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126화 (126/129)

외전 3.

식사를 끝낸 두 사람은 차를 강가에 대고 산책로를 걸었다. 오늘 밤에는 드디어 한여울과 만날 수 있는 날이었다. 각성한 에스퍼는 열흘간 교육을 받게 되는데 한여울 같은 경우는 교육은 끝났지만, 타이거와 연관된 점과 부모를 잃은 점이 합쳐져 심리 상담 프로그램을 이수해야 했다고 한다.

납치당한 이후로 한여울과 처음 만나는 것인데 술 냄새가 날 순 없다고 생각해 호은은 일부러 찬 바람을 쐬고 있던 참이다.

“춥지는 않아요?”

“밤 되니까 쌀쌀하긴 하네.”

호은의 말에 도인호는 겉옷을 벗었다.

“아니야. 너 입어!”

“전 몸에 열이 많아서 괜찮습니다.”

“그러다 감기 걸린다?”

“그럼 형이 간호해 주면 되지 않나요.”

“어쭈? 이제 농담도 하네? 그래도 일단 입어 봐.”

도인호에게 받은 옷을 도로 입힌 호은은 다른 방법이 있다며 주변을 둘러봤다. 날이 추워서 그런지 산책을 하는 사람은 두 사람이 다였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호은은 과감히 도인호의 앞을 막아섰다. 혹시 몰라 한 번 더 주변을 둘러본 뒤 호은은 도인호의 가슴에 안겼다.

“이러면 둘 다 따듯해.”

이능력을 꺼내 호은의 주변을 따듯하게 할 생각이던 도인호는 호은이 안기자 꺼냈던 이능력을 없애 버렸다. 그는 팔을 들어 호은을 틈 하나 없이 깊숙이 안았다.

“정말이네요. 따듯해요.”

“하하. 부끄럽다. 그래도 우리 연인이니까…….”

“연인이요?”

도인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던 호은이 고개를 들었다.

“응. 우리 서로 좋아하잖아.”

“연인…… 연인을 하게 되면 뭐가 달라지나요.”

엉뚱한 도인호의 질문에 호은은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다. 이번 것도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담인 것 같았다. 하기야 도인호는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많이 했으면서 사귀어 달란 말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 질문한 것과 같은 맥락일 거다. 녀석은 연인이라는 것의 사전적 정의만 아는 것이지 정확히는 모른다.

호은은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도인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사랑해.”

“……!!!”

“연인이 되면 이렇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

“사랑해요.”

놀란 표정의 도인호는 금방 호은을 따라 했다. 사랑한다고 말한 그의 입술은 망설임 없이 호은의 입술을 머금었다. 굳게 닫혔던 입술이 열리고 어느새 질척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호은의 차가운 뺨은 체온이 높은 도인호의 손바닥으로 인해 금방 녹았다. 두 사람은 몇 번이고 서로의 입 안을 탐했다.

“사랑해요. 호은 형.”

입술이 떨어지자 간신히 숨을 몰아쉬던 호은은 대답할 겨를도 없이 다시 입술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

“아저씨!”

“여울아!!!”

산책을 끝내고 다시 서울 본사로 돌아가자 한여울이 엄태석의 손을 잡고 마중 나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부장님.”

뒤늦게 한여울 옆에 엄태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호은은 서둘러 인사를 건넸다. 엄태석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구십 도 이상 허리를 꺾은 호은에게 일어나라고 말했다.

“여울아 안녕.”

엄태석과 인사를 끝낸 호은은 시선을 내렸다. 한여울은 호은과 시선을 맞추더니 돌연 엄태석의 뒤로 숨어 버렸다.

“토끼 아저씨야.”

“……아저씨.”

“늦어서 미안해.”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던 한여울은 입술을 우물거리더니 호은에게 뛰어왔다. 호은은 다리를 굽히고 팔을 벌렸다. 품 안에 들어오는 한여울을 꽉 안아줬다.

“계속 자네만 찾았다네. 보고받은 내용에 이만큼이나 친하다는 건 없었던 것 같은데.”

이산가족 상봉하듯 부둥켜안은 호은과 한여울을 보며 엄태석은 신기하다고 했다.

“호은 형에게는 특별한 힘이 있거든요.”

도인호는 한여울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웃는 호은의 모습에 덩달아 입매를 당겼다. 외로운 사람의 허전한 부분을 감싸 주고 채워 주는 것. 도인호는 한여울이 느끼고 있는 감정에 공감했다.

“지금 시간이 5시니까 늦어도 9시 전에는 와 주길 바라네.”

“알겠습니다. 여울이는 현재 서울 협회 소속인 건가요?”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무소속이라네. 그리고 만 17세 이하인 에스퍼는 서울에서 보호와 교육을 받아야 해서 서울 협회 숙소를 이용하고 있지.”

“설마 혼자서 지내는 건 아니죠?”

한여울이 걱정돼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진 호은은 품에서 버둥거리는 한여울에 팔에 힘을 뺐다. 그녀는 호은의 품에서 나오더니 씩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혼자 아니에요. 전담 가이드 선생님도 있고 에스퍼 언니들도 있어요.”

“다행이네요.”

가만히 있던 도인호가 입을 열었다. 결정체 이식자였던 그는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숙소를 혼자 사용했다. 엄태석이 말하는 미성년자 에스퍼 취급은 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다.

“그러게, 다행이다.”

도인호의 말을 얹으며 호은은 헤집었던 한여울의 머리카락을 다시 정돈했다.

“자. 이제 슬슬 갈까? 외출 시간 별로 없으니까!”

두 사람은 한여울의 손을 각각 잡았다.

“저 손 그네 해 봐도 돼요?”

그녀는 오른손과 왼손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뜸 들이며 말했다.

“손 그네?”

“어렸을 때 해 보고 싶었거든요. 제가 땅에서 발을 떼면 잡은 손을 힘껏 위로 올리고 버텨 주시면 돼요.”

지금도 충분히 어리다만 얼마나 더 어릴 때를 말하는 걸까? 상념에 빠진 호은이 바로 대답하지 않자 한여울은 곧바로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이런 건 어린애나 하는 거니까.”

“아니야. 우리도 해 보고 싶은걸. 그렇지, 인호야?”

“네. 하나둘 셋 하면 들까요?”

“!!!”

한여울은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는 도인호가 자신의 의견에 동의해 줄지는 몰랐던 건지 놀란 기색이었다. 호은은 도인호에게 눈짓을 보냈다.

“자. 하나~”

“둘.”

마지막으로 셋을 외치며 두 사람은 잡은 손을 높이 들었다. 에스퍼인 도인호와 일반인치고 신체 능력이 좋은 호은이기에 한여울은 생각한 것보다 더 높이 점프했다.

허공을 떴던 발이 땅바닥에 닿고 그녀는 10살 아이다운 웃음소리를 흘리며 기뻐했다.

“한 번 더 할까?”

“좋아요!!!”

악착같이 공부하고 돈을 벌며 나이답지 않게 성숙해 보이던 한여울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그 누구보다 제 나이 또래처럼 별것도 아닌 것에 까르륵거리며 즐거워했다.

자동차가 주차된 곳까지 세 사람은 지치지 않고 손 그네 놀이를 했다.

뒷좌석에 한여울과 함께 앉은 호은은 그녀의 벨트를 매 줬다.

“우선 백화점부터 갈까?”

“좋아요!”

한여울은 협회에서 지원해 준 건지 깨끗한 사복을 입고 있었으나 호은은 그걸로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럼 앞으로 학교는 안 나가는 거야?”

“저는 정신계 쪽이라서 학교는 원하면 나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여울이는 학교 가고 싶어?”

“네. 저는 공부하는 거 좋아해요. 학교 가고 싶어요.”

“좋아. 그럼 학교에서 입고 다닐 만한 옷으로 구경해야겠다.”

도인호는 뒷좌석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듣고는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퇴근 시간대가 겹치면 도로가 꽉 막히기 때문에 도인호는 목적지인 백화점으로 바로 출발했다.

“아동복 판매장으로 가야 하나?”

백화점에 도착한 세 사람은 지하 주차장에 있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고민했다.

“지난번에 갔던 라운지로 가면 됩니다. 미리 말해 놨어요.”

“뭐?”

“저희 둘 다 이미 사람들에게 얼굴이 노출된 상태잖아요. 여론도 안 좋아서 어쩔 수 없습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하는 도인호는 한여울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똑똑한 그녀라지만 백화점은 구경해 본 적이 거의 없기에 그저 고개만 갸웃거렸다.

“하기야. 우리는 몰라도 여울이 신상까지 밝혀지는 건 곤란하네.”

도인호는 호은이 동의하는 것을 보고는 라운지가 있는 층을 눌렀다. 만약 호은이 끝까지 일반층에서 쇼핑하자고 했다면 모자와 마스크를 사서라도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다행이었다.

“쇼핑 얼른 끝내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고 굳은 한여울에게 호은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네. 맛있는 거 좋아요.”

힘찬 한여울의 대답과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안내를 도와줄 백화점 직원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대기했다.

한여울은 정장을 빼입은 여자 직원의 모습에 긴장한 건지 호은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여울이 예쁜 옷 골라 줄 직원분이니까.”

VIP 룸으로 들어가자 도인호가 미리 말한 건지 한여울이 입을 만한 옷, 신발, 가방, 거기다가 머리 장신구까지 종류가 다양하게 늘어져 있었다.

“초등학생 여자아이라고만 알려 주셔서 지금 치수 한번 재 보고 사이즈 교환이 필요한 제품이 있나 먼저 확인해 보겠습니다.”

한여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긴 했으나 처음 받아 보는 대접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치수를 측정하는 것에 금방 익숙해지더니 옷을 갈아입기 전 오렌지 주스를 받아 마시는 여유까지 보여 줬다.

한여울이 첫 번째 코디로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 사이 호은은 옷걸이에 걸린 휘황찬란한 옷을 손으로 훑었다. 예쁘고 좋은 옷을 입혀 주고는 싶긴 한데. 아이돌 의상 같은 옷을 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호야. 옷은 그냥 우리가 직접 보는 게 낫지 않을까?”

도인호는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호은이 만졌던 의상 매대를 바라봤다. 초등학생이 와이셔츠에 조끼에 재킷까지 껴입는 교복 스타일의 옷을 보고도 문제점을 모르는 듯했다.

“옷이 과하지 않나.”

요즘 초등학교 애들 사이에 어떤 게 유행인지 모르니 말을 내뱉는 호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짠! 저 어때요?”

옷을 다 갈아입은 건지 한여울이 탈의실에서 나왔다. 베이지색 떡볶이 코트 안에 체크무늬 원피스를 입은 한여울에게는 고급스러운 티가 물씬 풍겼다. 흰색 레깅스와 반짝이는 유광의 검정 단화까지 확인한 호은은 입이 마르게 칭찬을 뱉어 댔다.

“너무 잘 어울려!”

옷을 갈아입으며 호은이 했던 말을 들었던 한여울은 그의 상반된 반응에 안심하며 웃었다. 쇼핑은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직원이 가져온 모든 제품을 구매했기 때문이다.

“이제 밥 먹으러 갈까?”

“네!!!”

쇼핑을 끝내고 세 사람은 백화점에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해당 백화점은 이능력자 협회에 큰손 고객이 많았다.

특히나 호수와 백우경이 이곳을 자주 찾아왔고 그 때문인지 레스토랑에는 VIP 식사실이 따로 있었다.

아마도 얼굴이 알려진 백우경 때문에 만들어진 장소 같았다. 이제는 그가 올 이유가 없으니 도인호는 이곳을 종종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울아,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어릴 땐 돌도 씹어 먹어야 해.”

“돌은 안 먹어도 될 것 같아요.”

호은과 도인호에게 완전히 적응한 한여울은 농담을 건넬 정도로 두 사람이 편해졌다. 세 사람의 식사 자리는 밥을 먹는 내내 이야깃거리로 가득했다. 무뚝뚝한 도인호마저 한여울에게 말을 걸며 그녀를 신경 썼다.

처음에는 도인호의 눈은 제대로 마주 보지도 못하던 그녀는 이제는 먹기 싫어하는 브로콜리를 몰래 도인호에게 넘겨주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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