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실험은 앞서 말한 멀티 실험이었다. 그러나 해당 실험은 소문만 무성할 뿐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갑자기 불이 난 연구소에 몇 명의 사람이 참여했는지 실험의 결과는 어떤 건지 정확한 정보는 재와 함께 사라졌다.
“가이드를 허락 없이 실험에 데려가진 못했을 테고. 백우경이 허락한 거지? 이번처럼.”
“…….”
“그런 일이 있었는데. 가이드 혈액으로 뭐 약을 만들어? 이거 내가 보고하면 어떻게 될 거 같아? 가뜩이나 가이드 접근 금지가 내린 제주 지사인데. 이번에는 가이딩 약 수량을 제한시켜 볼까?”
호수는 더러운 걸 만진 것처럼 잡고 있던 머리채를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제엔장……, 그래서 뭐!! 나보고 어쩌라고!!!”
입술을 깨문 협회장은 치욕스러움을 삼키며 고함을 질렀다. 실험의 중요 멤버였던 그는 가이드의 죽음에서 죄책감이나 반성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저 이 상황이, 세상이 억울하다고 말하는 거 같았다.
“한 번 죽이고 시작해야 하나.”
자꾸만 거슬리는 태도를 보이는 협회장에 호수의 인내가 점점 닳아 가고 있었다. 한번 찌그러진 캔은 아무리 모양새를 다듬어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좋은 말로 구슬릴 필요 없이 폭력으로 입을 열게 만드는 게 그에게 더 어울리는 방법 같았다.
“이러고 있는 시간이 아깝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너 타이거가 몇 명인지 알지.”
“……그야 다섯 명 아니야?”
“그래. 미디어에 공개된 녀석은 다섯 명이지. 뭔가 익숙한 숫자 아닌가.”
협회장은 허공을 바라봤다. 동공이 바쁘게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미간을 모은 협회장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정말 모르겠어? 이능력이 브레인치고는 실망인걸?”
“서, 설마 타이거가 멀티 실험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말도 안 돼. 그 새끼들은 죽었다고!!!”
“불에 타서 시체도 안 남기고 죽었지.”
“그, 그래!!!”
“시체를 안 봤는데 죽었는지 어떻게 알아.”
“그건…….”
“네놈 타이거가 멀티 실험체라는 사실 이미 알고 있었지.”
“무, 무슨 소리를…….”
“내가 볼 땐 백우경과 넌 알고 있었어. 타이거가 멀티 실험체라는걸. 그리고 때를 노리고 있었겠지. 녀석들을 죽일 순간을 말이야.”
호수가 말을 하면 할수록 협회장의 안색이 급히 나빠졌다. 그는 아랫입술을 덜덜 떨면서 고개를 바쁘게 휘저었다. 협회장은 악을 지르며 호수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오해야!!! 타, 타이거가 멀티 실험체라니. 나, 난 모르는 일이야!!!”
도인호는 두 사람이 대치하는 것을 뒤에서 조용히 관망했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불안해졌다. 제주도에 와서도 계속 착용했던 인이어는 토끼 인형과 호은이 떨어지기라도 했는지 조용했다.
인내심 있게 더는 기다릴 수 없던 도인호는 접대실 테이블에 놓여 있던 커터칼을 들었다.
협회장은 커터칼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커터칼 따위는 에스퍼의 단단한 피부도 뚫지 못하는 평범한 학용품일 뿐이었다.
“고통 앞에서는 모두 진실해진다고 하죠.”
아무것도 아니었던 커터칼은 순식간에 푸른 화염에 휩싸였다. 위협적으로 일렁거리는 불꽃을 보자 협회장의 비명은 집 전체를 울릴 만큼 커졌다.
“포, 폭력 반대!!! 에스퍼 인권은 어디 간 거야?!”
적극적인 도인호의 행동에 멈칫한 호수는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뱉었다.
“하하. 쟤가 좀 바쁜 일정이 있어서 말이야. 그러니까 숨기고 있는 것에 대해 전부 말해.”
“흐윽. 흑.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내가 뭐, 뭘 잘못했다고.”
“잘못한 걸 모르는 정신 상태가 문제지.”
호수는 협회장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볼품없이 바닥에 쓰러진 협회장에게 도인호가 다가갔다.
방 안은 순식간에 고통에 찬 신음으로 가득 채워졌다.
***
영혼이 반쯤 나간 거 같은 몰골로 협회장은 접대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 나란히 앉은 도인호와 호수는 한결 편안한 얼굴로 협회장을 쳐다봤다.
“2년 전쯤인가…… 백우경 이사장에게 연락이 왔어. 멀티 실험체가 살아 있는 거 같다고.”
협회장은 양손을 들어 머리를 부여잡았다.
“백우경의 연락을 받지 않아도 나 또한 알았지. 어떻게 모르겠어. 그들의 이능력이 과거 멀티 실험체랑 똑같은데. 나는 녀석들을 당장 찾아 죽여야 한다고 말했어. 이 사건을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할 수 없었어.”
“…….”
“그리고 잘 알고 있었거든. 백우경이 날 살려 둔 이유를. 한 명 정도는 만약을 위해 필요했던 거야. 사건이 다시 물 위로 올라왔을 때 책임을 질 녀석이.”
“이능력이 브레인은 맞나 보네.”
“당연하지!!! 내가 녀석들을 잡을 계획을 잡고 있을 때 백우경은 말했어. 멀티 실험체가 살아 있는 목적이 궁금하다고. 그 말은 즉 아무런 행동도 하지 말고 지켜보란 소리였어. 당연히 을인 나는 백우경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고.”
“…….”
“소, 솔직히 나는 타이거가 이 정도로 세력을 키울 줄 몰랐어. 이렇게 처리하기 어려울 만큼 커질 줄 알았다면! 2년 전에 없애는 게 나았을 텐데.”
협회장은 불안한지 손톱을 깨물었다.
“나,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멀티 실험의 아이디어도 백우경이었다고!! 그런데 왜 내가, 이, 이런 취급을…….”
협회장은 억울함이 잔뜩 담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실험을 명령한 것도 가이드가 죽어도 괜찮다고 말했던 것도 다 백우경이다. 그런 주제에 마치 뱀처럼 백우경은 모든 책임에서 빠져나갔다.
심지어 실험을 같이 진행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백우경이 참여했다는 사실조차 믿어 주지 않았다. 결국, 모든 피해는 제주 지사와 해당 실험의 유일한 생존자인 자신이 져야만 했다.
그 일이 일어난 이후로 백우경에게 두 번은 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그는 달콤한 말로 사람을 유혹시켰다.
“백우경 이사장은 계획이 있다고 했어. 내가 가, 가이딩 혈액으로 약을 만들고 있으면 본인이 멀티 실험체를 확인한 다음 처리한다고 했어. 그렇게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인천 지사 협회장으로 자리 앉혀준다고 말해서…… 나는 그놈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백우경이 해당 약의 정보를 흘리라고 지시도 했지? 타이거 놈들이 새로운 약 개발 법 정보를 훔칠 수 있게 말이야.”
“그래 맞아.”
호수가 뒷말을 얹고 권수혁이 긍정하자 도인호는 괴로운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호은이 63 스퀘어에 오지 않았더라면. 이 말도 안 되는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을 거다. 평범할 수 있었던 호은의 일상을 자신이 망친 거 같아 고통스러운 괴로움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홍보부에서 타이거 중 한 명을 잡았다고 했지. 그렇다면 백우경 이사장이 확인했을 거야. 녀석들의 계획은 뭔지……, 또 상태는 어떤지.”
“역시. 권호은이 무전으로 말한 내용은 모두 사실이네.”
호수는 깍지를 끼고는 턱을 받쳤다. 고민하듯 미간을 모으며 신음을 삼키더니 이윽고 협회장과 시선을 맞췄다.
“오늘 밤에 타이거로 쳐들어가야 할 거 같거든.”
“무, 뭐?”
“제주 지사 에스퍼 몇 명 빌려줘. 잠입할 때 이용 하기 좋은 쪽이면 좋겠군.”
“무슨, 개소리야!! 내가 왜 널 도와?!”
“수혁아. 줄을 잘 잡아야지? 썩어 빠진 백우경 줄을 잡을 게 아니라.”
“그게 무슨…….”
“우린 오늘 타이거에 쳐들어가 멀티 실험에 백우경이 관련됐다는 증거를 찾을 거야. 그 녀석들이라면 가지고 있을 거 같거든.”
“그, 그럴 리 없어.”
“아니. 분명 있어. 난 그걸로 백우경을 처벌할 거다. 과거처럼 빠져나가지 못하게 말이야.”
“내가 미, 미쳤다고 도와 주냐?!! 백우경만 처벌받는 게 아니라 나도 엮일 걸 모르겠어?! 그리고 방금 연락이 왔는데 당신! 백우경 이사장이 애타게 찾는 거 같던데. 발견 즉시…….”
“온몸을 속박해 인천 지사로 보내라고 했지? 이 소식을 듣고 내가 제 발로 기어 오길 바랐나 보네.”
호수는 질린다는 듯 관자놀이를 손으로 매만졌다.
“그래서 나 신고하게? 난 너한테 기회를 주고 있는 건데.”
“기회?”
“지난 멀티 실험의 책임. 실험을 진행했던 백우경 이사장에게 다시 돌려주는 거야.”
“그, 그게 가능할 리가…….”
“타이거가 있으면 가능해. 어때.”
협회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백우경 때문이다. 제주 지사에 처박혀 가이드에게 가이딩조차 받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된 건. 자신의 인생을 망친 건 전부 백우경 탓이었다. 지금 에스퍼에게 몇 번이고 위협적으로 공격당한 수치스러움도. 전부! 백우경과 연관되지 않았으면 겪지 않았어도 될 일이다.
“내가 뭘 하면 되지.”
고개를 들어 올린 협회장의 얼굴은 복수심에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 호수는 그런 협회장을 바라보며 비웃음을 참아야 했다.
“도인호. 다행히 늦지 않게 갈 수 있겠어.”
호수의 말을 들은 도인호는 긴장된 얼굴로 느릿하게 고갯짓했다. 드디어 호은을 보러 갈 수 있다.
‘이번에는 내가 구하러 갈게요.’
지난번 자신의 폭주를 막으러 형이 와 줬던 것처럼. 그러니 부디 무사하길. 도인호는 처음으로 신을 찾았다.
***
“한여름, 너 지금 장난해?”
한쪽 손목에 수갑이 있다는 건 여러모로 불편했다. 기둥과 가까운 침대 방향에 앉은 호은이 한여름을 흘겨보았다.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어디 가는 거야.”
“어라라? 키스는 피했으면서 잠은 같이 자고 싶단 거야?”
나가려는지 옷을 차려입은 한여름은 호은에게 다가와 부드러운 손길로 뺨을 쥐었다. 분명 잘 먹이고 충분히 잠도 재우는 거 같은데, 호은의 피부는 몰라볼 만큼 많이 상했다.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볼을 쓰다듬던 한여름이 호은의 이마에 입 맞췄다.
“얌전히 기다려.”
“…….”
“일하고 올게.”
호은의 목이 뻣뻣하게 굳었다. 속에서부터 거부감이 올라왔다. 분명 속 편한 죽을 먹은 거 같은데 메슥거렸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숙였던 고개를 들자 방에는 자신밖에 없었다.
"하아……."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한여름의 입술이 닿았던 이마를 침대 시트로 박박 문질렀다.
“그나저나 이런 밤에 어디를 간다는 거야.”
창문이 없어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는 모르겠으나, 한여름이 밤이라고 했던 말을 믿은 호은은 침대에 나와 방을 둘러봤다.
몇 번을 와도 기분 나쁜 방이다. 도대체 건물 밖의 생김새가 어떻길래 창문 하나 없는 걸까. 호은은 손바닥으로 벽을 만지던 걸 그만뒀다.
“거슬리네.”
움직일 때마다 달그락 소리가 나는 쇠사슬이 신경에 거슬렸다. 몇 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손목은 수갑에 쓸려 벌써 새빨간 자국을 남겨 놓았다.
수갑에 묶인 사슬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호은은 방안을 돌아다녔다. 사슬은 생각보다 길었다. 화장실도 충분히 다녀올 수 있었고 방안에서 못 돌아다닐 장소는 없을 듯했다.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사슬이 팽팽해지는 장소는 방문을 나가는 문 앞이었다. 문을 여는 것까지는 가능했지만 복도로 발을 내미는 건 불가능했다. 온몸에 무게를 줘 당겨 봐도 사슬이 연결된 기둥은 미동조차 안 했다.
아무리 힘을 줘도 소용없다는 걸 확인한 호은은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