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122화 (122/129)

122화.

제주 지사 에스퍼를 데려다준 다음 폴은 서울 이능력자 협회로 이동했다.

“폴 씨. 여기는 왜?”

“내일 되면 바쁠 겁니다. 감사부에 가서 조사도 받으셔야 하니까 진료는 미리 받으시는 게 낫겠죠.”

폴이 순간 이동한 곳은 다름 아닌 서울 본사에 있는 의료 센터였다. 처음에는 남운수가 의식이 깨어났다는 배연우를 보기 위해 폴에게 부탁한 건 줄 알았다. 그러나 호은과 도인호의 팔을 딱 붙잡고 로비까지 데려가는 폴을 보고 비단 남운수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하기야 계속 인호가 안고 다닐 수도 없고. 치료받고 나면 배연우 대리님 보러 가도 되나요?”

“내가 먼저 가, 가서 상태 보고…… 괜찮으면 부, 부를게요.”

아까부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던 남운수는 말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모양이다. 대화의 빈틈이 생기자마자 치고 들어온 남운수는 자긴 할 말 다했다며 배연우가 입원한 입원실로 서둘러 뛰어갔다.

“남운수 팀장님도 배연우 대리님을 직접 보는 건 일주일만이라 급하셨나 봐요.”

“일주일이요? 같이 있던 거 아닌가요?”

“아, 호은 씨는 모르시는구나. 지난번 현장이 끝나고 인사부는 홍보부와 협업했던 모든 자료를 백우경 이사장에게 넘겨주고, 홍보부는 병원에 치료 중인 배연우 대리님을 제외하고 각자 숙소에 격리당했습니다.”

“아…….”

그래서 일주일이나 늦게 구하러 온 거였구나. 호은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우경이 도인호를 이용해 타이거를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아까 한 대 때려 줄 걸 그랬나 후회가 됐다.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폴은 시계를 한번 쳐다보고는 하품을 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해가 뜰 시간이었다. 감사부 때문에 연차도 쓰지 못하는 현실이 잔인하기만 하다며 폴은 로비를 나갔다.

“응급 센터로 가죠.”

“어? 아니 그 정도는 아닌데.”

“어차피 지금 이 시각에는 응급 센터밖에 운영 안 해요.”

의자에 앉은 호은은 도인호가 접수하러 가고 나서야 몸에 긴장이 풀렸다. 왼쪽 발목은 오른쪽과 비교해 거의 두 세배는 부어 있었다. 어쩐지 도인호가 유난 떨어 가며 안는다고 했더니 그럴 만했다.

“마침 당직이던 치유계 에스퍼가 있다고 하네요.”

“다행이다. 슬슬 고통 올라오던 참이었거든. 아, 인호 너도 독 완전히 해독된 거 맞는지 확인해야지. 출혈이 심하던데.”

얼굴의 핏자국을 지우긴 했으나 도인호의 상의 전체를 적신 피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호은은 새하얀 와이셔츠가 피로 얼룩진 걸 곁눈질했다.

“도인호 에스퍼님, 권호은 가이드님. 들어와 주시기 바랍니다.”

응급 센터로 들어가는 자동문에서 나온 간호사가 두 사람을 호명했다.

바닥에 다리를 굽힌 도인호는 팔을 벌렸다. 노란색 눈동자에 자기 얼굴이 비치는 걸 보며 호은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렇게 해야만 눈물을 참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도인호도 권호은도 무사하다는 게. 호은은 부끄러움도 잊고 도인호의 품에 달려들었다. 맡고 있으면 편안해지는 향기와 차갑게 얼은 몸을 녹여 주는 체온이 오늘따라 더 반가웠다.

“구하러 와 줘서 고마워.”

도인호의 목에 얼굴을 묻은 호은이 울지 않기 위해 음절 하나하나 끊어가며 문장을 간신히 만들었다.

“저도요.”

도인호는 커다란 손을 들어 호은의 뒤통수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이상하게 오늘은 가이딩이 아닌 다른 뭔가가 마음 깊숙한 곳부터 채워졌다. 이 감정은 뭘까. 무슨 만족감일까.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손이 목덜미부터 시작해 잇자국이 난 어깨에 닿았다.

“형 이제 도망 못 가요.”

“……으응?”

“각인했으니까.”

코끝이 찡한 걸 애써 참고 있던 호은은 도인호의 말에 뒤늦게 고개를 퍼뜩 들었다. 각인을 한 건 어디까지나 도인호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였다. 독으로도 뚫리지 않는 가이딩이 각인이라도 하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모험이었다.

긴박한 상황이다 보니 제정신이 아닌 도인호를 살리려다 이번에는 입술도 아닌 각인을 가져가 버렸다. 호은은 손을 들어 어깨를 가렸다.

도인호는 잇자국을 가린 손을 가만히 쳐다보다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각인이라는 건 무를 수 없어요.”

“아니 이건…….”

“무를 생각도 없고요.”

호은의 손을 부드럽게 쥔 도인호는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각인하면 평생을 나랑 있어야 하잖아.”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는데요.”

“뭐, 뭐?”

“형, 저한테 각인 왜 했어요. 정말 폭주를 막으려던 게 다예요?”

“……그게 무슨.”

“목숨을 걸 정도로 날 좋아한 건 아니고……?”

“……!”

화산 폭발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목부터 머리 위까지 차오른 열기에 정수리에서 김이 나올 기세였다. 도인호에게 사로잡힌 시선은 감히 얼굴을 돌리거나 하는 생각도 들지 못하게 했다. 꼼짝없이 붙잡혀 버렸다. 호은의 입술이 바짝 메말라 갔다.

“날마다 울었잖아요. 내가 보고 싶다고. 날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니었어요?”

“…….”

“아니어도. 그냥…… 그냥, 내 옆에 있어 주면 안 될까요.”

투명한 눈물이 도인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는 도인호의 속눈썹이 움직일 때마다 눈물방울을 만들어냈다.

“형……, 호은 형…….”

입을 열지 않는 호은을 재촉하듯 도인호가 애달프게 이름을 불렀다. 마음 한구석이 콕콕 찔러 왔다. 무슨 말을 내뱉어도 그게 도인호를 붙잡는 족쇄가 될 거 같았다.

“놀라지 않았어? 각인되어 있어서…….”

“기뻤어요.”

“…….”

“형이 각인에 실패하고 나랑 같이 폭주 속에 죽었어도…… 난 기뻤을 거예요.”

도인호의 눈동자가 촉촉했다. 호은은 손을 들어 눈 주위를 매만졌다.

“죽어서도 함께인 거니까.”

도인호의 진심은 과격하고 섬뜩하고 또 평범하지 않았다. 하지만 호은은 이상하게 무섭지 않았다. 오직 도인호만 할 수 있는 표현이다. 오랜 시간 삶의 의지를 잃고 죽음만 바라보던 남자가 하는 고백.

“이제 정말 평생 책임져야겠네.”

머릿속은 여전히 실타래가 엉켜 엉망이었다. 하지만 호은은 이것을 풀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크흠, 치유계 에스퍼님이 기다리십니다.”

자동문이 열리는 버튼을 계속해서 누르고 있던 간호사가 눈치를 주듯 기침했다.

“아, 네!”

순간 간호사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까먹은 호은이 서둘러 도인호와 떨어졌다. 그러나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누가 봐도 방금 고백받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

“대리님!”

치료를 끝낸 도인호와 호은이 배연우가 입원한 병실로 깜짝 방문했다.

“권호은, 무사했냐.”

간이침대에 앉아 있던 남운수는 눈치껏 배연우의 침대 각도를 조절했다. 덕분에 앉은 자세로 두 사람을 맞이하는 배연우였다.

“남운수한테 들었어. 타이거 전부 잡았다면서.”

“잡았다고 해야 할까요……. 본인들이 스스로 선택했다는 게 더 맞는 거 같네요.”

“하필 내가 입원해 있을 때 이런 실적을 내다니.”

배연우는 자신이 나서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배연우가 놀랄까 봐 남운수는 호은이 납치됐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고 남은 홍보부끼리 타이거 아지트를 처리했다고 둘러댄 상태였다.

“대리님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걸 그랬어요.”

병실에 들어오기 전 남운수에게 해당 내용을 들은 호은은 적당히 대답하며 배연우를 끌어안았다.

“뭐야! 왜 이래?”

“무사히 깨어나서 다행이에요.”

쑥스러운 듯 호은의 머리를 밀치던 배연우도 결국에는 호은의 어깨를 토닥여 줬다.

“너라면 잘할 줄 알았어.”

머리 위로 들리는 배연우의 목소리에 호은이 엉거주춤 몸을 뒤로 뺐다.

“너 머리 살짝 맛이 갔잖아. 가이드도 평화, 에스퍼도 평화. 골 때렸지. 근데 그런 놈들이 뭐든 한 건 하더라.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전 좋은 쪽이죠?”

“그래 인마.”

호은의 볼을 손으로 툭툭 건든 배연우의 입술은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대리님도 많이 피곤하실 겁니다. 저희도 그만 가죠.”

호은의 어깨에 손을 두른 도인호는 천천히 두 사람을 떼어 놨다.

“그, 그래. 연우도 안, 안정 필요하고.”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어 보이는 배연우의 침대 높이를 조정한 남운수였다. 어색하게 손짓하며 얼른 쾌유하라고 말한 호은은 도인호에게 이끌리다시피 하며 병원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서울 협회에 제공된 임시 숙소로 들어갔다. 수갑을 차고 있던 손목의 상처도 주삿바늘 자국도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발목도 멀쩡해진 호은의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씻고 나오자마자 푹신한 침대에 누운 호은의 옆으로 도인호가 자연스럽게 파고들었다.

“자기 싫다.”

“……왜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어서.”

도인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호은은 일정한 박동으로 뛰는 심장 소리를 감상했다.

“세상이 달라질 거 같아.”

타이거는 어떤 처분을 받게 될까. 멀티 몬스터는 언제 나타나 사람들을 공격할까. 호수 차장님과 백우경은 왜 같이 수갑을 차고 있던 걸까. 그리고…… 김세희는.

호은은 내일 일어날 일에 대해 걱정이 되면서도 눈이 감겨왔다. 치료를 받고 고백도 받고 마음이 들뜨면서도 몸은 피곤했다.

작게 뒤척이며 쉽게 잠들지 못하는 호은을 바라보던 도인호는 그를 살며시 안아주었다.

반쯤 감긴 눈도 도인호의 눈엔 그저 사랑스럽기만 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상관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볍게 호은의 눈에 키스를 해주었다. 충동적인 행동이었지만 호은은 크게 놀라는 모습은 아니었다. 슬며시 미소지은 도인호는 자장가를 불러주듯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자요.”

호은에겐 기분 좋은 키스였다. 마치 마법과도 같이 고민이 싹 사라졌다. 도인호가 가볍게 가슴팍을 두들겨 주니 이제 편히 잠들 수 있을 거 같았다.

무겁게 깜빡이던 호은의 두 눈이 굳게 닫혔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익숙한 품에 깊은 안도감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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