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시차를 두고 폭탄이 터져 갔다. 이제 곧 마지막 폭탄이 터질 시점. 매캐한 연기를 방패 삼아 숨어 있던 호수가 도인호와 남자를 보며 말했다.
“난 권호은이 말한 멀티 몬스터가 있다는 2층에 갈 거다. 벨이라고 했나? 넌 마주치는 타이거마다 최면을 걸어서 안전한 쪽에 박아 두고.”
“네…….”
“도인호 너는 권호은 구출하고 나면 바로 떠나라.”
“저, 저는요?!”
제주 지사 협회장은 두 명의 에스퍼를 지원했다. 한 명은 아지트 밖에서 대기 중이었고, 벨이라고 불린 남자는 최면이라는 이능력 탓에 현장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협회장의 부름에 아무 생각 없이 왔다가 반정부 현장에 끌려와 몹시 당황한 듯 보였다.
“타이거 간부를 제외한 사람들에게 최면을 다 걸고 나가면 너도 나가도 좋아.”
“그, 그건 너무 많잖아요! 그러다 죽을 수도 있는데!”
“그럼 죽어. 너 서울에서 이능력 최면인 걸로 범죄 저지르다가 제주 지사로 퇴출당한 거잖아.”
“윽…….”
“죗값만큼 열심히 일해야지.”
호수가 손을 들어 벨의 어깨를 치자 남자는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호수가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자신의 처분이 여기서 더 안 좋아질 수 있다는 걸. 벨은 먼저 출발하겠다며 부리나케 자리를 떠나갔다.
“그리고 도인호. 웬만하면 팔찌는 계속 끼고 있어. 권호은 만나기 전에 폭주하면 곤란하니까.”
“상황 봐서 하겠습니다.”
“그래. 비밀 임무 꼭 성공하자고.”
호수는 도인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주 잡은 손이 단단했다. 그저 꼬맹이에 불과했던 녀석이 언제 이렇게 큰 건지. 감회가 새로웠다.
“무사해라.”
더는 이 꼬마 자식을 도구로 볼 수 없다는 걸 인정한 호수는 잡았던 손을 놓았다.
-콰아아앙!
폭발 소리가 신호가 된 듯 도인호는 호은이 말한 층수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호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기계처럼 딱딱하고 메말랐던 도인호가 달라졌다. 정말 살렸구나. 매일매일 죽어 가던 녀석을 권호은이 살린 거다.
“에스퍼를 살리는 가이드라.”
어쩐지 입 안이 쓴 호수였다. 그는 쓸데없는 생각을 멈추고 2층으로 뛰어갔다. 에스퍼 주제에 가이드 이사장을 맡은 백우경을 이제 끌어내릴 순간이 왔다.
‘여기까지 정리하고 가면.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겠지.’
호수는 연기 사이 속 나타나는 인영들을 보며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잠깐 분위기 좀 내려고 했더니만 바로 방해가 들어온다. 호수는 지휘봉을 꺼냈다.
앞에는 전통 탈을 쓰고 직급별로 의상을 구별하기라도 한 건지 단출한 색의 무관복을 입고 있었다.
“니네 보스 취향 왜 그러냐.”
위아래로 훑은 호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네놈!!! 이름이 뭐냐!”
“하. 나이도 어린놈의 새끼들이 말을 놓네. 호수다 어쩔래.”
호수가 지휘봉을 앞으로 휘두르자 타이거는 자석에 이끌린 듯 벽으로 처박혔다.
-쿵!
벽에서 옴짝달싹 못 하는 녀석에게 한심한 시선을 던져 준 호수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중앙 계단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중앙에 있는 계단은 시야가 뚫려 있었다. 이때 반대편 계단으로 뛰어갔던 도인호의 모습이 먼저 들어왔다. 도인호의 신발 밑창에 푸른 불꽃이 피었다 싶었더니 한 번에 4층으로 뛰어올랐다. 이능력 쓰지 말라고 했는데 저렇게 바로 사용하다니. 어지간히 권호은이 보고 싶은 모양이다.
이번에는 밑을 내려보자 벨은 마주치는 자마다 최면을 걸어 한군데로 모으기 시작했다.
호수는 귓불에 차고 있는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가벼운 발걸음을 움직였다.
“잡아라!!!”
“꺼져.”
중간중간 타이거의 부하들이 달려들었지만, 지휘봉을 몇 번 두드리는 것만으로 간단하게 제압됐다. 거기다 가이드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원거리 공격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가이드의 몸이 망가지지 않게 최대한 조심하는 부하들의 움직임을 눈치챈 호수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냈다.
‘나를 가지고 인질 교환을 하려나 보네.’
덕분에 호수는 생채기 하나 없이 2층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이렇게 쉽게 일이 해결되는 게 미심쩍었지만 2층의 멀티 몬스터를 보는 게 먼저였다.
지휘봉으로 커다란 철제문을 건드리자 일반인 힘으로 열리지 않을 거 같던 문이 무거운 마찰음과 함께 열렸다.
멀티 몬스터의 첫인상은 냄새였다. 꼭 시체 썩은 냄새가 코끝을 강렬하게 강타했다.
“으어어.”
더 이상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지 않은 것들을 가만히 바라본 호수는 손을 갖다 댔다. 컨트롤하지 못하는 이능력이 몸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터져 나오는데 직접 가이딩을 흡수하지 못한다. 아니, 흡수할 필요가 없는 듯 보였다.
“백우경. 너 도대체 무슨 생각 중이냐.”
녹아내렸다 굳기를 반복한 형상의 멀티 몬스터는 의미 없는 의성어를 뱉으며 호수의 주변을 에워쌌다. 입술은 보이지 않았지만, 호수의 눈에는 꼭 그들이 침을 흘리며 자신을 탐욕스럽게 쳐다보는 거 같았다.
열린 철제문은 시간이 지나자 닫히기 시작했다. 좁혀진 문틈 사이로 뚜벅뚜벅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멀티 몬스터가 호수에게 덮치는 순간 발걸음 소리가 뚝 멈췄다.
***
-쿵, 쿵, 쿵.
호은은 방문이 흔들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봤다. 밖에서 누군가 몸통 박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문이 흔들렸다.
“…….”
절뚝거리는 다리로 뒤로 물러선 호은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의자를 들었다.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힘겹게 문 앞으로 간 호은의 이마로 땀방울이 맺혔다. 금이 가기 시작한 문을 불안하게 쳐다본 호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도인호일까, 한여름이라면 쉽게 문을 열었을 텐데.
“도인호…….”
이상하게 목소리가 떨렸다. 분명 침입자가 나타났던 순간 기뻤던 마음이 지금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도인호가 구하러 왔다면 한여름은 버리고 떠나도 되는 걸까.
모든 진실을 알아 버린 이 순간. 그런 선택을 해도 되는 걸까. 수만 가지 생각이 호은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
의자를 쥔 손에 힘을 줬다. 호은은 의자를 문으로 던졌다. 의자는 순식간에 박살이 났다. 파편이 날아감과 동시에 문 쪽에서도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쿵!
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을린 흔적과 아직까지 불에 타오르는 문을 본 호은이 떨리는 숨결을 뱉었다. 밑을 바라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린 호은의 눈가에 물기가 다시 차올랐다.
“호은 형.”
“…….”
“구하러 왔어요.”
“…….”
“같이 가요.”
아까까지 자신을 망설이게 한 고민은 어디로 갔는지 호은은 절뚝거리는 다리로 힘겹게 앞으로 나아갔다.
왼쪽 발목을 타고 오르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오직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모든 신경이 집중됐다. 고작 일주일이다. 누군가는 짧다고 느낄 시간이 호은에게는 몇 년이 지난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긴 기다림 끝에 호은은 드디어 도인호와 만났다.
“미안해요. 좀 더 빨리 오지 못해서.”
품에 뛰어든 호은을 받아 든 도인호는 틈 하나 없이 꽉 껴안았다.
“돌아가요. 우리 집으로.”
“흐윽…….”
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눈물을 참는 호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은 도인호는 피로 얼룩진 호은의 목덜미와 망가진 발목을 차례대로 훑었다. 얼마나 이런 상태로 있던 건지 숨소리도 평소와 다르게 거칠었고 닿은 피부는 지나치게 뜨거웠다.
“작전 타임 할 때는 선제공격 금지 아니야?”
“그러게. 암묵적인 룰인데 그걸 어기네.”
멀리서부터 들리는 목소리를 알아챈 도인호는 방안을 살폈다. 덩그러니 놓여 있는 침대를 순식간에 구석에 처박고 거동이 불편한 호은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금방 끝낼게요.”
바닥에 떨어진 문을 짓밟고 들어온 두 사람은 율 형제였다.
“자. 어떤 놈이 왔으려나~”
“당연히 청염 쓰는 녀석이겠지.”
그들은 도인호를 발견하고는 씨익 웃었다.
“형 말이 맞네.”
“당연하지. 잘됐네. 지난번 빚진 것 좀 갚아 줘 볼까.”
손가락 마디마다 뚝뚝 꺾는소리를 낸 선악율은 그림자 사이로 몸이 빠지더니 도인호의 그림자로 나타나 목을 쥐었다.
“크흑!”
그의 행동을 눈으로 좇기도 전에 도인호는 높은 천장으로 던져졌다. 동시에 최선율은 총을 꺼내 발사했다.
그들의 행동을 눈치챈 도인호는 허공에서 재빠르게 자세를 잡아 화염으로 창을 만들어 최선율에게 던졌다. 총보다 빨랐던 창은 최선율을 순식간에 집어삼켰지만, 그는 사라졌다.
“얼마나 버틸 수 있으려나?”
어느새 자리를 옮긴 형제는 다시 총을 꺼내 들었고 그림자 속에 숨어 기습해왔다. 최선율과 선악율은 오랫동안 합을 맞춘 사람답게 도인호에게 콤보 공격을 퍼부어 댔다.
‘젠장!…’
도인호는 호은의 위치를 계속 살피며 공격을 피하거나 일부러 맞거나 했다. 방이 넓다고 하지만 불을 아무렇게나 쓸 만큼 크지는 못했다. 두 명을 살생할 만한 공격을 하려면 불사조를 꺼내야 했는데 호은이 그 열기를 감당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그렇다고 저놈들만 끌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어.’
공격을 피하면서 도인호는 생각에 빠졌다. 지난번 싸움을 떠올리면 선악율은 그림자 가시를 꺼내지 않았다. 최선율 또한 마찬가지다. 지난번보다 공격의 수준이 낮았다. 공격 패턴이 지난번처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닌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유 부릴 때가 아닐 텐데?”
뒤쪽에서 들리는 선악율의 목소리에 도인호는 몸을 돌렸다. 날카롭게 빛나는 나이프를 든 선악율이 망설임 없이 도인호의 어깻죽지를 찔러 그대로 가슴까지 그었다.
“도인호!!!”
호은의 다급한 외침을 들은 도인호는 고통을 참아 내며 선악율의 팔을 붙잡았다.
“키히힛.”
잡은 손부터 시작해 푸른 불이 몸을 태우는데도 선악율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네가 날 잡은 게 아니라. 내가 널 잡은 거야.”
“뭐?”
바닥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천장을 향해 솟아나더니 도인호의 몸을 꽁꽁 묶어 결박했다.
“보스가 죽이지는 말라 했는데. 이 정도면 되려나.”
아래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도인호는 미사일 모양을 한 빛과 마주쳤다.
‘당했다.’
선악율의 그림자 가시를 경계하다 최선율의 미사일을 놓쳐 버린 셈이었다. 일부러 이능력을 아끼고 있던 건가. 그림자를 전부 태우고 자리를 이탈할까 했던 도인호는 자신의 뒤쪽에 호은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자식들 일부러…….’
침대 시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호은이 일어서려다 바닥으로 넘어졌다.
“이야~ 그 몸으로 에스퍼 구하러 오는 거야?”
선악율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크하하핫. 거기 앉아서 네 에스퍼가 죽는 꼴이나 보고 있으라고.”
도인호의 몸을 감싸고 있던 그림자 줄기 하나가 호은에게 빠르게 다가가 다리를 묶었다.
“자. 그럼 잘 가라고.”
“안돼! 도인호…!!”
딱, 하고 최선율이 핑거 스냅 소리를 낸 순간이었다. 웅장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던 미사일이 도인호 앞에서 멈췄다.
어느새 방패를 든 남자가 도인호 앞에 서있었다.
-콰아앙!
순식간에 미사일과 방패는 커다란 폭발음과 동시에 부서졌다.
“……우, 운 좋게 시간 맞춰 도착했나 보네.”
남운수가 어색한 표정으로 도인호에게 인사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