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폐건물이 되어 버린 아지트는 음산한 기운이 흘렀다. 호수는 가이드 워치를 조용히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시체는.”
“나도 방금 온 거라 아직 확인 못 했는데.”
호수의 손목을 낚아챈 백우경은 자기보다 한 뼘 작은 호수를 품에 안았다.
“하아. 제대로 따듯해졌네.”
“놔.”
“왜 항상 내 말을 안 듣는 거야? 차장님이 원하는 건 다 해 준 거 같은데.”
호수는 손을 들어 백우경의 가슴을 밀쳤다.
“내가 원하는 거? 지랄하고 있네. 네 눈에는 이게 보이지 않는 거냐.”
“아…… 저거.”
호수가 쳐다보고 있는 건 죽어 가고 있는 멀티 몬스터였다. 녹아내린 진흙이 애처롭게 움직이고 있었으나 곧 죽을 거 같았다.
“네가 원하는 대로 옆에 있어 줄 테니 가이드 인권을 올려 달라고 부탁했었지.”
천장이 날아간 건물의 위쪽으로 보이는 밤하늘은 별이 빼곡했다.
“근데 그러면 안 됐었어. 에스퍼 주제에 가이드 공단 이사장을 맡아서 이런 끔찍한 일이나 하고 말이야.”
“내 덕에 가이드가 갑질하는 사회를 만들어 준 거 같은데. 그리고 그걸 누구보다 좋아한 건 차장님이고.”
백우경의 말에 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한다. 백우경이 이사장을 단 뒤로 가이드와 에스퍼의 갑을 관계는 단숨에 바뀌긴 했다. 적어도 에스퍼를 구하기 위해 목숨 바치는 가이드는 사라졌으니 말이다.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 아~ 설마 내가 도인호 죽여서 그래요? 하하. 뭐라 했더라. 도인호로 날 죽인다 했었나. 화 풀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결정체 이식자 한 명이 안 나오겠어?”
호수는 무심한 얼굴로 백우경을 바라봤다. 어린아이 달래듯 방법을 제시하며 괜찮다고 타이르는 백우경이 웃길 뿐이었다.
“그래. 확실히 도인호한테 이능력품 받을 게 있었지. 그걸로 널 죽이려고 했고.”
“귀여워. 아직도 날 죽일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게.”
“착각일지 아닐진 두고 봐야지. 이능력품으로만 죽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백우경은 호수의 모진 말에도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눈을 반으로 곱게 접으며 미소를 흘렸다.
여우가 꼬리를 살랑거리는 것과 비슷한 모습에도 호수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익숙한 듯 자신에게 달라붙는 백우경과 떨어진 호수는 서서히 걸어 나갔다.
“백우경. 우린 너무 오래 해 먹었어.”
문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공간은 벽이 뻥 뚫려 숲이 보였으나 나가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래서 어디까지가 선이고 어디까지가 악인지 구분 못 하는 지경이 된 거겠지.”
잔디를 먼저 밟은 호수는 뒤를 돌아 손을 내밀었다.
“에스퍼와 가이드 몇 명이 죽는 것쯤은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 그런 괴물이 된 거야.”
호수가 내민 손을 잡기 위해 손을 뻗던 백우경은 닿기 직전 멈춰 버렸다. 숲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 네 시가 넘어가는 시점에서 숲을 돌아다닐 사람은 없을 텐데.
“가자.”
허공에 멈춘 백우경의 손을 맞잡은 호수가 그를 건물에서 빠져나오게 했다. 그날 이후로 처음이다. 호수가 자신에게 먼저 손을 내민 건. 분명 가슴이 뜨거울 만큼 두근거려야 하는 일인데 어쩐지 심장이 싸늘해져 가는 백우경이었다.
“이제 다 끝났어.”
어딘가 개운해 보이기도 하면서 또 쓸쓸해 보이는 호수의 뒷모습을 지켜본 백우경은 숲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집중했다. 한두 명이 아닌 건지 여러 발소리가 모여 어두웠던 숲을 헤치고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
호수의 옆에 서 있던 백우경의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명 해치웠다고 생각한 녀석들이 꼭 지옥에서 돌아온 것처럼 살아 있었다. 이제는 얼굴을 숨길 필요도 없건만 전통 탈을 쓴 타이거가 어둠에서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
호수의 옆모습을 흘끗거린 백우경은 그 또한 타이거의 존재에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떻게 살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으로 죽는 걸 직접 보는 게 낫겠네. 그렇죠 차장님?”
백우경은 품에서 권총을 꺼냈다. 장전하기 위해 탄창을 확인한 그는 딱 다섯 발이 들어 있는 걸 본 다음 총을 앞으로 내밀었다.
총구는 왼쪽부터 한 명씩 가리켰다. 월랑의 품에 안겨 있는 반설아. 서로 부축하고 있는 율 형제. 마지막으로 타이거의 보스인 한여름.
“안녕.”
전통 탈을 들어 바닥에 던진 한여름은 짧고 예의 없는 인사를 던졌다. 백우경은 인사를 받아 주는 대신 한여름과 반설아의 심장 쪽 상처를 관찰했다.
“사람이 지킬 게 생기면 마음이 여려지나 봐.”
철컥, 장전을 완료한 백우경은 이미 죽고 없을 도인호를 떠올렸다.
“예전의 도인호라면 망설이지 않고 심장을 뚫어 버렸을 텐데. 가이드한테 혼날까 봐 저렇게 해 놨나 봐요. 귀찮게.”
방아쇠에 손을 걸친 백우경은 시답잖은 대화를 건넸다. 물론 호수에게서 답은 들리지 않았다. 백우경은 한여름의 가슴팍에 총구를 조준했다.
“그 몸으로 왜 내 눈앞에 나타났는지 궁금하네. 아, 원신 때문인가? 가족애가 대단하다. 같은 실험체 출신이라 그런지.”
백우경은 총구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툭툭 건드렸다. 깔끔하게 끝내지 못한 현장에 짜증이 올라왔다. 타이거와 도인호를 한 번에 보내려던 계획이 처참히 실패했다.
과거의 도인호는 어떤 명령이든 정확하고 완벽하게 수행했다. 에스퍼를 죽이는 것도 일반인을 죽이는 것도. 마치 감정 없는 완벽한 살생 도구였다. 죽지만 않았더라면 다시 명령해 저들을 완벽하게 끝내라 명령했을 거다. 그립감이 좋았던 도구를 잃어버린 것처럼 아쉬움이 들긴 했으나 어차피 버릴 때가 다 된 도구였다. 백우경이 아쉬움을 뒤로하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이었다.
“내가 말했지.”
손으로 총을 잡은 호수가 숲 안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널 죽일 거라고.”
백우경은 눈썹 한쪽을 위로 치켜들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내뱉는 인사치레와 같은 말이다. 안 들으면 허전한 지경까지 온 살인 예고가 오늘은 사뭇 다르게 들렸다.
“네가 이능력을 쓰지 못하게 묵사발로 만들 거다.”
“내가 이능력을 못 쓰면 차장님 또한 바로 죽는 거 알잖아요.”
“몇 번을 말해.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거라고.”
스윽, 스윽. 일반적인 걷는 소리가 아닌 뭔가를 저는 듯한 소리가 숲속에서 들렸다. 도대체 저 안에 몇 명이나 숨어 있던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사장님…….”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나타난 것은 폭주를 막지 못해 도인호와 같이 죽었어야 할 권호은이었다.
“당신이 선택한 미끼에 잡히셨네요.”
공기의 흐름은 호은의 등장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새벽이라 불어오는 바람이 차가워야 할 만한데도 이상하게 뜨거웠다. 백우경은 호은의 뒤에서 나오는 도인호를 보고 바람이 왜 이리 뜨거운지 알 수 있었다.
“살아 있었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장난기가 묻어 있던 백우경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해졌다. 도인호는 대답 대신 호은의 어깨와 목 사이로 입술을 문질렀다. 꼭 영역 표시를 하는 듯한 짐승 같은 모습이었다.
호은의 드러난 어깨에 도인호의 잇자국이 난 것을 확인한 백우경은 고개를 아래로 젖혔다. 속 깊은 곳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지만 아직은 뱉으면 안 될 거 같았다.
“차장님…….”
호수에게 시선을 옮긴 호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갈색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물기가 차올라 눈물을 떨어트릴 거 같았다. 죽은 줄 알았던 호수가 멀쩡한 걸 보니 도대체 무슨 거짓말을 한 거냐며 화를 내고 싶다가도, 살아 있는 호수의 모습에 안심이 되었다.
“권호은, 고생했다.”
호수는 가만히 있는 백우경의 총을 뺏어 바닥에 던졌다.
“네가 홍보부를 격리시켰을 때 눈치챘어.”
“…….”
“아. 이놈이 또다시 도인호를 폭주 상태로 만들어 뭔가 없애려고 하는구나. 넌 내가 권호은은 구출하기 위해 도인호를 빼낼 걸 예상했으니까 말이야.”
언제부터 계획했던 건지 모를 만큼 백우경은 치밀하게 이번 일을 준비했다. 타이거가 어떤 실험을 준비하는지 알았으며 무엇을 필요한지 또한 알았다. 그는 제주 지사를 통해 가이드 혈액으로 가이딩 약을 만들게끔 판을 만들었고, 타이거는 해당 약에 대해 알게 되었다.
처음부터 백우경은 도인호로 타이거를 없애고 그들이 완료한 실험 데이터만 빼낼 작전이었을 거다.
하지만 상황은 역전됐다. 타이거와 도인호는 살아 있고, 백우경이 협회에서 큰 논란이 됐던 멀티 실험의 배후자라는 증거를 수집했다. 거기다 앞에 있는 타이거.
녀석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호수는 직감적으로 그들이 자신과 한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솔직히 멀티 몬스터를 가지고 협회를 따로 공격할 거 같았던 놈들이 이제 와 무슨 일을 저지를지는 모르겠지만. 도망치지 않고 이곳에 남아 있는 걸 보니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백우경과의 결판을 내려는 거 같았다.
호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백우경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사장이어도 이건 못 빠져나갈 거야.”
철컥, 호수는 특수 제작한 수갑을 백우경의 손과 자기 손에 직접 채웠다. 이능력품인 해당 수갑은 24시간 동안은 절대 풀지 못하는 구조였다. 만약 시간을 어기고 수갑을 푸는 순간 이능력구의 기능처럼 이능력을 못 쓰게 한다.
백우경은 왼손에 찬 수갑을 한번 내려다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큭.”
앞에는 참 많은 사람이 있었다. 타이거부터 시작해 도인호와 권호은. 남운수와 그를 데려와 준 폴. 그리고 제주 지사에서 데려온 에스퍼 두 명까지.
“크하핫, 하하하. 제대로 한 방 먹었네요.”
백우경이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토해 냈다. 회색빛이 도는 은발의 머리카락이 백우경의 몸짓에 따라 흔들렸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맑은 바다처럼 청량해 보이던 푸른 눈동자가 꼭 태풍 오기 전 바다처럼 일렁거렸다.
“이사장님. 당신이 저지른 끔찍한 실험에 대한 증거는 여기 전부 담겨 있어요. 그리고 타이거도 이번 일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걸 협회에 가서 똑똑히 말한다 했고요.”
“그쪽과 같은 사람이 되기는 싫어서 말이야.”
도인호는 갑자기 태도를 고쳐먹은 한여름이 낯설었다. 자신이 정신을 잃은 순간 호은과 한여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기억이 나는 부분은 호은의 어깻죽지를 깨물던 시점부터다.
정신을 차렸을 땐 몸 전체가 뜨거웠다. 뜨거운 열기가 몸 밖으로 나가고 싶어 날뛰고 있을 때 어렴풋이 호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천둥이 치는 듯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고 마침내 눈을 뜨자 우산을 펼친 듯한 푸른 불꽃이 호은의 반지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 허락 없이는 폭주하지 마.’
자신이 정신 차린 것을 눈치챈 호은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몸이 이상했다. 항상 부족했던 가이딩이 안정된 게 느껴졌다.
‘어째서…….’
안개가 낀 것만 같은 머리는 제대로 상황판단을 하지 못했다. 도망치라고 했는데 어째서 호은이 품에 안겨 있는 걸까. 어째서 꼭 서로의 마음이 연결된 것만 같을까. 몽롱한 시선을 올려 호은을 바라봤었다.
불꽃으로 만든 우산이 폭죽이 터지듯 크게 빛났다가 사라졌다. 이제 두 사람에게 우산은 필요 없었다. 서로를 제외하고는 그 무엇도 그들에게 닿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