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칫솔을 입에 문 호은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몰골을 확인했다. 그새 살이라도 빠진 건지 턱선이 날렵해져 있었다. 거기다 눈가는 하도 손으로 짓뭉개서 건들기만 해도 따가울 지경이다.
이런 흉한 모습을 한여름은 뭐가 그리 좋다고 자꾸만 몸을 만지작거리는 걸까. 먹방 너튜브를 구독하고 계속 지켜볼 정도로 집착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어쨌거나 한여름이 자신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단 걸 확인한 이상 아까 같은 아양은 부릴 필요 없어 보였다. 오히려 해당 행동 때문에 한여름이 의심하기도 했으니 평소처럼 히스테릭을 부리는 게 나을 거 같다.
한쪽 다리를 든 채 세수까지 끝낸 호은은 얼굴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았다.
‘정신 차리자.’
간만에 이채를 띤 안광이 반짝였다.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야. 그래야 날 구하러 사람들이 왔을 때.
‘뭐라도 도움이 될 수 있게.’
호은은 문손잡이를 돌렸다. 화장실을 나오자 눈에 들어온 건 은색의 무언가를 들고 있는 한여름이다.
“뭐, 뭐야?”
“아, 이거. 별거 아니야. 슬슬 필요할 거 같아서.”
한여름의 손을 자세히 살펴보자 들고 있는 건 수갑이었다.
“…….”
수갑과 연결된 쇠사슬 줄이 이어진 곳을 확인하자 침대 옆에 못 보던 쇠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바닥에 고정된 기둥은 일반인 힘으로 뽑아내기는 어려워 보였다.
“버리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 증표랄까.”
어느새 호은의 앞에 다가온 한여름이 수갑을 내밀었다.
“이러면 너도 날 못 버리잖아?”
“…….”
“우리가 같은 마음이라 정말 다행이야.”
-철컹.
호은의 손목에 차가운 쇠고랑이 닿았다.
‘나 지금 좆 된 거지.’
차가운 쇳덩어리의 감촉보다 어딘가 맛이 간 것 같은 한여름의 눈빛이 더 소름이 끼쳤다.
바닥으로 떨어진 손과 함께 쇳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
“봐. 확인했지?”
도인호가 들고 있는 무전기를 채간 호수는 부착했던 안테나를 뽑았다.
“원하는 게 뭡니까.”
“비밀 임무에 동행해 줬으면 해서.”
“하. 지금 제 상황이 보이지 않습니까?”
도인호는 험악한 모습으로 인상을 구겼다. 호은이 납치된 지 일주일째. 반정부를 잡았다는 쾌거와 다르게 홍보부의 피해는 막심했다. 소속된 가이드 중 한 명은 의식불명, 다른 한 명은 납치당했다.
거기다 남은 에스퍼에게 내려진 처사는 어떤가. 당장에라도 납치된 가이드를 구출하러 가야 하는 사람에게 이능력 구속구를 채웠다.
이유는 말도 안 됐다. 반정부가 납치된 권호은을 통해 홍보부 에스퍼와 접촉할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그 접촉으로 홍보부 에스퍼는 협회를 배신하고 테러할 수도 있다고 상부는 결론을 내렸다.
도인호와 배연우는 현재 배신자로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밀 임무? 도인호는 기가 찼다.
“네 상황 보이지. 갇혀 있잖아.”
호수는 태평한 목소리로 말하며 조금 전 상황을 다시 되새김질했다.
도인호의 숙소로 찾아오는 길. 복도에는 백우경 측 가드 두 명이 붙어 감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호수는 은밀하게 가드 두 명을 처리했다. 이후 숙소로 들어오는 건 간단했다. 현관문이 잠겨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숙소의 공기는 싸늘했다. 헤드셋을 끼고 있던 도인호가 형형한 눈빛으로 호수를 쳐다봤다. 무엇을 하고 있던 건지 한 손에는 신호도 가지 않는 무전기를 들고 있었다.
‘권호은이랑 무전 하고 싶나 보네?’
호수는 주머니에서 가져온 이능력품을 들었다. 안테나 선으로 보이는 것을 도인호 눈앞에 흔든 호수는 턱을 치켜들었다.
‘내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데 어때? 도움을 받고 내 부탁을 들어줄래?’
‘…….’
도인호는 대답 대신 무전기를 건넸다. 여전히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긴 했으나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심정이었다.
지금의 도인호는 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호은이 토끼 인형을 챙겨 간 덕에 도청으로 생사를 확인했지. 그게 없었더라면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랐을 거다.
도청을 눈치챈 건 자신만인지 호은은 한 번도 인형을 통해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도청을 들으며 도인호는 날마다 분노와 슬픔을 삼켜야만 했다. 무력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현실이.
헤드셋에서 들려오는 호은의 물기 젖은 목소리가 버리지 말라고 말할 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백우경이 내린 명령을 어기고 나가려는 순간, 호수가 숙소로 들어온 거였다.
‘권호은 응답해라.’
무전기를 가져가 안테나를 꽂은 호수는 출력 버튼을 눌렀다. 반쯤 넋이 나간 도인호가 무전기를 애타게 쳐다봤다.
[차─ 치지직, 차장님?]
일주일 동안 신호조차 가지 않았던 무전이 연결되었다. 대화를 나누고 있던 호수의 무전기를 뺏어 든 도인호는 뭐라고 지껄이는지도 모른 채 말을 내뱉었다.
‘호은 형. 조금만 기다려요. 우리 형 버린 거 아니니까.’
도청을 통해 반정부 보스가 하는 헛소리를 얼마나 반박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감히 누가 권호은을 버린단 말인가. 그런 개소리 믿지 말라고, 금방 만나러 갈 거라고. 도인호는 진심을 꾹꾹 담아 무전을 쳤다.
그리고 다시 현재.
갑자기 나타나 무전을 연결해 준 호수는 자신이 온 목적과 관계가 있는 건지 현장 보고서를 읽어 내렸다.
“선악율이 이능력을 사용해 최선율과 권호은 그리고 현장에 있던 일반인 남자를 데리고 도주. 이후 지하 2층에서 폭발이 일어나 남아 있던 홍보부와 인사부는 원신을 데리고 급히 탈출…… 이라고 현장 보고서에 적혀 있네.”
호수는 현장 보고서를 한 장씩 넘겼다. 조용한 숙소는 종이 넘기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종잇장이 넘어갈 때마다 도인호의 머릿속 이미지도 한 장씩 넘어갔다.
붉은 잿빛으로 흩날리던 공간. 커다란 그림자는 최선율을 집어삼키더니 이윽고 호은을 덮쳤다.
절대적인 존재를 눈앞에서 놓친 그날. 도인호의 세상이 무너졌다. 호은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누군가를 공격하는 게 아닌 지키는 훈련을 반복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도인호는 지켜야 할 사람을 잃었다.
공단과 협회는 납치된 호은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었다. 이렇게 호은이 방치될 줄 알았더라면 도인호는 일반인이 말려들든 말든 그날 현장을 깔끔하게 폭파했을 거다. 인질이고 뭐고 반정부 보스가 일반인인 척 호은에게 다가가 말을 건 그 순간 모든 걸 다 없애버렸을 거다. 그랬더라면…… 이렇게 가슴이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서 갑자기 나타난 호수가 의심스러웠다. 상부조차 손을 뗀 일을 어디서 뭐 하다가 일주일이 지난 지금 들쑤시고 다니는 건지.
“이해가 안 갑니다. 도대체 여기 왜 온 겁니까? 현장이 끝난 이후 아무와도 접촉 못 하게 다 차단할 땐 언제고.”
“나한테 이해 안 갈 건 없어. 그건 백우경이 명령한 걸 테니까.”
보고서를 다 훑어본 호수는 거실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자기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편하게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내가 온 이유는 하나야. 백우경도 몰라야 하는 비밀 임무를 같이 진행할 에스퍼가 필요하거든.”
“지금 제 꼴이 안 보입니까? 감시자에 이능력구까지.”
도인호의 왼쪽 손목에는 이능력구 하나가 걸려 있었다. 숙소로 잡혀 들어온 날. 이유도 듣지 못한 채 이능력구로 구속됐다.
호수는 왼쪽 손목에 시선을 주더니 “아.” 하고 의미 없는 소리를 뱉었다. 동공이 살짝 커졌다 다시 원래 크기로 돌아온 호수는 재킷에서 이능력구 열쇠를 꺼냈다.
“이능력구는 내가 요청한 거야.”
“……?”
“잊었어? 넌 결정체 이식자잖아. 담당 가이드가 없는 사이에 가이딩이 빠져나가면 누구한테 채워 달라고 하게.”
호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인호의 이능력구를 풀어 줬다. 가이드 워치로 확인한 도인호의 가이딩은 52%였다. 현장을 다녀온 뒤로 한 번도 가이딩을 받지 않은 모양이다. 호수는 도인호의 손을 잡았다.
“내 예상이 맞았네.”
어마어마한 양의 가이딩이 빠져나갔다. 자신이 아니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공격적이었다.
“이 정도면 가이딩 약을 먹어도 별 효과가 없을 테고.”
“그게 무슨 말입니까.”
“널 감당할 가이드는 권호은밖에 없다는 말이지.”
“…….”
“백우경이 널 여기 왜 가둬 놓은 거 같아?”
“그건…….”
“아마 이능력구가 없었다면 넌 지금쯤 가이딩이 많이 부족했겠지.”
“…….”
“권호은을 만나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거야. 시한폭탄 도인호.”
호수는 잡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권호은 만날 때까지 팔찌 차고 있어.”
호수는 도인호에게 검은색 가죽으로 만들어진 팔찌를 건넸다.
“그 전에 폭주하면 곤란하니까.”
호수의 말에 도인호는 팔찌를 손목에 찼다. 이능력구를 찼을 때처럼 가이딩이 빠져나가지 않고 머물렀다.
“비밀 임무를 같이 가 줄 에스퍼를 구한다고 하셨죠.”
“그래.”
“호은 형이 어디 있는지 압니다. 호은 형 구출을 도와준다면 저도 당신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디 있는지 안다고?”
도인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호은에게 줬던 목걸이에는 위치 추적이 심겨 있었다. 위치를 알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상부는 믿을 수 없었고 숙소는 연락망을 다 차단해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호은의 상태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위태로워 보였다. 호수에게 무슨 목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제주도에 있습니다.”
도인호의 말에 호수는 눈썹을 위쪽으로 치켜들었다.
“우연이네. 내 비밀 임무도 제주도로 가야 하는데.”
“…….”
“아, 그러고 보니 임무의 작전명을 안 가르쳐 줬구나.”
호수는 도인호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누가 들으면 곤란하기라도 하다는 듯 그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권호은 구출 작전이야.”
“……!!”
“십분 뒤에 떠날 거니까 준비해.”
“어째서…….”
독단적으로 이런 일을 벌이는 호수의 의도는 무엇인지 의심스러웠다. 마치 그 뜻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호수가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말했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라면 설명이 되려나.”
“……?”
“네가 나에게 부탁한 건 말이다. 63 스퀘어에서 권호은 혈액 채취당했던 거. 이번 일이랑 관련되어 있어.”
“그 말은 반정부는 처음부터……?”
“그래. 처음부터 권호은을 납치하려고 계획했을 거야. 그 녀석들이 지금 꾸미는 일에 권호은이 필요하거든. 난 이걸 너무 늦게 알았고.”
호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모습이 마치 자책하는 것처럼 보였다.
반정부인 타이거가 정부에게 가이드를 요구할 때 조금 더 눈여겨봤어야 했다. 내부에 폭주 예정인 에스퍼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 그들의 함정이었다.
“S등급인 거 숨기지 말걸. 그거 때문에 모든 게 꼬였어.”
반정부를 잡고 나서 열렸던 상부 회의에서 백우경은 권호은 납치 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겨우 D등급 가이드다. 괜히 구출하러 갔다가 반정부 자극하지 말고 타이밍을 기다리자고. D등급 가이드와 협회의 테러 위험 중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판단해 보라며 세 치 혀를 놀리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