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여, 연우는 방금 의식 차려서 모, 못 왔어.”
“팀장님…….”
“아, 호, 호은 씨 안녕.”
호은은 갑자기 나타난 남운수의 존재에 입을 벌렸다. 몇 명이나 자신을 구하러 왔는지는 몰랐으나 적어도 남운수가 이렇게 등장할지는 몰랐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침입자 발생, 침입자 발생
아까 한 번 울렸던 사이렌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건 호은만이 아닌지 최선율과 선악율도 남운수의 등장에 놀란 반응을 보였다.
“뭐야?!! 침입자가 늘었다고?!!”
도인호는 선악율이 당황한 틈을 타서 자기 몸을 구속하고 있는 것을 불태웠다.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바닥에 쓰러진 호은에게 다가간 도인호는 가장 먼저 호은의 다리를 감싸고 있는 그림자를 없앴다.
“인호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홍보부가 다 온 거야?”
“그건 아닙니다. 저희 쪽에 텔레파시 에스퍼가 있어요.”
“텔레파시?”
“그걸로 지금 상황을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격리당한 남운수 팀장님이 여기 왔다는 건…….”
“……?”
“누군가 꺼내 줬다는 소리인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도인호의 귀가 움찔거렸다. 그 순간 호은을 안아 든 몸을 오른쪽으로 피했다. 도인호가 방심한 틈을 노리던 최선율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팀장님…….”
도인호는 남운수를 쳐다봤다. 시선을 맞춘 남운수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번에는 노, 놓치지 마.”
“알겠습니다.”
말을 끝낸 도인호는 남운수를 방에 내버려 둔 채 호은을 데리고 미사일로 인해 뚫린 바닥으로 도망쳤다.
남운수가 홀로 두 사람을 이길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던 호은은 뚫린 천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팀장님 괜찮으실까. 내가 다리만 괜찮았어도…….”
한순간에 짐짝이 된 거 같아 호은은 죄책감이 들었다. 이상하게 몸에 열이 올랐다. 식은땀이 나는 거까진 영상을 보느라 정신력 소모를 많이 했나 싶었는데, 자꾸만 눈앞이 까매졌다 흐려지길 반복했다. 도인호의 옷자락을 잡은 손의 힘이 풀려 갔다.
“호은 형?”
“으응. 나 괜, 괜찮아.”
입술 색이 사라진 호은이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인제 보니 얼굴 또한 유난히 창백했다. 도인호는 초조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아래층은 호은이 이전에 갇혀 있던 방인지 잠금장치가 있는 침실이었다. 망설임 없이 침대 시트를 찢은 도인호는 주삿바늘 자국이 있는 목을 감쌌다. 시트는 금방 피로 젖어 갔다.
“조금만 참아요. 건물만 빠져나가면.”
“건물을 어떻게 빠져나가게?”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방에 인기척이 들렸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몸을 드러낸 반설아는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구멍이 뚫렸던 천장이 얼기 시작하더니 천장 전체를 얼음 장벽이 덮었다.
“쟤네 둘은 시끄러워서 말이야.”
“…….”
“우리 구면이지? 오늘은 폭주 안 하려나 몰라.”
도인호에게 아는 체를 하던 반설아는 탐탁지 않은 시선을 호은에게 돌렸다.
“저딴 가이드 때문에 아지트가 엉망이네.”
반설아가 손바닥을 내밀자 네모난 얼음 상자가 만들어졌다.
“더 이상 건물 부수는 건 사양이니까. 얌전히 있는 게 어때.”
도인호는 대답 대신 푸른 화염을 꺼내 방 가운데에 던졌다. 일직선으로 그어진 불꽃은 선을 넘지 말라는 듯 보였다.
“그래. 대답은 잘 알겠어.”
반설아는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뼉을 치고 밖으로 펼쳤다. 밖에 꺼내진 얼음 상자의 크기가 한순간에 크기를 키워나갔다. 지난번 도인호를 가뒀을 때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여기서 보스나 기다리라고.”
“우릴 가둘 수 있다면 말이지.”
일직선으로 있던 불이 세로로 길어지더니 천장에 닿았다. 반설아의 이능력이 화염에 닿자 속수무책으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반설아의 머리 위로 천장에서 녹은 물이 떨어졌다. 혀로 볼 안쪽을 훑으며 같잖다는 표정을 지은 그녀는 땅바닥에 손바닥을 내리꽂았다.
천장을 덮었던 것보다 더 두껍고 단단한 빙판이 바닥을 덮었다. 빙결은 방 전체를 얼려 버리려는 듯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들어 결국 도인호의 발목을 붙잡았다. 재빠르게 화염으로 발목을 붙잡고 있는 얼음 기둥을 없앤 도인호는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었다. 두 사람은 곧장 방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거대한 얼음 문이 생기며 길이 막혀버렸다.
“둘이 껌딱지야? 그렇게 안고 공격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어?”
반설아가 위에서 아래로 손을 휘두르자 눈꽃 무늬의 얼음 결정이 장식되어 있는 기다란 봉이 생겨났다. 그녀가 한 손으로 가볍게 봉을 휘두를 때마다 눈보라가 치는 듯한 강한 바람이 불었다.
“나는 그 가이드가 정말 마음에 안 들어.”
“…….”
“제까짓 게 뭔데 이딴 상황을 만드는 거야.”
한여름은 타이거 중 대표로 학교에 다녔다. 일반인과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알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는 남들과 자신이 다른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조용히 다녔다. 덕분에 약자로 지목되어 괴롭힘을 당해도 그는 묵묵히 고통을 견뎠다. 뭐 사실 개미가 공격한 것만큼 아프지도 않았겠지만, 발짓 한 번이면 죽일 수 있는 존재에게 저자세를 취하는 한여름이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었다.
그때 한여름은 뭐라 했더라. 또다시 버림받지 않으려면 이 정도 치욕은 견뎌야 한다고 했던가.
우리는 복수를 위해 살았다. 우리를 버린 것들을 처참히 짓밟고 망가트리고 살려달라 애원하게 만드는 미래를 그렸다.
“내 미래에 가이드 따위는 없다고.”
반설아의 긴 생머리카락이 허공으로 부유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권호은이 싫었다. 차라리 이전처럼 일반인으로 있었더라면 보스가 다른 세계 사람이라며 포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끝까지 볼품없는 모습으로 먹방이나 찍길 바랐다.
‘그런데 하루아침 사이에 가이드가 되고, 그것도 자신들에게 필요한 S등급의 가이드라니.’
절대 끼워 주고 싶지 않은 미래에 어느새 권호은의 자리가 만들어졌다.
“보스는 가이드를 죽이지 말라고 했지만. 난 역시 인정 못 하겠어.”
반설아가 휘두르던 봉이 마침내 멈췄다. 눈조차 뜨기 어려울 만큼 눈보라 치던 방안은 늑대 울음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눈보라가 사라졌다.
“해피엔딩은 지옥 가서 즐겨.”
반설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얼음으로 만들어진 늑대가 달려들었다. 커다란 몸짓은 제법 위협적이었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입을 벌린 늑대가 덤벼드는 것을 지켜본 도인호는 오른쪽 손을 뻗었다. 푸른 불꽃으로 만든 칼로 늑대의 단단한 송곳니를 막아 냈으나 반대편 쪽에 늑대는 한 마리가 더 있었다.
호은을 떨어트리기 위한 것인지 몸통을 부딪친 늑대는 도인호의 어깻죽지를 향해 턱을 크게 벌렸다. 도인호의 팔이 뜯겨 나가고 받치고 있던 호은이 떨어졌다.
“안 돼!”
도인호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대변하듯 푸른 청염이 그 크기를 키워 나갔다. 앞에 있는 늑대를 단번에 베어 버린 도인호는 떨어지는 호은을 다시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탁
그러나 반설아가 더 빨랐다. 부서진 늑대를 향해 손가락을 튕기자 산산이 조각난 얼음이 한데로 모이더니 다시 늑대로 형상화했다. 늑대는 도인호를 향해 돌진해 벽으로 처박았다.
‘아… 이대로 죽는 건가…?’
호은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시간이 참으로 느리게 흘러간다고 느꼈다.
1초면 바닥에 떨어질 거 같은데 어쩐지 천천히 몸이 추락하는 느낌이다. 거기다 자신을 덮치려는 듯 다가오는 늑대 또한 슬로모션을 건 것처럼 보였다.
이상하게도 무섭지 않았다. 반설아에게서는 살기가 보였지만 만들어진 이능력에서는 꼭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친숙하기까지 했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 호은은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는 반설아를 쳐다봤다.
그녀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다. 내가 죽으면 그녀의 표정이 좀 풀어질까?
“호은 형!!!”
쓸데없는 생각을 멈추라는 듯 도인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면 도인호가 울고 있을 거 같았다. 달래 주러 가야 하는데 손 하나 까딱일 힘이 없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늑대를 보고 있을 때 반짝이는 나비 떼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열린 문으로 누군가 가벼운 걸음 소리를 내며 방에 들어왔다.
“이렇게 되면 내가 왕자님 역할인가?”
월랑이 만든 거로 보이는 나비 떼는 호은의 주변을 빠르게 맴돌았다. 덕분에 호은은 허공에 떠 있는 상태가 됐고, 늑대 또한 함부로 덤벼들지 못했다.
“월랑!!! 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내가 원하는 엔딩을 만들고 있어.”
반설아는 어깨를 으쓱거리는 월랑에게 달려가 그녀의 멱살을 잡았다.
“지금 타이거를 배신하겠다는 소리야?!!”
“으음~? 무슨 소리야. 난 그냥 내 주인공이 죽는 꼴을 못 볼 뿐이지. 배신이라니.”
월랑은 반설아의 손을 내쳤다. 그녀는 가볍게 뛰어오르더니 호은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주머니에서 알약을 꺼내 호은의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메마른 목으로 간신히 약을 삼킨 호은은 숨을 쉬는 것이 조금 편해졌다.
“그리고 이건 보스의 명령이야. 포이즌을 쓴 방에 오래 있어서 감염됐을 거라고 약을 전달하라 했는걸?”
월랑은 호은을 자신의 품에 소중히 안았다. 그 모습을 보고 한마디 하려던 반설아는 입을 열기도 전에 벽으로 처박혔다.
“끄윽!”
“돌려줘.”
왼쪽 팔을 재생한 도인호가 반설아에게 칼을 들이댄 채 월랑에게 말했다.
“권호은…… 돌려 달라고.”
음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를 내뱉은 도인호는 칼을 들어 반설아의 심장 부근에 갖다 댔다.
“안 그러면. 네 동료는 죽어.”
칼날이 반설아의 심장을 점점 파고들기 시작했다. 에스퍼는 몇 번이고 재생할 수 있지만, 심장에 있는 이능력 핵이 망가지면 죽는다.
“커헉.”
“…….”
월랑이 가만히 있자 도인호는 망설임 없이 반설아의 심장으로 칼을 찔러 넣었다. 교묘하게 이능력 핵의 끝자락을 파괴한 도인호 덕에 반설아는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다. 힘없이 바닥에 추락한 반설아는 분하다는 듯 신음을 삼켰다.
“하하. 좋아~ 누가 왕자님 역할 하나 볼까.”
여유롭게 미소를 흘리던 월랑은 반설아 앞에 서 있던 도인호가 없다는 걸 눈치챘다.
“하……, 하하.”
“나랑 약속했어.”
월랑은 뒤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식은땀을 흘렸다. 저 녀석이 이렇게나 빨랐던가? 등에 닿은 뜨거운 열기는 반설아를 저렇게 만든 청염의 칼이 분명했다.
“날 평생 책임져 주기로.”
“……와우.”
“그러니 돌려줘.”
월랑은 품에 안긴 호은을 내려다봤다. 처음 봤을 때보다는 안색이 괜찮아졌다. 아직 동공이 풀린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 또한 괜찮아질 거 같았다.
“조금 더 멋진 역할을 하고 싶었는데.”
월랑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방안을 날아다니던 나비 떼는 다시 호은을 감싸더니 도인호에게 안겨 줬다. 양손을 위로 들며 자신은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어필한 월랑은 뒤늦게 쓰러진 반설아에게 다가갔다.
“호은 형.”
도인호는 되찾은 호은을 소중하게 안았다.
-삑, 삑, 삑, 삑
호은이 찬 가이드 워치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화면에는 도인호의 가이딩 수치가 11%로 나와 있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가이딩을 다 소모하기 전에 타이거를 빠져나가야 했다.
“내가 늦었나?”
월랑이 열어 놓은 문으로 사람이 던져졌다.
“뭐. 원래 보스는 늦게 도착하니까.”
한없이 가벼운 말투. 피투성이의 호수를 바닥에 던진 한여름이 도인호를 보며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