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한여름은 아수라장이 된 방을 천천히 훑었다. 심장 근처에 구멍이 뚫린 반설아와 그녀를 부축하고 있는 월랑. 그리고 도인호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는 호은까지 확인한 한여름은 상황 파악을 끝냈다는 듯 도인호를 쳐다봤다.
“내가 실수했어. 내 이능력으로만 수갑이 풀리게 제작했는데.”
“…….”
“생각보다 호은이가 똑똑했네. 운이 좋았던 건가.”
한여름의 시선을 따라간 도인호는 호은의 차고 있는 줄이 끊긴 수갑에 닿았다.
“잠깐 침대에 내려놓는 게 어때. 독성 물질 들이마신 거 해독할 시간도 줄 겸.”
“…….”
“네놈이군. 호은 형 상처 입힌 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도인호는 호은을 침대에 눕혔다. 언젠가 꺼낸 적이 있는 도깨비불을 꺼내 호은의 옆을 지키게 만들고 나서야 도인호는 몸을 움직였다.
“걱정하지 마. 나도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다치게 하는 건 가능하단 소리군.”
몸 안에 가이딩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도인호는 이능력을 억제할 수 없었다. 이건 분노였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망가트린 사람에 대한 분노. 저 말갛게 웃는 얼굴을 고통스럽게 짓뭉개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거 같았다.
“내가 알려 줄게. 감히 네가 누굴 건드렸는지.”
날렵하게 검을 휘두른 도인호는 눈으로 좇을 수도 없는 스피드로 한여름에게 다가가 그의 오른팔을 베어 버렸다.
“어라?”
바닥에 떨어진 한여름의 팔을 도인호가 발로 짓밟았다.
“이딴 더러운 손으로는 저 사람을 티끌 하나 건드렸으면 안 됐어.”
“성격이 좀 급하다. 말할 시간은 줘야지.”
도인호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가까워진 거리에 한여름이 뒤로 물러나자 검을 더 힘껏 휘둘렀다. 반달 모양의 화염이 한여름의 뺨과 입술을 스쳐 지나갔다.
“쓰레기 같은 말을 지껄일 거면 혀는 필요 없지 않나.”
세 번째 공격은 망설임 없이 심장으로 향했다. 일직선으로 뻗어 오는 공격을 한여름은 어느새 재생한 손으로 막았다.
“너무 저돌적이야~ 왜? 지난번처럼 폭주라도 터질 거 같아서 그런가.”
일부러 혀를 내밀며 도인호를 조롱한 한여름은 검을 잡은 손을 힘을 준 채 발을 들어 도인호의 턱을 가격했다.
“얼마나 남았어? 호은이라도 깨워서 가이딩해 달라고 하지 그래.”
“…….”
“아. 아니면 호은이 혈액으로 만든 가이딩 약이라도 줄까? 생각보다 효과가…….”
한여름의 발차기에 주춤 뒤로 물러간 도인호는 마지막 문장을 완성하기도 전에 돌진했다. 손에 돋아난 핏줄은 그가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지를 보여 줬다. 검을 감싸고 있는 불꽃에 살기가 만연했다.
“널 죽이면 형이 슬퍼하겠지.”
도인호의 서늘한 목소리는 지나치게 냉랭했다. 그러나 도인호의 검에서 나오는 열기만큼은 방 안을 후덥지근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삑, 삑, 삑, 삑
호은이 차고 있는 가이드 워치의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하지만 도인호는 이능력을 회수하기는커녕 불꽃을 더욱 키워 냈다.
“슬퍼하는 형은 내가 잘 위로해 줄게. 넌 그냥 여기서 죽어.”
도인호가 지나간 자리로 푸른 불꽃이 잔상처럼 남았다.
-콰아앙!!!
한여름을 날린 벽이 뚫림과 동시에 굉장한 소음이 울렸다.
***
“권호은.”
“…….”
“시간 없다. 얼른 눈 좀 떠라.”
“……차장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 호는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호수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어디 계세요?”
“어디에도 없어. 이건 무의식에 들어가 텔레파시를 걸고 있을 뿐이야.”
“텔레파시요?”
어두운 공간에서 시야가 익숙해질 만도 했건만 시간이 지나도 호은은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서 있는 건지, 앉아 있는 건지. 그 무엇도 모르겠다. 꼭 우주를 부유하는 것만 같았다.
“시간 없으니까 짧게 설명한다. 내 바지 주머니에 이능력품으로 만든 작은 실험관이 있어. 거기다 멀티 몬스터 한 마리를 잡아넣었다.”
“네?”
“너는 증거 좀 찾았냐?”
“네……. 멀티 실험을 진행하는 곳에 백우경 이사장의 모습이 찍힌 영상이요.”
호은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손을 뻗었다. 어딘가에 있을 호수를 만지기 위함인데 역시나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혹시 내가 직접 못 움직이면 실험관이랑 해당 영상 들고 서울 협회장에게 전달해라. 미리 말했으니까 설명은 필요 없을 거다.”
호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직접 못 움직이면? 호수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 설마 멍청한 표정 짓고 있는 건 아니지.”
“네? 아닙니다…….”
“쯧. 대답이 시원찮은데. 이제부터 이야기 시작인데. 이리 나와서야.”
“……잘 이해해 보겠습니다.”
“그래. 자, 첫 번째부터 말해 주마. 백우경은 너랑 도인호를 격리하기 위해 널 구출하지 못하게 만든 거다. 그래서 이번 일에 텔레파시 에스퍼가 필요했어. 백우경이 모르게 지원 요청을 해야 했거든. 그래서 모인 멤버가 홍보부의 남운수랑 인사부의 폴이다.”
“어…… 네.”
“폴은 아지트 뒤쪽에 텔레파시 에스퍼랑 대기 중이다. 이곳을 빠져나가게 되면 그쪽으로 달려가.”
빠르게 말을 이어 가는 호수에 호은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자, 잠시만요. 차장님 지금 이게 무슨?”
“셋 세고 나면 강제로 널 눈 뜨게 할 거야. 눈 뜨자마자 도인호한테 달려가.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이곳을 빠져나가라.”
“네?”
잠깐만 기다려 달라는 호은의 말에도 호수는 매몰차게 자신이 할 말만 내뱉었다.
“넌 이 소리가 들리지 않아? 자, 그럼 하나.”
“소리……?”
조용했던 공간이 호수의 말 한마디로 기계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삑, 삑, 삑 일정한 박자로 들리는 소리는 언젠가 들어 본 적 있는 듯 친숙하기까지 했다. 이게 무슨 소리였더라…….
“셋.”
하나 다음에 둘 아닌가? 호은이 이상함을 눈치챘을 때 뜨거운 열기가 느껴짐과 동시에 눈을 뜨게 되었다.
“허억…….”
여태까지 숨을 참기라도 한 것처럼 급하게 호은은 산소를 들이마셨다. 자신이 왜 침대에 누워 있는지도 모른 채 호은은 소리의 근원지를 쳐다봤다.
가이드 워치는 3%라는 숫자를 나타낸 채 경고음을 내고 있었다.
‘도인호 가이딩 퍼센트가……!’
흐릿한 기억 속 호수가 했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도인호를 데리고 아지트를 빠져나가라고.
호은은 휘청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지 바로 앞에 보이는 벽면은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도인호!!!”
침대에서 일어나 절뚝거리는 다리로 걷던 호은은 뭔가에 걸려 넘어졌다.
“……차장님?”
정신을 잃은 듯 호수가 쓰러져 있었다. 가슴이 부풀었다 가라앉는 걸 확인한 호은은 아직 숨이 붙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를 크게 부딪치기라도 한 건지 얼굴의 반을 적신 선혈 빛 피를 보던 호은은 호수의 바지 주머니에 튀어나온 실험관을 발견했다.
비어 있는 손으로 실험관을 잡자 천둥이 치듯 머릿속에 호수가 했던 말이 크게 울렸다.
‘눈 뜨자마자 도인호한테 달려가.’
호은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시 다친 발을 질질 끌며 앞으로 나아갔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자꾸만 시선이 호수에게 향할 거 같았지만 호은은 애써 발에 힘을 주며 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벽이 뚫린 공간으로 간신히 들어가자 보이는 광경에 호은은 입을 벌렸다.
방에 있는 물건들은 독에 녹아내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중간중간 작은 불씨를 보며 초조한 표정을 짓던 호은의 앞으로 뭔가가 떨어졌다.
-콰콰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가슴에 검이 박힌 한여름이 숨을 헐떡거렸다.
터벅, 터벅.
회색 연기 사이에서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호은 형.”
“인호야…….”
도인호는 호은을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한여름의 가슴에 박힌 칼을 천천히 빼냈다. 이능력 핵을 건들지는 않은 건지, 검이 빠지자 한여름의 상처가 조금씩 회복되는 것이 보였다.
-콰직.
발을 들어 올린 도인호가 한여름의 목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인호야. 그, 그만. 다 끝났잖아.”
호은의 목소리는 사정없이 떨렸다. 도인호가 이렇게까지 화가 난 모습은 처음이다. 억누른 감정 사이로 빠져나오는 분노에 절로 몸이 떨렸다.
“정말 다 끝났어요?”
“응. 다 끝났어. 가자,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
호은은 도인호의 가슴을 끌어안으며 연신 중얼거렸다. 다 끝났다고. 집에 돌아가자고.
안광을 잃은 도인호의 눈이 살려고 꿈틀거리는 한여름에게 닿았다. 녀석을 죽이고 싶다. 호은을 다치고 아프게 만든 사람이다.
그러나 도인호는 한여름을 죽이지 못했다. 호은이 그걸 바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인호는 한여름의 목을 밟고 있는 발을 천천히 뗐다.
“몸은 괜찮아요?”
“그건 내가 묻고 싶어.”
“전 괜찮아요.”
“거짓말…….”
호은은 손을 들어 도인호의 뺨을 천천히 매만졌다. 재생 능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가이딩 퍼센트가 적어서 그런지 작은 생채기조차 더디게 아물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몸을 지탱하고는 나가기 위해 걸음을 뗐다.
“크, 크흑핫.”
“…….”
목숨을 부지한 한여름이 허공을 바라보며 실성한 듯 웃었다. 호은은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한여름의 얼굴을 보게 되면 그를 두고 떠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반정부 보스 한여름을 악인이 아닌 멀티 실험의 피해자로만 볼 거 같은 기분에 질끈 눈을 감았다.
한여름은 떠나는 호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버리지 말라고 했잖아.”
“…….”
“버림받는 건 지긋지긋해.”
공허한 외침이 방안을 채웠다. 호은은 애써 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구멍이 뚫린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넌 날 버리면 안 되지.”
멀리서 나지막하게 들려오던 한여름 목소리가 순식간에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소름 끼치도록 오싹한 전율이 흐르는 순간, 도인호는 호은을 밀어버렸다.
-콰앙!
바로 옆에서 폭발음과 함께 어마어마한 공기저항이 느껴지고 호은은 허공 위로 떴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으윽.”
바닥을 몇 번 구른 호은은 벽에 부딪히고 나서야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먼지바람과 함께 비린 피 냄새가 코끝을 진동했다. 호은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배를 부여잡은 도인호의 입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어째서…….”
호은은 말을 맺지 못하고 도인호에게 뛰어갔다. 도인호의 주변이 온통 붉었다.
“아쉽네. 호은이 너를 죽이고 싶었던 건데.”
반쯤 피부가 타들어 간 한여름이 어느새 울고 있는 호은을 보며 중얼거렸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호은에게 돌격했다. 호은을 죽이고 자신도 곧 죽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걸 도인호가 막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