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123화 (완결) (123/129)

123화.

폴이 말했던 것처럼 아침부터 감사부 직원이 두 사람을 데리러 왔다.

“이 영상이랑 권호은 가이드님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거죠?”

“네? 네…….”

홍보부 계정으로 올라간 영상은 호은이 서울 협회장에게 줬던 USB 영상의 일부가 담겨 있었다. 멀티를 만들기 위해 가이드와 에스퍼로 생체 실험하는 것과 실험체를 폐기 처분하는 것, 거기다 결정체 이식자에 관한 자료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한국 이능력자 협회 인권 윤리 내부 고발이라는 제목의 영상은 올라온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오백만 뷰가 넘어 있었다.

“해당 영상을 올린 사람은 김세희라는 가이드입니다. 해당 가이드와 친분이 있던 거로 아는데.”

“…….”

“그분이 공단과 협회 쪽 컴퓨터를 다 해킹해 수많은 자료를 가지고 떠났습니다. 그걸로 또 어떤 짓을 할지 모르니 그녀에 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호은 씨. 저희에게 알려 줄 게 없습니까?”

김세희의 이름이 들리자 호은은 고개를 숙였다. 결정체 이식자의 피해자 가족인 김세희. 타이거 소속이던 기억을 지우고 가이드 공단에 잠입한 김세희. 호은이 알고 있는 김세희를 앞에 있는 남자는 모른다.

“김세희 씨는.”

“네.”

“……평범한 여고생 같았습니다. 떡볶이를 좋아하고. 친화력도 좋아서 잘 웃고 떠들던.”

“…….”

“제가 아는 김세희는 그게 다입니다.”

알고 있는 사실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거짓말은 호은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였는데. 이곳에 와서 밥 먹듯이 하는 게 거짓말 같았다.

“권호은 씨. 사실입니까?”

“…….”

취조실 같은 공간 탓인지 감사부 직원의 말투는 공격적으로 들렸다. 호은은 꽤 오랫동안 침묵했다. 입 안에 모래알이 굴러가듯 까끌거렸다.

“사실입니다. 그리고 곧 징계 회의에 참여해야 해서 가 봐야 할 거 같은데.”

허벅지에 올려 둔 호은의 손을 말없이 잡은 도인호가 대신 입을 열었다. 감사부 직원은 손목에 찬 시계를 한번 쳐다보다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부에 나온 호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이 좋았죠. 세희 씨랑 형이랑.”

“그렇지. 세희 씨는 어디로 간 걸까.”

김세희는 사라졌다고 했다. 대한민국에 파문을 일으킬 영상을 올림과 동시에. 타이거 간부가 한여름을 따라 협회에 들어온 것과 달리 김세희는 떠나는 것을 선택한 모양이었다. 대화조차 못 하고 그녀를 떠나보낼 줄 몰랐던 호은의 입 안이 썼다.

“대회의실은 저기입니다.”

호은의 손을 맞잡은 도인호는 부드럽게 이끌었다.

“늦었네.”

환자복 위에 카디건을 걸친 배연우는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장기 전체가 파열됐던 배연우는 이능력으로 당한 탓에 아직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했다. 그 안정이 다리의 안정은 아닐 것 같은데. 남운수는 꿋꿋하게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홍보부 네 사람은 서울 협회장의 요청에 따라 징계 회의에 참여하게 되었다. 회의는 가이드 공단의 이사진과 지사별 협회장이 모였다. 회의 테이블은 디귿을 구십도 회전한 모양새였다. 가운데 비어 있는 곳에 개인 의자가 놓여 있었고 거기에는 타이거가 구속된 상태로 앉아 있었다.

“서울 본사 대회의실은 주로 징계 회의를 할 때 열어.”

“아…….”

“때에 따라서 회의를 공개 참여할 수도 있고 비공개할 수도 있는데. 타이거는 비공개이긴 하지만 우리와 관련 있어서 볼 수 있는 모양이야.”

배연우가 말을 끝내자 뒤쪽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남운수가 생수병을 건넸다.

“병자 취급 좀 작작…… 하, 아니다 됐어.”

배연우는 한마디 하려다가 움찔 어깨를 숙이는 남운수를 보며 생수병을 말없이 가져갔다.

“회의 결과 발표하겠습니다.”

내부 회의를 끝낸 것인지 서울 협회장이 마이크를 켰다.

“멀티 몬스터와 교감이 되는 점을 고려해 타이거는 오늘부로 신설부인 미화부에 소속할 것을 명합니다. 미화부는 24시간 감시를 당할 것이고, 몬스터가 나타나는 즉시 출동해야 하는 부서입니다. 여태까지 저지른 범죄를 보면 무기 징역과 함께 한국에서 추방당해야 마땅하지만, 과거 끔찍한 실험의 피해자였던 점, 협회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응답받지 못한 점을 고려한 징계입니다. 멀티 몬스터를 모두 제거한 뒤 타이거는 협회에 남을지, 아니면 이곳을 떠날지. 의사 결정을 해 주면 됩니다.”

원신까지 합류한 여섯 명의 타이거는 결과에 승복하듯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해당 멀티 실험을 진행한 사람 중 유일한 생존자인 권수혁 협회장과 백우경 이사장은 해당 직위를 박탈. 징계 9호에 처합니다.”

징계 9호라는 말에 장내가 시끄러워졌다.

“징계 9호가 뭔가요?”

“무기한 가이딩 금지야. 약도, 직간접도 다 금지라 사실상 에스퍼에게는 사형이라는 소리지.”

“사형…….”

“해당 징계는 방사 가이딩도 차단하는 특수한 방에 가둬 놓거든. 타이거가 두 번째 회의였으니 아마 첫 번째 회의 때 이미 결론 났을 거 같네.”

“네? 그러고 보니까 호수 차장님이 안 보이네요.”

“……아마 백우경이랑 같이 있을 거야.”

배연우는 생수병을 만지작거렸다. 쉽게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반쯤 비운 생수통을 구겨 버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얼굴을 찡그린 배연우의 몸이 분노로 잘게 떨렸다. 배연우의 불안한 감정은 호은에게도 옮겨 갔다.

‘호수 차장님이 백우경 옆에 있다고? 도대체 왜?’

이상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호수가 죽었다가 살아났던 점도 이상했고, 백우경과 나란히 수갑을 채운 것도 이상했다. 호은의 얼굴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들어 갈 때였다.

“자유를 찾으러 간 거예요.”

“자유?”

“호수 차장님이 원하던 자유는 거기 있으니까요.”

“…….”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분이 원하던 결말일 테니.”

호은은 도인호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이상하게도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한 거짓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백우경과 수갑을 같이 찬 호수의 얼굴은 확실히 홀가분해 보였다. 꼭 모든 게 다 끝난 사람처럼.

“다 끝났네.”

회의는 끝이 났다. 구속된 타이거를 데리고 먼저 나간 감사부 직원들을 비롯해 차례대로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회의 내용은 마음에 들었나 모르겠네요.”

“아…… 안녕하세요. 협회장님.”

“그냥 편하게 강한나라 불러도 되는데.”

강한나는 잔뜩 긴장한 호은이 귀엽다는 듯 쳐다봤다.

“이번 공로에는 홍보부의 도움이 컸습니다. 타이거는 뭐…… 그렇다 치더라도. 백우경 이사장 건은 내가 협회장인 동안 잡을 수 있을지 몰랐거든요. 몇백 년 산 구미호 같은 남자라.”

강한나는 이제 고인 윗물을 정리할 수 있다며 감사를 표했다. 짧은 인사를 마친 그녀까지 회의실을 나가고 나자 회의실이 텅 비어 보였다. 적막이 주변을 감쌀 때 배연우는 습관처럼 담배를 찾다가 병원복을 입은 걸 떠올리고는 안쪽 볼을 씹었다.

“우리도 가자.”

“…….”

“인천 지사로.”

“하, 하지만 연우 너는.”

“입원은 인천 지사 의료 센터에서도 충분해. 집으로 돌아가자.”

새벽의 긴 전투가 꿈처럼 느껴졌다. 분명 많은 일이 있었는데 서울 본사는 처음 왔을 때와 같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섞여 있던 네 사람은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어 유난히 더 높고 광활해 보였다.

“자. 그리고 이거 선물이다.”

배연우는 작은 상자 두 개를 건넸다. 호은이 의아해하며 천천히 포장을 뜯었다.

“이제 더는 잡을 타이거도 없으니까. 위험 부서가 아니잖냐.”

남색 줄로 바뀐 사원증을 바라본 호은은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옆을 돌아보자 도인호 또한 검은색 줄로 된 사원증을 받았다.

“얼른 차 봐.”

배연우의 독촉에 가만히 있던 호은은 천천히 사원증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아직 바라만 보는 도인호에게 직접 사원증을 걸어 줬다.

“잘 어울리네.”

처음 만났을 때 사원증이 없던 도인호의 목에 검은색 사원증이 걸렸다. 호은은 떨리는 숨결을 참았다. 솔직히 최악의 회사다. 입사 첫날 유언장을 쓰게 만드는 것도 그렇고. 인권을 뭐라고 생각하는지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것부터 해서 단점을 뽑으라면 잠잘 틈도 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 사원증이 기쁜 건 눈앞의 남자 때문인 걸까.

그때 도인호의 따뜻한 손이 내 손에 닿았다. 호은은 크고 단단한 손에 깍지를 끼워 잡았다. 고개를 들어 도인호를 바라보니 그는 너무나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침에 뜬 태양처럼 눈부시고 따뜻한 모습에 호은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아휴. 홍보부에 마가 꼈어. 죄다 사내 연애야.”

뒤에서 들리는 탄식을 무시한 채 호은은 도인호의 넓은 가슴에 몸을 파묻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래. 살아 줘서 고맙다.”

그렇게나 듣고 싶었던 말을 내뱉은 도인호는 팔을 들어 호은의 등을 안았다. 포근한 냄새가 기분이 좋았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 그리고 돌아갈 존재.

“내 자유.”

목숨을 버려서 얻는 자유가 아닌, 지켜야만 얻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걸 도인호는 다시금 깨달았다.

서로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던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었다. 쉴 새 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섞여 들어갔다. 아직 모든 게 해결된 건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 잊고 웃기로 했다.

호은의 싱그러운 미소를 본 도인호는 기뻤다. 자신이 살아있어도 된다는 안도감. 그리고 이제 자신과 함께 나아갈 권호은이 있으니까.

진정한 자유가 이런 것이었을까.

하지만 다른 생각도 들었다. 호은과 함께라면 그것이 자유가 아닌 구속이 된다 하더라고 자신은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무미건조한 인생을 살던 자신에게 권호은은 단비 같은 존재다. 처음 느껴 보는 생기 가득한 설렘이 도인호의 얼굴 위로 활짝 피었다.

<끝.>

################################공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