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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111화 (111/129)

111화.

납치당한 것도 모자라 구속까지 당해 버렸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까지 꼬인 건지 모르겠다. 정보를 캐내기 위해 잠금장치가 있는 방에서 나왔을 뿐인데. 수갑을 차게 될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마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뭐라도 찾아야 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도인호에게 구해지기만 한다면 자신은 그저 비련의 납치된 가이드로 낙인찍혀 동정받고 말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는 동정은 결국 가이드를 지키지 못한 도인호에 대한 비난으로 향할 것이었다. 그런 상황은 절대로 오면 안 됐다.

멀티인지 뭔지 하는 괴물에 대한 자료를 반드시 찾아서 이번 사건을 완벽히 마무리할 것이다.

가만히 서 있던 호은의 시선이 업무를 보는 듯한 책상에 닿았다. 책상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듀얼 모니터와 키보드 마우스를 제외하고 먼지 한 톨조차 없었다. 혹시나 하고 책상 아래에 있는 서랍을 열어 봤지만 잠가져 있어 열리지 않았다.

“……흐음.”

컴퓨터의 전원을 켜도 마찬가지였다.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창에 나지막한 신음을 뱉었다.

[힌트 : 4자리]

반정부 보스나 되는 컴퓨터 잠금에 이렇게 힌트를 줘도 되는 건가. 호은은 일단 의자에 앉았다.

“0000은 아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1234를 눌러 봤지만 역시나 틀렸다. 하기야 초등학생도 이렇게 단순한 비밀번호를 하진 않을 것이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사슬이 책상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수갑이 참 여러모로 거슬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컴퓨터 안에 뭔가가 있을 텐데.’

한여름 방은 특정 시간이 되면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호은이 보면 안 되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시도 가능한 횟수는 어느새 딱 한 번이 남았다.

“도대체 뭐로 한 거야.”

머리를 헤집으며 괴상한 신음을 뱉어 낸 호은은 불안한 시선으로 화면을 바라봤다. 마지막 한 번이다.

보통 일반 컴퓨터라면 고작 몇 분 동안 로그인 시도를 못 하는 게 다겠지만, 반정부 컴퓨터이다 보니 혹시라도 연락이 가는 건 아닐까 걱정됐다.

안 그래도 자신의 바뀐 태도를 한여름이 지적한 바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컴퓨터를 켜려고 애쓰던 걸 들키기라도 한다면.

꿀꺽, 호은이 침을 삼켰다. 여기서 멈추는 게 나을 거 같았다.

미련 가득한 걸음으로 책상에서 떨어진 호은이 가만히 멈춰 섰다. 이내 결심한 듯 순식간에 키보드로 달려가 번호를 눌렀다.

“모르겠다!”

방금 행동은 거의 충동적이었다. 머릿속에 빛 한줄기가 스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엔터 버튼을 누른 직후였다.

“됐어?”

호은이 모니터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혹시나 하고 자신의 생일 네 자리를 입력했더니 비밀번호가 맞았다. 알려 주지도 않은 생일을 한여름이 비밀번호로 설정을 해 놓은 게 소름이 끼쳤으나 어쨌든 컴퓨터 확인 가능한 게 먼저였다.

바탕 화면은 평범했다.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아이콘들이 늘어져 있었다. 그중 아무 폴더에 들어가 첫 번째 파일부터 무작위로 눌러 보기 시작했다.

“신약 보고서?”

눈길을 끄는 파일명에 호은은 망설임 없이 해당 파일을 눌렀다.

“이건…….”

빽빽한 글씨 사이로 한국 이능력자 협회 로고가 워터마크로 들어가 있었다. 타이거가 해킹이라도 해서 이 문서를 가지고 있는 건가. 찝찝한 얼굴로 호은은 천천히 보고서를 읽어 내렸다.

‘가이드의 혈액으로 직접 가이딩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신약을 발견하였으나…… 실험 가이드의 부작용으로 중단.’

-철컥.

문서를 읽던 와중 누군가 문을 여는 듯한 소리가 났다. 호은은 빠르게 컴퓨터 전원을 껐다. 침대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머리끝까지 덮은 이불 안에서 숨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있자, 문 앞에 서 있던 누군가가 침대로 다가왔다.

“보스는 참 센스가 없다니까. 애착 인형도 안 챙겨 오고.”

방에 들어온 사람은 월랑이었다. 베개 옆에 뭔가를 내려놓은 그녀는 답답해 보이는 이불 상태에 혀를 찼다.

“불은 왜 안 끄고 나간 거야.”

조명 탓에 호은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고 생각한 그녀는 이불을 가슴 쪽으로 내려 줬다. 호은은 최대한 몸에 힘을 뺐다. 아무리 자신에게 호의적인 월랑이라고 할지라도 지금 상황에서는 자는 척하고 있는 게 나을 거 같았다.

“흐응.”

월랑은 언제 갖다 놓은 건지 모를 쇠기둥을 쳐다봤다. 쇠기둥과 이어진 사슬은 호은의 왼쪽 손목에서 멈췄다. 그녀는 침대에 널브러진 쇠사슬을 손으로 잡아당겼다. 단단하게 고정된 사슬을 확인이라도 하는 건지 몇 번 잡아당기다가 침대에 내팽개쳤다.

“보스도 참 취향이 독특해.”

“…….”

“이렇게 구속하는 것보다는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게 더 예쁜데.”

투덜거리던 월랑은 보스가 사랑할 줄 모른다며 연신 혼잣말을 뱉었다. 볼일을 다 본 그녀는 마지막으로 호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줬다. 고운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은 몇 번을 만져도 기분이 좋았다. 조금 더 만지고 싶었으나 슬슬 가 봐야 했다. 그녀는 방의 조명을 끄고는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호은은 눈을 뜰 수 있었다.

“…….”

베개 옆에 놓인 토끼 인형. 월랑이 갖다 놓은 모양이다. 호은은 인형을 품에 껴안았다. 느낌이 이상했다. 월랑이 잘해 주면 잘해 줄수록 무거운 죄책감이 들었다.

***

깜빡 잠이 든 호은은 어느새 품에 안고 있는 토끼 인형에 아침 인사를 건넸다.

“일어났어.”

혹시라도 도인호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지는 않을까 작은 희망을 품고서 말이다. 뻐근한 목을 좌우로 흔들며 주변을 살펴보자 한여름의 기척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호은은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했다. 시계가 없으니 자신이 얼마나 잔 건지 알 수 없어 불편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컴퓨터를 할 수 있던 게 떠올랐다. 호은은 화장실에 나와 컴퓨터가 있는 책상으로 뛰어갔다. 월랑이 조명을 끈 탓에 방안은 어두웠다. 이래서 불을 항상 켜 두고 있던 건가. 호은은 본체 전원을 눌렀다. 화면이 빛나는 것을 기다리며 어두운 방 안을 밝히기 위해 스위치를 누르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밤 9시?”

모니터 화면의 시간을 확인하자 오후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분명 잠들기 전에도 밤이었다. 고작 삼십 분 정도 잔 걸까?

“설마 시간을 속였던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한여름이 거짓말을 했다고밖에 결론이 나지 않았다. 뻔뻔한 얼굴로 잘도 거짓을 지껄이던 한여름을 떠올리자 속에서부터 열이 올라왔다. 애써 분노를 삼키며 컴퓨터를 뒤지는 것에 집중했다.

폴더 전체를 뒤졌지만 쓸 만한 것은 없었다. 뭔가 반정부가 이용할 거 같은 사이트를 발견하긴 했지만,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침대로 돌아온 호은은 여태까지 조사한 내용을 조용히 중얼거렸다.

“사이트 주소 알려 줄 테니 조사 부탁합니다.”

토끼 인형을 품에 안은 채 혼잣말을 하고 있자 아무도 없음에도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일하는 중이라고 세뇌했으나 다 큰 성인이 인형 놀이를 하는 듯한 그림을 지우기 어려웠다.

“멀티에 관련된 자료는 계속 찾아보겠습니다.”

호은은 인형을 베개 옆에 앉혔다. 자신의 목소리를 도인호가 듣고 있을지 아니면 홍보부 사람이 듣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말투에 대한 고민이 들었다. 일단 정보를 알려 줄 때는 존댓말 하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그나저나 이 방에서 찾을 만한 건 다 찾은 건가.

“…….”

침대 앞에 서서 멍하니 있던 호은의 눈에 책장이 들어왔다. 업무용 책상 뒤편에 있는 책장에는 책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한여름이랑 책은 안 어울리는데.”

영어로 써진 책은 얼마나 두꺼운지 감히 꺼내 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들어 책장 앞에 선 호은은 혼자 기울어진 책 하나를 꺼냈다.

“뭐라고 읽는 거야.”

첫 페이지부터 미간을 찌푸리며 영어를 더듬거리고 있을 때다.

-쿠우웅.

앞에 있는 책장에서 소리가 났다. 커다란 책장은 두 개가 겹쳐 있었는데 이상한 소리와 함께 책장이 갈라지더니 숨겨진 문이 나타났다.

“뭐야…….”

방이 쓸데없이 컸기에 이런 숨은 공간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호은은 수갑을 찬 몸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고동색 벽면은 사람 한 명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었다. 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자 안이 텅 빈 듯한 소리가 들렸다. 호은은 망설임 없이 문을 밀었다.

-끼이익

예상한 것처럼 숨겨진 공간은 다른 어딘가를 연결해 주는 통로였다. 호은은 손목에 찬 수갑의 길이가 여유로운지 확인하고 걸음을 뗐다.

어두운 시야에 벽을 더듬으며 통로를 걷자 스위치가 만져졌다. 불을 켜자 정면에 보이는 벽면에 호은은 숨을 삼켰다.

‘한여름 미친놈.’

커다란 책상과 의자가 있는 거로 보았을 때 밖에 있는 책상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으나 벽면이 온통 사진이었다.

중학생 시절의 자신부터 한여름 핸드폰 배경 화면이던 촬영장 사진이 시간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었다. 한여름의 지독한 스토커 짓을 확인 사살하자 팔에 소름이 돋았다.

“백수 시절에도 따라다녔어?”

먹방을 봤다는 건 거짓이 아닌지 가게에서 촬영하는 사진까지 있었다. 사진에서 유일하게 공백기가 있다면 호은이 가이드 공단에 입사한 시점이었다. 인턴 가이드와 같이 찍은 단체 사진 한 장과 가이드 검진 촬영장의 사진을 확인한 호은은 턱을 매만졌다.

“인턴 사진은 어디서 구한 거지.”

인사부에서 말했던 배신자 건이 머릿속을 스쳤다. 호은은 찝찝한 사진에서 시선을 뗐다. 저걸 계속 봐 봤자 얻을 건 없어 보였다.

그나마 방에서 흥미로운 건 노트북이었다. 노트북에 다가가 팔을 들어 올리려 하자 수갑이 길이가 다된 듯 절그럭 소리를 내며 막았다.

“하.”

한여름이 오면 어떻게든 수갑만은 풀어 달라고 말해야겠다. 호은은 어쩔 수 없이 왼손은 방을 나가는 뒤쪽으로 놓고 오른손만 내밀어 노트북 전원을 켰다.

컴퓨터와 똑같이 비밀번호로 잠겨 있는 노트북에 자신의 생일 네 자리를 입력했다. 로그인된 노트북 화면을 보며 한여름 통장 비밀번호도 자신의 생일로 되어 있는 건 아닌가 진지하게 의심했다.

호은은 힘겹게 오른손으로 마우스를 잡았다. 왼쪽 손은 뒤로 향하고 오른손만 필사적으로 앞으로 내미는 자기 모습이 굉장히 우스꽝스러울 거 같았다. 이번에도 이건 일하는 중이라고 세뇌하며 노트북을 뒤졌다.

책장에 영어 관련 서류만 있던 것이 힌트였던 걸까? 문서를 열 때마다 전부 영어로 적혀 있어 이게 관련 내용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 됐다. 멀티라는 단어를 찾아봤지만, 까막눈이 된 것처럼 앞이 침침했다.

이제 슬슬 방으로 돌아가야 할 거 같았다. 밤이긴 했지만, 평소 루틴이라면 식사를 넣어 줄 시간대였다.

아무도 안 들어온 것처럼 노트북 전원을 끄려고 하던 호은의 귀로 ‘띠링’ 하고 전자음 소리가 울렸다. 곧바로 화면의 오른쪽 아래로 메시지 알림창이 떴다.

[도인호가 자취를 감췄다고 합니다. 지금 그쪽으로 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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