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권호은이 S등급인 걸 상부가 알았으면 뱀 같은 백우경에게 휘둘리지 않았겠지.”
“…….”
호수는 처음으로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했다. 결정체 이식자인 도인호의 폭주를 늦추기 위해 거짓 발표한 호은의 등급이 이렇게 발목을 잡을 줄이야.
오랜 기간 해 처먹은 백우경에 상부의 반 이상이 그가 뽑은 꼭두각시와 다름없었다. 그러니 S등급 가이드를 갖기 위해 63 스퀘어에서 쇼를 했던 타이거가 지금껏 가만히 있음에도,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세계 반정부 협회와의 동맹을 운운하며 테러한다고 협박했던 타이거다. 그런 놈들이 정부에 속아 말도 안 되는 언약 계약서를 작성했다. 정부에게 악의가 있었다면 동맹의 손을 빌리지 못하더라도 다른 식으로라도 접근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녀석들은 63 스퀘어에서 원하던 것을 받아 갔기 때문이다.
‘S등급 가이드.’
그들이 처음부터 노리던 건 S등급 가이드의 혈액이다. 이 사실을 조금 더 빨리 눈치챘더라면. 권호은을 D등급이라 속이지 않았더라면. 63 스퀘어 현장에 참여하지 못하게 막았더라면. 자신의 실수가 모여 권호은을 이러한 상황으로 만든 것이다.
허벅지 위에 올려진 호수의 손등은 핏줄이 돋을 만큼 힘이 들어갔다.
‘백우경이 날 얼마나 우스워했을까.’
그는 진즉에 알고 있던 거다. 호은이 D등급 가이드가 아니라는 걸. 그저 호수의 말에 속은 척 연기하고 있었을 뿐이다.
모두 백우경에게 놀아나고 있었다. 타이거와 관련된 이 판은 그가 짜 놓은 판이었다. 권호은과 도인호 그리고 홍보부는 그저 장기에 불과했다.
권호은을 구해야 하는 건 호수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자신이 호은의 등급을 속였기에 백우경이 이런 판을 만든 거다. 호수에게는 이번일 대한 책임이 있었고 판을 뒤집을 자신도 있었다.
정적을 깨트리듯 도인호가 담담한 목소리를 뱉었다.
“임무 참여하겠습니다.”
“…….”
“반드시 데려올 겁니다.”
호은이 D등급이 아니라는 것은 가이딩을 받는 도인호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S등급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호은이 자신을 떠날 거 같아서.
D등급의 권호은은 도인호 옆에 둘 수 있으나 S등급의 권호은은 옆에 둘 수 없다. 결국, 모든 걸 알면서 도인호는 호수의 등급 속이기에 동참한 셈이었다.
그러니 이번 일의 책임은 호수만 질 게 아니라 자신도 같이 져야 하는 것이었다.
“호은 형이 울고 있었습니다.”
“…….”
“매일 밤.”
도인호는 잠을 자지 않아 충혈된 눈을 깜빡이다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매일 밤 호은이 우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자다가 우는 건지, 깬 상태로 우는 것인지.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에 도인호의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여기서 더 울릴 수는 없습니다. 지금 당장 출발하죠. 전 언제든 호은 형을 구하러 갈 준비가 됐습니다.”
마치 자신에게 다짐하듯 도인호의 목소리는 견고했다.
“그래.”
호수는 도인호의 어깨를 잡았다. 귓불에 차고 있는 날개 모양의 깃털이 흔들렸다.
“제주도로 가자.”
창문이 닫혀 있어 바람 한 점 불지 않던 거실에 바람이 불었다.
***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제주 공항에는 놀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어째서 공항으로 온 겁니까.”
“이능력품의 한계야. 내가 가 본 곳만 갈 수 있거든.”
미리 챙겨 온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호수는 도인호를 데리고 택시 정류장으로 나왔다.
“바로 반정부에게 가는 겁니까?”
“아니. 일단 이능력자 협회 제주 지사에 가야 해.”
“……?”
“그쪽이랑 연관되었거든.”
“무엇이 말입니까?”
“나머진 택시에서 얘기해 줄게.”
화제를 돌린 호수는 비어 있는 택시를 잡아 뒷좌석에 앉았다. 그 옆에 앉은 도인호는 호수가 입을 열 타이밍을 기다렸으나 창밖 너머 달리는 도로만 바라볼 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
“가이드 공단은 왜 하나밖에 없고, 이능력자 협회는 여러 개인 줄 알아?”
도인호의 인내심이 바닥이 날쯤 호수는 입을 열었다.
“모릅니다.”
“대답 한번 빠르네.”
“…….”
“인원수 차이지. 가이드는 적으니까 공단 하나로 관리가 되지만, 에스퍼는 수도 많고 이능력도 천차만별이니까.”
호수의 말에 도인호는 생각에 빠졌다. 이능력자 협회는 서울, 인천, 부산, 제주로 총 4곳에서 관리하고 있다.
서울지사는 에스퍼가 골고루 분포된 것과 반대로 부산 쪽은 자연계가 많은 편이었다.
‘그것도 물과 관련된 에스퍼가 많았지.’
자신의 상사였던 레오 또한 부산 지사 소속이었다가 가이드인 최유빈을 따라 인천 지사로 온 것이 떠올랐다.
인천 지사는 물리계와 자연계가 적당히 섞여 있었다. 인천 지사 소속 자연계는 도인호처럼 공격력이 높은 에스퍼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제주 지사는 어떤 곳입니까.”
제주 지사에 관해서는 들은 내용이 없었다. 도인호가 궁금하다는 듯 질문하자 호수가 입을 열었다.
“정신계 쪽이 많이 몰려 있고.”
“…….”
“가이드에게 버림받은 지사이지.”
“……가이드가 협회를 버리는 것이 가능합니까.”
도인호의 질문에 호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가이드 공단 엘리베이터에 이능력자 협회로 가는 버튼이 있거든. 그런데 딱 하나. 제주 지사만 없어. 갈 필요가 없는 곳이거든.”
도인호는 호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가이드 중 에스퍼를 가장 혐오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뽑는다면 호수일 거다. 그런 그가 일반 가이드도 가기 싫어하는 제주 지사를 간다니. 답변을 들어도 제주 지사로 가는 이유가 더 모호해질 뿐이었다.
“모든 게 다 이어져 있어. 백우경도 타이거도……. 이걸로 내 자유도 곧 찾아올지 모르겠네.”
이번에도 호수는 의미 모를 말을 내뱉었다. 도인호는 침묵했다.
한때 자신에게 자유는 죽음이었다. 그리고 호수는 그 자유를 부러워했었다. 그가 말하는 자유는 무엇일까.
택시는 빠른 속도로 도로를 달려 나갔다. 변화하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호수는 어딘가 멀리 떠나려는 사람처럼 비장해 보였다.
***
택시에 내리자마자 비린 바다 냄새에 도인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제주 지사는 해안가 근처에 있었다.
“저기야.”
“생각보다 작습니다.”
호수가 손으로 가리킨 방향을 보자 인천 지사의 반은 될까 싶을 정도로 단지가 작았다. 심지어 다른 지사들은 일반인 눈에 보이지 않기 위해 게이트가 처져 있었는데, 이곳은 게이트가 없는지 일반인 눈에도 보이는 구조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요양원 같은 느낌을 물씬 풍기는 제주 지사의 입구로 두 사람은 들어갔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정문으로 들어가자 경비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앞을 막았다. 호수는 재킷 주머니에 넣어놨던 사원증을 꺼냈다.
“가이드 공단……?”
사원증을 살펴본 경비원의 안색은 점점 파래졌다.
“S등급이라고?”
처음 보는 듯한 등급에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가이드가 여긴 무슨 볼일입니까?”
“그쪽 협회장한테 볼일이 있어서.”
“……협회장님과 약속은 잡으셨습니까.”
호수는 콧방귀를 뀌었다. 천천히 앞에 있는 경비원에게 다가간 호수는 그의 팔을 잡았다.
“……!!”
“직접 가이딩은 처음인가? 뭐 그렇겠지. 제주 지사에는 가이드가 없으니까.”
호수에게 팔을 잡힌 남자의 눈동자가 일순 보라색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이 감각을 오래 유지하고 싶으면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
호수가 손을 떼자 경비원은 아쉬워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날이 선 눈빛을 세우던 경비원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덕분에 호수와 도인호는 제주 지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저 사람 가이딩 처음 받아 봅니까?”
“그렇지. 제주 지사는 가이드가 없거든.”
“가이드가 없다고요?”
“이곳에 있는 에스퍼 대다수는 범죄 이력이 있는 녀석들이라 다 징계 대상이거든.”
호수의 폭탄 발언과 어울리지 않게 제주 지사는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정문 옆에만 하더라도 야자수가 놓여 있고 정원 조경도 잘되어 있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꼭 유령 도시에 온 것처럼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인천 지사 같은 경우에는 중간마다 가게들이 놓여 있는데 이곳에는 그 흔한 편의점조차 보이지 않았다.
호수를 따라 걷던 도인호는 마침내 흰색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네가 아는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
호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로 들어가자 밖에서는 안 보이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연구원 가운을 입고 있었다. 검은색 사원증을 찬 사람과 명찰을 단 사람들. 그 어디에도 파란색 사원증을 차고 있는 사람은 없다.
“어머.”
여자의 놀란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렸다. 도인호는 자연스럽게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도인호?”
호수를 알아보는 것으로 생각했던 여자의 입에서는 자신의 이름이 나왔다. 도인호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자연스럽게 여자에게 다가간 호수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두 사람에게 방해되지 않게 뒤로 떨어져 상황을 지켜보던 도인호는 자꾸만 쳐다보는 여자의 시선을 피하듯 땅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비웃음 소리가 들린 건.
“그나저나. 기껏 수술에 성공한 도구를 저렇게 버려 놓으시다니.”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로 아쉽다는 듯 혀가 훑고 지나갔다.
“…….”
어째서 호수가 아는 녀석을 만날지도 모르겠다고 했는지 알겠다. 여자의 얼굴을 세밀하게 관찰한 도인호는 그녀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오랜만입니다.”
“어라? 인사를 받을 줄은 몰랐네.”
도인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여자를 내려다봤다. 만약 예전의 자신이라면 여자의 얼굴을 본 순간 불안함을 느꼈을 거다.
결정체 이식자인 주제에 결정체를 내놓지 않고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은 죄를 짓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폭주해서 죽지 않아도 자신은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다.
“아까워. 정말 아까워……. 호수 차장님은 안 아까우세요?”
“다른 걸로 보상받을 거라.”
도인호에게 뻗는 여자의 손을 한 손으로 낚아챈 호수는 예의 잘생긴 미소를 보이며 웃었다. 그 온화한 미소 사이 숨겨진 경고를 알아챈 여자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소문의 가이드는 안 보이네요.”
도인호의 폭주를 막은 미친 가이드가 있다는 소문은 연구소 직원 사이에서 유명했다. 언젠가 마주치게 되면 결정체 도구의 위대함을 알려줘 당장 미친 짓을 멈추라고 했을 텐데.
그녀는 도인호의 목에 차고 있는 초록색 사원증을 보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협회장한테 안내해 줘.”
“어머나? 제가 왜요.”
“지금 보이는 사람 중에선 네가 협회장 위치를 알 거 같거든.”
“흐음. 협회장님이 싫어할 거 같긴 한데.”
머리를 귀 뒤로 넘긴 여자는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안내해 주기 위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