일부러 도인호를 등지고 섰다. 호은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가려 버린 한여름의 멱살을 잡아 내동댕이칠까 고민하던 도인호는 호은의 안도하는 소리를 듣고는 들어 올린 손을 멈췄다.
“우리는 이만 가 볼게. 사실상 한여울과는 십 분 이상 대면하면 안 되거든.”
드래곤 아지트에서 괜찮아 보이던 한여울이지만 협회는 혹시 몰라 타이거와의 접근을 제한하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그런 끔찍한 현장에 있었는데, 그때 적으로 있던 타이거가 같은 협회에 있다는 사실로 트라우마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타이거가 멀티 몬스터를 잡고, 세상이 이번 사건을 잊어갈 즘 한여름은 그때 정식으로 한여울에게 인사할 참이었다.
“여울이 조금만 더 부탁해도 될까.”
“네가 부탁하지 않아도 그럴 거야. 여울이랑 나는 토끼 팸이거든.”
“저도요.”
한여름의 어깨를 밀어내 옆으로 치운 도인호는 뻔뻔한 얼굴로 호은의 옆을 꿰찼다.
“그쪽은 가짜 토끼. 저는 진짜 토끼.”
토끼 가면을 보며 비웃음을 걸친 도인호는 호은의 허리를 팔로 감싸며 “맞죠. 형?”하고 되물었다. 한여름은 그 행동에 얼굴을 와락 구기며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질투하는 남자는 보기 흉해.”
“본인한테 하는 말인가요.”
“인호야, 왜 그래.”
한여름과 전투했던 앙금이 남아 있는 건지 이렇게까지 사람을 혐오하는 도인호는 처음이었다.
호은은 손을 들어 도인호의 뺨을 쓰다듬으며 타일렀다.
“어른스러운 내가 참아야지. 호은아, 연하는 되게 귀찮은 것 같아.”
“너도 그만해.”
혀를 빼꼼 내밀며 어린애도 안 할 것 같은 도발을 하는 한여름을 보며 호은은 고개를 저었다. 다음부터는 이 둘은 절대 같은 공간에 두지 말아야겠다.
“아저씨! 이거 먹어 봐요!”
“응~ 여울아 갈게.”
포크를 든 한여울의 부름에 호은은 어린애 두 명을 무시하고 식탁으로 갔다.
“호은 형이 너무 착해서 잊었나 본데, 그쪽은 범죄자입니다. 저 같으면 이렇게 접근하지도 못할 텐데.”
“무슨 소리야? 우린 절친한 동창 사이인걸. 너보다 권호은에 대해서는 내가 더 잘 알걸? 교복 입은 사진이라도 보여 줄까?”
“……그건.”
“으하하. 내가 보여 줄 것 같아?”
순간 대답을 멈칫한 도인호를 보며 한여름은 박장대소했다. 그는 손가락 욕을 하며 호은이 있는 식탁으로 돌아갔다.
“하아.”
제대로 화도 내지 못하는 상황에 도인호는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욕설을 삼켜야만 했다.
***
한여울과 케이크까지 다 먹고 인천 숙소로 돌아오자 시간은 어느덧 자정이 넘어가 있었다.
씻고 나온 호은이 욕실 문을 열자 수증기가 내뿜어졌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안방으로 들어가자 도인호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생각보다 더 피곤한 것 같아.”
“마사지해 줄까요?”
도인호는 자연스럽게 호은이 들고 있는 수건을 가져가 남은 물기를 제거해 줬다.
푹신한 침대에 앉자 노곤함이 밀려왔다. 호은은 씻느라 침대에 대충 던져 두고 간 가이드 워치를 확인했다. 각인한 이후로는 도인호의 가이딩 수치를 확인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각인의 효과인지 직접 가이딩을 각 잡고 하지 않아도 70%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깨를 주무르는 부드러운 손짓에 호은은 몸에 힘을 뺐다.
도인호는 누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건지 며칠 전부터 마사지를 해 줬다. 처음 했을 때는 힘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해 호은의 목에 푸른 멍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는 딱딱하게 뭉친 부분을 적당한 압력을 줘 가며 풀어 줬다. 끄응,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시원했다.
“다리 푸는 것도 배웠어요.”
“다리?”
목과 어깨만 풀어 주던 도인호가 호은을 침대에 엎드리게 했다. 언제 준비한 건지 로션까지 가져와 종아리에 부었다.
차가운 로션의 감촉에 몸이 경직됐지만, 호은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발목부터 종아리 위쪽으로 올라가며 지압을 해 주는 손은 이상하리만큼 자극적이었다.
침대에 눕기 전에 잠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던 호은은 가운에 속옷만 입은 상태였다. 덕분에 훤히 드러난 안쪽 허벅지까지 도인호의 손길이 닿았다.
“마사지하면서 상대방과 계속 닿다 보면요.”
“……으응.”
“더 깊은 곳까지 닿을 수 있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