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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113화 (113/129)

113화.

주삿바늘이 떨어지자 목이 금방 축축해졌다. 손으로 목을 훔친 호은은 피가 묻은 것을 확인했다.

“각인 전에 혈액 채취를 끝내라고 해서 말이야.”

“하아. 헌혈할 거면 초코빵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빵은 각인 끝나고 줄게. 이제 방해하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물고 있던 손을 뱉어 낸 호은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었다. 갑자기 많은 양의 피를 뽑히게 되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손발이 저릿해 호은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울 정도로 싫어?”

“……누가 울어.”

볼을 타고 미지근한 물기가 내려가는 걸 알고 있음에도 호은은 부정했다. 자신이 내뱉고 있는 건 눈물이 아니다. 이렇게 짜증 나고 분하고 서러운 감정이 한 대 뭉친 걸 내뱉을 뿐이다.

가이드는 무력하다. 몇 번이고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알고 있는데 새삼 억울하다. 내가 에스퍼 같은 이능력이 있었다면, 신체적 힘이라도 강했다면. 한여름을 제압하고 빌어먹을 수갑도 부술 수 있었을 텐데.

“나를 받아들여. 그럼 네가 원하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식은땀으로 젖은 호은의 앞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었다. 그것을 정돈해 주며 한여름은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멀티 몬스터로 무엇을 하려는지. 실험을 진행한 측근에 누가 있는지.”

“…….”

“타이거는 결국 무엇을 하려는지.”

한여름이 진한 미소를 지었다.

“각인이 끝나면 다 알려 줄게.”

마른 배를 훑는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수갑이 채워진 손을 들어 한여름의 목을 조르면 막을 수 있을까.

“사랑해, 호은아.”

달콤한 목소리는 누군가에게는 독이었다. 당장에라도 귀를 틀어막고 싶었으나 양손은 어느새 한여름의 손에 막혀 있었다.

호은이 아랫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깨물었을 때였다.

어두웠던 방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사이렌 소리가 건물 전체를 울렸다. 벽면에 붙어 있던 경고등은 적색 빛을 위협적으로 내고 있었다.

“보스!!! 침입자가 들어왔습니다!!!”

문이 열리자 보이는 타이거 말단 직원은 길을 잃은 아이가 엄마를 부르는 것처럼 한여름을 애타게 찾았다.

“푸른 화염이 꼭 에스퍼인 거 같습니다.”

“……!!!”

“하하. 타이밍 죽이네.”

한여름은 언제 웃었냐는 듯 욕설을 짓씹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옷매무새 정돈을 끝낸 한여름은 흐트러진 모습의 호은을 가만히 바라봤다.

“방문이 열리면 그 녀석이 아니라 내가 들어올 거야.”

“…….”

“싸늘한 시체로 인사시켜 줄 테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한여름은 호은의 수갑을 손으로 잡아당겼다. 쉽게 빠지지 않을 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그는 허튼짓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방을 나갔다.

“……하.”

답답함에 호은은 침대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푹신한 매트릭스는 주먹에 아무런 생채기도 내지 못했다.

“도인호…….”

베개 옆에 있던 토끼 인형은 어느 틈에 떨어진 건지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처량한 모양새가 꼭 자신과 닮았다.

호은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인호가 왔다. 그것도 나를 구하기 위해.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바닥에 발을 내려놓자 왼쪽 발의 상태는 치료한 게 무색하게 악화되었다. 잇자국과 부기가 심해 보이는 왼발에 시선을 던진 호은은 전혀 개의치 않고 노트북이 있던 방으로 들어갔다. 정보를 더 찾아야 했다. 한여름이 했던 말이 신경 쓰였다.

‘실험을 진행한 측근에 누가 있는지.’

이 말은 곧 실험에 관련된 자료를 타이거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트북에 찾지 못한 자료가 있을지도 모른다.

“없어…….”

조금 전까지 있던 노트북이 없다. 노트북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책상이 녹아내린 듯 바닥에 검은색 끈적한 액체 웅덩이가 보였다. 독성이 있어 보이는 액체는 보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울이 터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호은은 실험 삼아 책장으로 돌아가 책하나를 꺼내 웅덩이에 던졌다.

“……역시.”

웅덩이에 들어간 책은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바닥은 특수한 소재인지 독극물을 버텨 내고 있었다.

‘설마 한여름의 이능력과 관련된 건가.’

살상력이 뛰어난 이능력에 호은은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가 우뚝 섰다.

“잠깐만 이거 설마!”

호은은 위험해 보이는 웅덩이에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자세를 낮춰 바닥에 주저앉은 호은은 찰랑거리는 수갑의 사슬 부분을 천천히 웅덩이에 집어넣었다.

-촤아아악.

쇠가 타는 지독한 냄새와 함께 체인 부분이 녹았다. 호은은 한결 가벼워진 손을 들어 흔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수갑을 녹여 없애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살까지 녹아내릴 수 있으니 사슬이 끊긴 거로 만족하기로 했다.

“이거면 그것도 가능하려나.”

호은은 열린 책장 사이로 보이는 서랍을 바라봤다. 문이 잠겨져 열어 보지 못한 서랍은 분명 중요한 게 들어 있을 것만 같았다.

-쿠우우웅.

밑에서는 전투라도 하는 건지 건물이 크게 흔들렸다. 누가 이기고 있는 걸까. 정부 측 사람들? 아니면 타이거……? 호은의 마음이 급해졌다.

책장 아래에 들어가 있는 간이 서랍은 제법 무게가 나갔다. 멀쩡한 몸 상태로 들었어도 힘이 들었을 게 분명한데, 다친 발로 지탱해 드니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고통이 심상치 않았다. 호은은 신음과 함께 고통을 참아 가며 서랍을 들어 올렸다.

‘제발 이 안에 뭐라도 있어라.’

땀으로 젖은 티셔츠는 등에 착 달라붙은 지 오래다. 두꺼운 주삿바늘로 뚫린 목은 힘이 들어갈 때마다 피멍이라도 든 것처럼 욱신거렸다.

호은은 입 안쪽 살을 깨물며 참아 냈다. 피를 많이 뽑아서 그런 건지 이상하게 온몸에 힘이 없고 방향 감각이 떨어졌다.

휘청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자세를 다잡은 호은이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천천히 서랍을 웅덩이에 갖다 댔다.

밑바닥 부분이 웅덩이에 닿자마자 서랍은 빠르게 녹아내렸다. 안에 내용물이 훼손되지 않게 타이밍을 조절한 호은은 손이 들어갈 만큼의 공간을 확보하자 바로 서랍을 바닥에 던졌다.

-쿵

서랍을 들었던 손과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앞이 새하얘지는 진귀한 경험을 해 본 호은은 잠깐 멈춰 크게 심호흡했다. 귓가에서 들리는 이명 소리가 잦아들어 갈 때 호은은 구멍이 뚫린 서랍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건……?”

서랍 안을 손으로 휘젓고 있을 때였다. 작은 뭔가가 손에 잡혔다. 주먹 쥔 손을 펼친 호은은 내용물을 보고 메마른 입술을 핥았다. USB였다.

호은은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나왔다. 밖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USB를 주머니에 넣고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문손잡이를 돌리자 철커덕 소리와 함께 손잡이가 헛돌았다.

“뭐야, 왜 안 열려?”

어깨에 힘을 줘 문을 밀어 봐도 문은 뭔가에 가로막힌 듯 꿈적도 하지 않는다. 문을 부술 만한 뭔가를 찾으려고 방을 살피던 호은은 컴퓨터를 발견했다.

“오히려 잘됐네.”

자신이 나가지 못한다는 말은 즉 다른 사람도 이곳에 침입하는 게 어렵다는 소리였다. 문을 가로막고 있는 뭔가를 부수지 않는 이상 호은은 안전하게 방에 있을 수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USB를 만지작거린 호은은 망설임 없이 컴퓨터가 있는 책상으로 향했다.

본체에 USB를 꽂은 호은은 부팅이 된 모니터 화면을 바라봤다.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칸에 자신의 생일을 입력하고 호은은 망설임 없이 외장 메모리 폴더를 확인했다.

“전부 영상이네.”

영상의 제목은 날짜였다. 십 년 전부터 나열된 날짜는 일주일 전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호은은 가장 첫 번째인 영상을 틀었다.

-멀티 프로젝트 담당한 권수혁 팀장이다.

연구 가운을 입은 남자는 헬멧처럼 뽀글거리는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이건 멀티 프로젝트를 기록하기 위한 촬영이다.

화면에는 갓난아기가 등장했다. 보자기 같은 것에 둘러싸인 아이는 뭐가 그리도 서러운지 있는 힘껏 울고 있었다.

-드디어 첫 번째 성공체. 넘버 236. 성장 촉진제를 주입해 경과를 지켜보겠지만, 에스퍼와 비슷한 유전자 조직과 내부에 가이딩이 있는 거로 확인된다.

아이를 보여 주고 있는 남자의 뒤쪽에는 불투명한 창이 있었다. 커다란 통이 놓여 있는 걸 유심히 지켜보던 호은의 동공이 흔들렸다.

2m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실험관 안에 사람으로 보이는 뭔가가 있었다. 주르륵 놓여 있는 실험관은 한 개가 아니었다. 창 너머에 있던 연구원은 고개를 젓더니 작은 실험관 앞에 서서 버튼을 눌렀다.

“……웁.”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참을 수 없는 구토감에 호은은 화장실로 가 구역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정체 이식부터 멀티 실험까지.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회사는 미쳤다.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있다니.

호은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애써 주먹을 쥐었다. 올라오는 분노와 실망 그리고 깊은 절망감이 몸을 지배했다. 도대체 에스퍼가 뭐길래. 가이드가 뭐길래 이딴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 건가.

호은은 입술이 새하얘질 정도로 깨물며 다시 영상을 재생했다.

성장 촉진제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236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걸어 다니고 옹알이를 했다.

아이가 처음으로 이능력을 사용했을 때 호은은 아이의 정체를 눈치챘다. 아이의 손이 닿는 곳마다 독에 타들어 가는 것처럼 자취를 감췄다. 아이는 한여름이었다.

영상은 계속 돌아갔다. 빨리 감기 기능을 쓰자 어느새 영상 속 시간은 10년이 지나가 있었다. 영상의 개수가 줄어 갈수록 호은은 초조해졌다.

‘백우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를 찾아야 하는데.’

호은은 입술을 물어뜯었다. 실험체는 어느새 각자 이능력을 사용해 훈련할 정도로 성장했다. 성공한 실험체는 열 명이었으나 이능력을 사용하지 못한 다섯 명은 사라지고 갓난아이 한 명이 새로 생겼다.

-오늘은 성공체가 이능력을 사용했을 때 가진 가이딩이 얼마나 닳는지…… 엇, 안녕하십니까.

아이들을 찍고 있던 영상이 흔들리더니 누군가를 비췄다.

“찾았다.”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은 백우경이 무표정한 얼굴로 실험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은은 해당 영상의 날짜를 기억한 다음 빠르게 영상을 넘겼다.

영상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백우경이 나타난 뒤로 연구소 직원들이 하나둘 줄어들기 시작했다.

-멀티 실험은 실패했다. 이들은 가이딩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소모된 가이딩을 재생산할 수 없었다.

권수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뱉더니 목에 차고 있던 사원증을 바닥에 던졌다. 영상은 그렇게 끝나고 다음 영상이 재생됐다. 영상 길이는 고작 1분짜리였다.

아무도 없는 연구소 안. 조명은 모두 꺼져 있고 기계들도 가동을 멈췄다. 직전 영상에 실험은 완전히 실패하고 폐기 처분 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왔기에 이 적막함이 무섭기 그지없었다.

도대체 카메라로 뭘 찍고 있는 건가 의아하던 순간 창문을 통해 번쩍 번개가 쳤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카메라에는 호은이 기억하는 중학생 시절의 모습인 한여름이 있었다.

-우리는 이곳을 탈출한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고 다시 암전. 호은의 심장은 마치 북이 울리듯 크게 쿵쿵거렸다. 이윽고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영상의 화면이 다시 나타났다.

실험이 진행된 10년. 각자 다른 시기에 태어난 실험체들이 성장 촉진제로 제각기 나이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반설아, 최선율, 선악율, 원신. 그리고 가운데 한여름이 안고 있는 갓난아이.

-콰앙, 쾅, 콰아아앙.

폭발음이 몇 번 더 나고 나서 영상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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