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쳇. 짜증 나.”
반설아의 혼잣말에 도인호는 회상을 멈췄다. 그녀는 월랑의 품에 안긴 상태로 기분 나쁜 티를 내고 있었다. 한여름의 결정이 도무지 이해 가지 않는 듯 보였다.
하지만 한여름은 타이거의 보스였다.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결정이래도 그녀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칫. 잇새로 욕을 내뱉은 반설아와 반대로 월랑은 감격하고 있었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손뼉을 칠 것처럼 열렬하게 호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따가운 시선이 호은의 뺨에 맹렬하게 닿았다.
시선을 피하고자 손을 들어 도인호의 팔뚝을 잡자 단단한 팔이 호은의 허리를 받쳐 줬다. 훅 가까워진 도인호 덕에 끈질긴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호은이었다. 월랑의 눈빛은 그렇다 치더라도 반설아의 살기 가득한 눈빛을 계속 받고 있다가는 수명이 줄어들 게 분명했다.
‘본인 보스한테 뭐라 하지. 왜 나한테 그러는 거야.’
한여름과 나란히 같은 편에 서 있는 게 당황스러운 건 호은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의미한 살생은 그만하라고 말리긴 했으나 한여름이 이렇게까지 도와줄 줄은 몰랐다.
호은은 조금 전 일을 회상했다. 건물이 무너지고 도인호를 간신히 부축해 나가려던 참이었다. 월랑이 만든 나비 떼가 호은과 도인호를 감쌌다.
숲속에 도착한 네 사람은 풀 위로 털썩 앉았다.
‘해독제야.’
한여름은 나무에 기대앉은 채 알약을 건넸다. 갑자기 바뀐 한여름의 태도가 의아하긴 했으나 호은은 알약을 받아 도인호에게 먹였다. 각인한 덕인지 자가 치유 속도가 조금씩 회복되는 도인호였으나 몸에 있는 독을 해독하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렇게 너무 경계하지 마.’
정신을 차린 도인호가 손에 불을 만들어내는 걸 본 한여름이 입을 열었다.
‘갱생까지는 모르겠고. 세상만 탓하지는 않으려고.’
한여름은 폐허가 되어 버린 자신의 아지트를 바라봤다. 위대한 계획의 상징이었던 아지트는 허무할 만큼 쉽게 무너졌다. 그것이 꼭 잘못된 자신의 미래를 본 것만 같았다.
‘멀티 몬스터가 있는 방은 워프 이능력품으로 만든 방이야. 녀석들은 시공간을 부유하다가 차례대로 각 지역에 소환될 거야.’
호은은 무너진 건물 속 멀티 몬스터 시체가 적었던 걸 떠올렸다. 건물이 무너지면서 방에서 튕겨 나간 녀석들만 죽고 나머지는 아직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원래는 그 녀석들이 비능력자를 괴롭히게 놔두려고 했는데.’
한여름은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젖혔다.
‘책임지고 다 없앨게. 그래. 내가 원하는 정의는 우리를 가엾게 여기고 우리 존재를 인정시켜 주는 거였어. 그건 사람들이 죽는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겠지.’
고개를 내린 한여름은 호은의 말간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내가 당한 걸 사람들이 똑같이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버림받아야만 우리의 슬픔을 공감할 수 있다고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하다간 일반인에게 폐기 처분해야 한다는 소리 나 듣고 말겠지.’
한여름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말을 뱉었다 멈췄다 반복하는 걸 보니 머릿속에 생각이 정돈되지 않은 듯했다. 호은은 가만히 기다렸다.
‘더는 미움받고 싶지 않아. 내가 제대로 한다면…….’
한여름의 눈동자에는 도인호가 담겨 있었다. 호은의 옆에 있는 그가 부러웠다. 자신과 분명 비슷한 상황을 겪었을 텐데. 어째서 호은은 자신이 아닌 도인호를 선택한 걸까. 더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은 과거에 얽매있고, 도인호는 과거의 늪에서 벗어났다.
‘월랑. 애들한테 전해. 난 이 녀석들과 함께 협회에 간다. 목숨을 구걸했는데. 멀티 몬스터 회수 정도는 도와야겠지. 나머지는 여길 떠나라고 전해.’
‘그럴 필요 없어.’
언제부터 있던 건지 커다란 나뭇가지 위로 반설아와 율 형제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대화 내용을 엿듣기라도 한 건지 같이 협회에 따라가겠다 말했다.
‘원신도 찾아야 하고. 그리고 잊었어? 우리는 하나라고. 보스 혼자 그딴 곳에 보낼 리 없잖아.’
최선율의 말에 선악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운수와의 싸움이 고전이었는지 둘 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한여름은 그런 둘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가면 타이거로 했던 일에 대한 죄를 물을 수도 있어. 운이 안 좋으면 징역 당한 채 생을 마감할 수도 있고.’
율 형제를 말리듯 한여름이 말하고 있을 때 반설아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우리가 고통받는 게 싫으면 여기 남든가!’
그녀는 한여름이 이런 선택을 한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아 보였다. 남들이 타이거를 악당으로 생각하든 말든 그녀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실험체로 태어나 버림받고 커다란 세상에 던져져 자리를 잡을 때까지 힘들었던 그 순간들.
타이거는 타이거만 생각하면 됐다. 오랜 염원인 백우경을 사회에 끌어다 심판받게 만들고, 자신들이 괴로워하는 동안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던 사람들에게 끔찍한 일상을 선사하는 게 진정한 복수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떳떳하게 히어로 취급받는 에스퍼가 부러웠어.’
‘뭐?’
‘멀티라는 존재를 세상에 밝히지 않고 없애 버린 백우경이 증오스러웠던 거고.’
‘…….’
‘난 협회에 가야겠어.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하든 떳떳하게 내 존재를 알리고 싶어.’
반설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분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울다가 결론을 내린 건지 떠나지 않고 한여름 옆을 지켜 섰다.
분위기가 정돈되고 어느 정도 회복을 끝낸 도인호는 텔레파시 에스퍼에게 내용은 전달했다. 뒤쪽 숲에서 대기하던 남운수와 폴이 두 사람을 데려가기 위해 이곳에 왔다가, 타이거를 발견하고 싸우려는 것을 막는 해프닝이 일어났었다.
“차장님…….”
호은은 회상을 멈추며 호수를 쳐다봤다. 정확히는 호수와 백우경이 나란히 찬 수갑에 시선을 건넸다. 호수는 왜 수갑을 차고 있는 걸까? 그리고 분명 죽었다고 했는데. 피로 뒤덮인 옷도 깨끗하고 이상했다. 호수에게 달려가 질문할 게 많았으나 위쪽에 뜬 헬기에 모두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누가 부른 거예요?”
호은의 질문에 폴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접니다. 제가 다 데려가지는 못하니까요. 그리고 감사부가 데려가야 할 사람들도 있으니 말입니다.”
“감사부요?”
헬기는 무너진 건물과 떨어진 공터에 착륙했다.
또각, 또각.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눈부신 조명이 켜진 헬기 탓에 사람들은 모두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저분은 대체?”
“서울 본사 협회장님입니다.”
검은색 머리카락에는 새치가 보일 정도로 흰머리가 많았다. 그러나 이상하기는커녕 오히려 일부러 염색을 안 한 것처럼 매력적으로 보였다. 폼이 여유 있는 재킷과 통이 큰 바지가 바람과 함께 펄럭였다.
“재미있는 풍경이네요.”
중후한 목소리는 어딘가 범접할 수 없는 무게감이 있었다. 그녀가 손짓하자 헬기에 타고 있던 직원 두 명이 따라 내렸다. 한 명은 백우경과 호수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 그들을 연행했고 다른 한 명은 타이거에게 가 이능력구를 하나씩 채우기 시작했다.
“폴 씨. 설명 좀 해 주세요! 저분들은 갑자기 왜 나타나서…….”
“호수 차장님이 제게 따로 내린 지시입니다. 서울 본사에 연락해 협회장님에게 좌표를 찍어 주라고 했습니다.”
“네?”
“감사부는 가장 먼저 범죄자와 대면하는 부서입니다. 타이거도 호수 차장님도……. 협회 규율상 감사부에 연행되셔야 하는 거죠.”
여자는 호수 쪽에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호수는 이제야 모든 걸 내려놓은 듯 한결 편안해진 상태로 헬기에 탑승했다.
“고생했어요. 폴, 그리고 홍보부?”
“아, 안녕하세요. 협회장님…….”
“강한나라고 해요. 호수 차장이 그쪽한테 받을 게 있다고 하던데.”
호은은 주머니에서 USB와 실험관을 건넸다. 그녀는 실험관 통에 갇힌 작은 멀티 몬스터를 살펴보고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기괴하게 생겼네요. 그쪽 작품인가요?”
강한나는 이능력구를 찬 한여름을 바라봤다.
“그런데?”
“나머지는 어디 있나요.”
“시공간을 떠돌고 있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몰라. 혼란을 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라서 말이야.”
“그런 것 치고는 순순히 잡히네요.”
“원하는 목적이 있어서 말이야.”
“협회장님. 다 채웠습니다.”
타이거는 얌전히 이능력구를 찼다. 그들은 어떤 유대감으로 한여름을 따르고 있는 걸까. 오랜 시간을 공들여 준비했던 복수를 포기할 정도로 한여름이 소중한 사람인 건가.
“권호은.”
감사부에 끌려가던 한여름이 호은의 앞에 멈춰 섰다.
“넌 네가 히어로가 아니라고 했지만. 역시 넌 히어로가 맞는 거 같아.”
“……어?”
“날 죽이지 않고도 막았잖아.”
“아니, 그건 네가 정한…….”
“네가 내 마음을 돌려놨어. 다시 제대로 시작하면 넌 날 선택할 수 있을까……. 기다릴게. 한 명이랑 노는 건 지루하잖아? 저 녀석이 질리면 언제든 내게 오라고.”
한여름의 잡담이 길어지자 감사부는 한여름의 팔을 잡아채 독촉했다. 짜증 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한여름을 말리듯 호은이 다가갔다.
“다음에 협회에서 보자.”
“그러네. 이제 협회에서 볼 수 있는 사이인가.”
한여름은 픽 웃더니 잡힌 팔을 뿌리치고 호은에게 다가가 볼에 입을 맞췄다.
“저 새끼가…….”
욕설을 내뱉는 도인호를 바라보며 혀를 내민 한여름은 감사부에 다시 잡혀 헬기에 탑승했다.
“다음에도 볼 필요 없습니다. 저런 놈은.”
“질투야?”
호은이 장난스럽게 웃자 도인호는 얼굴을 붉혔다. 이걸 보기 위해 참았던 건가…….
한여름과 싸웠을 때 이능력 핵을 찌를 기회는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호은의 얼굴이 떠올라 제대로 끝내지 못했다. 타이거 보스인 한여름과의 전투에서 폭주 고비까지 오자 후회가 짙게 남았으나, 이리도 환하게 웃는 호은의 얼굴을 바라보니 잘한 선택인 거 같았다.
“저 아직 상태 안 좋아요…….”
한여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호은은 도인호의 말에 금세 걱정에 물든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짜? 어디.”
“여기요…… 가이딩이 부족한 거 같은데.”
도인호는 다리를 굽혀 시선을 낮춘 다음 자신의 왼쪽 볼을 손으로 콕 찔렀다.
“참 나. 어린애도 아니고 질투쟁이네.”
못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은 호은은 도인호의 목에 팔을 걸고는 뺨에다 키스해 주었다.
“으앗!”
호은의 다리가 땅에서 떨어졌다.
“이제 힘 생겼어요.”
다리가 불편한 호은을 가뿐히 안은 도인호는 폴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희도 슬슬 돌아갈까요. 치유계 에스퍼도 만나야 하고. 할 일이 많은데.”
“와아. 대박이다가 아니라. 네, 가죠.”
폴은 도인호의 행동에 턱이 빠질 뻔했다. 자신은 그저 호수가 급하게 도와 달라는 말에 해당 현장에 온 게 다였다. 정확한 내용 전달도 못 받고 “나 죽을 거 같은데. 서울 협회장한테 내 이름 들먹이고 여기로 오라 말해라.”라는 정말 불친절한 지시를 따른 죄밖에 없는데 저런 연애질하는 모습까지 봐야 한단 말인가?
“저, 저도 빨리 돌아가야 합니다. 여, 연우가 기다려서.”
“깜짝아!!”
있는지도 모를 만큼 존재감이 없던 남운수가 튀어나왔다. 그가 내뱉은 말을 들은 폴은 갑자기 이유 모를 서러움이 올라왔다.
“가자고요. 저도 숙소에 사랑하는 겟플릭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드라마 봐야 해요.”
폴은 남은 인원을 데리고 순간 이동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