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심장은 아직도 요란하게 뛰었다.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숨이 부족한 사람처럼 호은은 거칠게 호흡했다.
‘살아남은 애들과 다짐했어. 우린 절대 서로를 버리지 말자고.’
‘그리고 우릴 태어나게 만든 세상에 복수하자고 말했지.’
한여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영상을 다 본 호은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런 끔찍한 일을 만든 협회에 복수하려는 타이거를 감히 자신이 막아도 되는 건가. 그 고통과 슬픔과 배신감을 다 이해하지 못할 내가?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됐다. 한여름은 무슨 일인지 연구소에 벗어난 이후에도 계속 영상을 찍었다.
실험체로만 살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여섯 명이 험난한 사회에 던져진 것부터. 서로의 나이가 불분명에 임의로 나이를 정하는 것도. 그리고 갓난아이인 한여울을 나중에 찾으러 오겠다며 보육원에 맡기는 장면까지. 이후에도 영상은 계속 이어졌다.
-오늘 친구가 생겼다. 그 아이는 몬스터 빵을 좋아하고…….
중학교에 입학한 한여름의 모습까지 지켜본 호은은 스페이스 바를 눌러 영상을 멈췄다.
악인이라는 건 태어났을 때부터 누가 정해 주는 걸까. 아니면 상황이 악인을 만드는 걸까. 만약 한여름이 평범하게 에스퍼로 각성했다면…….
호은은 검은색 사원증을 차고 있는 한여름을 상상하다 헛웃음을 뱉었다. 의미 없는 짓이다. 이미 한여름은 반정부인 타이거의 보스였다.
USB를 뽑으려던 호은은 이상한 제목의 영상을 발견했다. 몰래 찍은 듯한 영상은 초점이 잘 맞지 않고 흔들렸다.
-백우경 씨. 스탠바이 부탁드립니다.
영상 속 모습은 촬영장처럼 보였다. 카메라 앞으로 향하던 백우경이 잠시 멈추더니 입 모양을 움직였다. 좋지 않은 화질 탓에 호은은 자신이 잘못 봤나 싶었다. 백우경의 얼굴을 확대했다.
“살아……있었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유추하는 게 다였지만 어쩐지 꼭 그렇게 말한 거 같았다.
***
한여름은 아수라장이 된 1층을 내려다봤다, 전달받은 사항으로는 입구에 보초 서고 있던 녀석들이 다 기절 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다고 했다.
“정신계 에스퍼인가…….”
”그런 거 같습니다. 침입자 경보음이 울린 다음 입구로 가자 이미 저렇게 기절한 후였습니다. 감지기를 통해 발견한 인원은 세 명입니다.”
“고작 세 명?”
“네. 그리고 처음 폭발했던 푸른 불꽃을 제외하고는 이능력 감지가 되지 않습니다.”
백우경은 소란스러운 1층을 내려다봤다. 확실히 문을 열자마자 보였던 푸른 불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폭발은 계속 일어났다. 그것도 CCTV가 놓여 있는 위치마다 폭발이 터져 상황실 시야를 가렸다.
“이능력이 아니면 저 폭발은 뭔데.”
“다, 다이너마이트 같습니다. 이능력품도 아닌 일반 다이너마이트요. 저것 때문에 침입자들 위치 확보가 어렵습니다.”
“흐응. 겨우 세 명으로 와서는 술래잡기하자는 것도 아니고. 간부들은?”
“모두 간부실로 소집했습니다.”
“그래. 알겠어.”
침입자가 들어왔음에도 한여름은 여유로워 보였다. 권호은을 납치하면서 이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지난번 도박장에서 만났던 남자를 떠올린 한여름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각인하고 만났으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는데. 시간이 부족했네.”
한여름은 불구경하듯 소란스러운 밑을 구경했다. 고작 세 명을 데려온 건 타이거를 기만하는 행위였다. 겨우 그 정도 인원으로 권호은을 데려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어림도 없는데 말이야.’
난간에 기대어 있던 한여름은 고개를 젖히며 휘파람을 불었다.
“애들 기다리겠다. 슬슬 가자.”
한여름은 간부실로 걸음을 뗐다.
“내가 나오기 전까지 2층으로 못 올라오게 잘 막고 있어.”
겨우 세 명 정도라면 굳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다고 결론을 내린 한여름은 간부실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있는 율 형제는 자다 일어난 건지 얼굴에 졸음이 가득했다. 그 옆으로 팔짱을 낀 반설아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한여름을 째려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와 대조적으로 월랑은 간부실의 잡다한 물건을 하나둘 만져 보며 구경 중이었다. 모두 하나같이 침입에 대한 걱정 따위는 없어 보였다.
“그러게 혈액 채취 끝나면 바로 던져 버리라고 했잖아. 귀찮게 날파리나 꼬이고 말이야.”
“던져 버리라니. 이제 곧 보스의 옆자리에 있을 사람인데 말이야.”
반설아는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녀의 짜증 서린 목소리에도 한여름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내가 각인하면 나만 좋은 게 아니야. 너희도 최강의 보스를 얻는 거라고.”
“최강은 무슨. 어차피 개발한 가이딩 약만 있으면 가이드 따위 없어도 되는데.”
반설아는 지지 않겠다는 듯 한여름의 말을 받아쳤다.
“가이딩 약은 마르지 않는 샘이 아니잖아? S등급 가이드는 구하는 게 쉬운 줄 아나.”
짜증을 꾸역꾸역 참으며 친절히 대답을 끝낸 한여름은 1인용 소파에 앉았다.
반설아는 가이드라고 하더라도 정부 측 사람이면 저렇게 혐오감을 표출하고는 했다.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한여름은 아직도 씩씩거리는 반설아를 보며 말했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날 죽이고 보스 하던가~ 아, 물론 나한테 덤빌 수 있다면 말이야. 으하핫.”
“저 초딩 새끼 진짜.”
말이 안 통하는 한여름의 행동에 반설아는 주먹을 들어 가슴을 몇 번 내리쳤다.
“보스~ 우리 어제 밤새 게임을 하느라 한숨도 못 잤거든. 우리까지 나설 필요는 없지?”
소파에 기대어 있던 선악율은 눈을 감고 천천히 말했다. 반쯤 자면서 말하는 동생의 모습에 최선율이 목을 주무르며 자세를 바르게 만들었다. 이들은 아직 몇 명이 침입했는지 모르는 상태였다.
세 명이라면 율 형제까지 굳이 나설 필요 없을 거 같았다. 한여름은 턱을 쓸며 반설아에게 물었다.
“정부 쪽에서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아봤어?”
반설아는 핸드폰을 꺼내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로 연결된 통화에 그녀는 스피커로 설정하고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네. 설아 언니.
“세희야. 지금 우리 아지트에 침입자가 들어왔는데 말이야. 보고할 만한 거 있나 해서.”
-아까 전 말씀 드렸던 도인호 에스퍼 말고는 없습니다. 침입자 수가 몇 명인가요?
김세희의 물음에 한여름은 손가락 세 개를 폈다.
“세 명인 거 같아.”
-이상하네요. 인사부는 이번 일에서 손 뗐고, 홍보부는 격리 중이라 도인호 사원을 제외한 두 명은 누구일지…….
“그래?”
-아. 잠시만요. 협회장들에게만 공문 보낸 게 있네요. S등급 가이드인 호수 발견 즉시 공단으로 소환하라는 내용이네요.
“설마 호수가 온 건가.”
반설아는 무의식적으로 한여름을 쳐다봤다. 한여름은 호수의 이름을 듣자 묘한 표정을 지었다.
“원신은 괜찮고?”
-특수 감옥에 있어요. 고문이나 그런 건 없었고. 백우경이 찾아가 대화를 한 거 같은데…….
정확히 무슨 대화를 나눈 건지는 확인이 어렵다는 김세희의 말에 반설아는 알겠다고 답했다.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다며 통화를 끊은 반설아는 짜증스러운 한숨을 뱉었다.
“이게 뭐야. 백우경이 애지중지하는 가이드가 왔으면 일이 커진다고.”
“…….”
“아까처럼 지껄여 보지 그래? 멀티 몬스터 공격성이 확인도 안 됐는데. 이 상태로 정부랑 싸운다고?”
“호수가 왔다라.”
반설아의 대답은 가볍게 무시한 한여름이 천천히 혀를 굴리며 호수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S급 가이드가 온 건 의외였다. 가이드를 구하기 위해 가이드가 온다?
“잘됐네. 그 녀석 생포해서 원신이랑 바꾸자고 협상하자. 멀티 몬스터로 협회가 아수라장이 될 텐데. 원신이 다치면 큰일이지.”
“뭐?!”
“호수는 생포하고 나머지 침입자는 전부 처형.”
한여름은 긴 다리를 꼬며 익살맞은 미소를 지었다.
“살려서 내보내지 마. 감히 누구에게 도발했는지 알려 주자고.”
“어? 그런 대사 하는 놈이 꼭 죽던데.”
“……아?”
“영화에서 입 놀리는 사람이 먼저 죽어! 다들 몰라? 자, 지금부터 가족 이야기 금지, 과거 회상 금지, 가족 유품 같은 거 전투 중에 꺼내기 금지. 이것만 지키면 우리는 무사해!”
진지한 얼굴로 발랄한 목소리를 내는 월랑의 입을 반설아가 급히 막았다. 평소에도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말을 달고 사는 그녀였으나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말해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고는 했다.
“애초에 유품이 있을 리 없거든.”
월랑 때문에 싸늘하게 얼어붙은 분위기를 반설아가 말을 덧붙이며 무마시켰다.
“그렇지~ 우린 부모가 없으니까!”
한술 더 뜨는 보스에 분위기가 녹기는커녕 방 안의 온도가 2도 정도 낮아진 듯했다.
“영화 좋지~ 가이드 제외하고 다 죽여 버리면 되는 거지? 공포 스릴러 장르로 가자고.”
잠에서 깬 건지 선악율이 아까보다 생기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날카로운 이는 먹잇감을 노리는 듯 사냥할 생각에 신이 난 호랑이 같았다.
“아. 청염을 쓰는 놈이 한 명 있거든. 그놈 마지막 목숨을 끊는 건 나니까. 적당히 가지고만 놀아.”
한여름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도인호를 언급했다.
“하아?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귀찮다고~ 그냥 다 죽여 버리지.”
“율아 참아. 에스퍼 협회 쳐들어갈 때 실컷 죽이게 해 줄게.”
월랑은 선악율과 최선율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비단 두 사람뿐만이 아니라 타이거의 원년 멤버인 간부들 자체가 신기했다.
이들은 가족이 아니다. 아, 아니다. 몇 명은 가족일 수도 있으려나. 실험을 통해 부모 쪽이 되는 가이드와 에스퍼가 여럿 바뀌었으니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헷갈렸다.
그럼에도 월랑은 이들이 꼭 서로를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다른 반정부였다면 간부가 붙잡혔다고 하더라도 버렸을 텐데. 구할 계획을 하는 걸 보니 더 확신이 섰다.
월랑은 유학을 하러 간 미국에서 에스퍼로 발현되어 무소속 용병 일을 할 수 있었다. 덕분에 매일같이 공부하던 지루한 일상에서 재미와 액션이 넘치는 영화 같은 삶을 살게 되었다. 슬슬 용병 일이 질려 갈 때쯤 한국의 반정부인 타이거가 스카우트 제안을 해왔다.
반란, 전쟁, 혁명. 이곳에 오면 다이내믹한 영화를 찍을 수 있을 거 같아 그녀는 타이거의 멤버가 됐다.
그러나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자신의 착각인 듯했다.
‘장르가 사랑과 전쟁이었나.’
남들 눈은 속였을지 몰라도 월랑 눈에는 보였다. 매끈해 보이는 보스의 얼굴은 초조함과 질투가 가득 붙어 있었다. 아마도 청염을 쓰는 에스퍼 때문에 저런 상태인 것 같았다. 그 에스퍼는 권호은과 꽤 각별해 보였으니 말이다.
“우후훗. 재미있겠다.”
꼭 영화 속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었다. 이번 영화의 중심인 권호은을 과연 누가 쟁탈할 것인가. 월랑은 그를 짝사랑하는 조연출의 역할을 충실히 행하며 영화를 만들어 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침입자는 정말로 세 명이야?”
“맞아. 세 명.”
“하아?”
여기저기 어이없어하는 탄성이 넘쳤다. 월랑은 영화의 러닝 타임이 짧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