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여러 음식 냄새에 속이 욱신거렸다. 토기가 밀려오는 불쾌한 기분과 함께 호은은 눈을 떴다.
“뭐야.”
조금 전에는 없던 낮은 테이블이 침대 옆에 놓여 있었다. 냄새의 원인은 테이블 위에 있는 음식이었다. 한식, 양식, 일식 등 종류와 상관없이 개수로 승부를 보는 거 같은 상차림이었다.
호은은 테이블 구석에 놓여 있던 물병을 챙기기 위해 다리를 움직였다.
“윽!!!”
욱신거리는 왼쪽 발목에 호은은 움직이던 것을 멈췄다.
최선율에게 공격당한 발목은 상처를 치료하기라도 한 건지 붕대로 감겨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오른발을 바닥에 내려 왼쪽에는 최대한 힘을 주지 않은 채 호은은 물병을 집었다.
꽤 오랜 시간 목이 말랐기에 수분을 먼저 채웠다.
“하. 누가 이딴 걸 먹을 거 같아?”
여러 음식이 섞인 테이블을 째려본 호은은 고개를 휙 돌며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다.
분명 한여름이 자기 방으로 갖다 놓으라고 말한 거 같은데 어째서인지 호은은 처음 눈을 떴던 방에 있었다.
“야. 한여름.”
크지 않은 목소리로 한여름을 불러 봤지만, 방은 조용했다.
호은은 천장 구석구석과 방 안을 살폈다. 다행히 감시 카메라는 보이지 않았다. 안심하고 침대 밑에 손을 넣어 무전기를 꺼낸 호은은 이불 안으로 들어가 무전을 켰다.
“여기는 권호은. 누구 들리는 사람 없습니까?”
-지지직
무전기는 지지직 소리만 들리고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여기는 권호은…….”
목구멍 위로 올라오려는 울음소리를 억지로 삼키며 호은은 무전기를 내려놓았다. 이대로 무전을 쳤다가는 울음소리가 들릴 거 같았다.
침대 밑에 무전기를 다시 숨겨 놓자 타이밍 좋게 문이 열렸다.
“으응? 왜 안 먹었어.”
“너 같으면 입맛이 있겠어?”
뻔뻔스러운 낯짝을 들이미는 한여름을 보며 호은은 빨개진 눈가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너라면 좋다고 먹을 줄 알았는데. 옛날부터 잘 먹었잖아. 몬스터 빵도 좋아하고.”
테이블 한쪽에는 빵 종류도 여러 개 있었는데 그중에는 몬스터 빵도 섞여 있었다.
“한여름. 네가 진짜 타이거 보스가 맞아?”
몬스터 빵을 보니 괜히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중학교 시절의 한여름이 이런 어른으로 자랐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맞는데.”
“도대체 왜?”
한여름은 호은의 질문에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홍보부로서 너희를 조사했어.”
왼쪽 다리는 아직도 욱신거렸다. 그 고통 덕에 호은은 지금 이곳이 현실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63스퀘어를 제외하고는 한국에다가 피해준 적이 없었어. 너희가 원하는 건 뭐야? 이제 와 의심자를 납치해가고…… 설마 그 의심자를 정말 살아있는 폭탄으로 쓸 작정이야?”
호은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참으려고 해도 감정들이 튀어 올라 숨이 가빠지기 시작한 거다. 호은은 부디 한여름이 자기 말을 부정해주길 바랐다. 동창이 반정부 보스라는 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살아있는 폭탄? 푸하하. 그런 쓰레기 같은 짓은 협회나 하겠지. 우린 의심자를 죽이려고 데려온 게 아니야.”
“그럼!”
“그건 나중에 ‘그것’을 보여 주며 설명해 줄게. 발목은 괜찮아?”
한여름은 화제를 돌리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붕대가 감긴 왼쪽 발목을 손으로 쓸어내리는 한여름의 눈빛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걸을 수는 있을 거야.”
한여름의 목소리는 다정한 듯했지만, 그 안에 미처 숨기지 못한 가시 돋음이 느껴졌다.
“또 도망치려고 하면 이 정도로는 안 끝날 거니까 엄한 데 힘 빼지 마.”
“뭐? 도망?”
“호은아. 난 너 상냥하게 대하고 싶어. 과거에 네가 날 구원해 준 것도 있으니까. 근데 날 배신하는 건 용서 못 해.”
혼자서 무슨 드라마를 찍고 있는 건지 모를 한여름을 보던 호은의 미간이 점점 좁혀졌다.
“너도 이제 타이거니까.”
“내가? 그딴 걸 한다고 한 적 없거든!”
호은은 밖으로 꺼내진 물고기처럼 펄쩍 뛰어오르다 발목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나, 나 인질이라면서. 협상 같은 거 하면서 안 보내 줄 거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린 이제 한 팀이야.”
“?? 그걸 누가 정하는데.”
“보스인 내가 정하지.”
어리둥절한 호은을 보던 한여름이 휘파람을 불자 밖에 대기하고 있던 사람이 옷과 전통 탈을 들고 다가왔다.
“갈아입힐까요?”
“아니. 그냥 두고 가.”
고개를 바닥으로 숙인 남자는 침대에 물건을 두고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호은은 썩은 표정으로 전통 탈을 들었다.
“이걸 나보고 쓰라고?”
“타이거는 다 써.”
호은은 전통 탈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줬다. 평범한 전통 탈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았다.
호은은 짧은 찰나 고민했다. 이걸 그냥 부러트릴까?
“못 쓰겠어? 아니면 누군가 널 구해 주러 올 거라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
“…….”
호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입 밖으로 소리 내 말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끝까지 가면을 쓰지 않고 손에 쥐고만 있는 호은을 본 한여름의 얼굴은 묘하게 굳어졌다.
“너 되게 순진하다.”
“뭐?”
“순진한 공주님한테 현실을 좀 알려 줘야겠네.”
호은을 가볍게 들어 올린 한여름은 공주님 안기를 한 뒤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계단이 있는 난관에서 호은을 든 채 뛰어내린 한여름은 2층 복도에 가볍게 착지했다.
“재미있는 거 보여 줄게.”
다른 층은 벽면마다 문이 달려 있었는데 2층은 커다란 문 하나만 덜렁 있고 나머지는 다 벽이었다.
“이놈들이 좀 난폭해서 말이야.”
콘크리트로 만든 거 같은 문은 한눈에 봐도 두꺼워 보였다. 일반 사람이라면 여는 것조차 어려울 두께였으나 한여름은 손 하나로 문을 가볍게 열었다.
열린 틈으로 심한 악취와 동시에 사람이 내는 것인지 짐승이 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에스퍼 의심자를 찾았었지? 자 여기 있어.”
“무슨…….”
“에스퍼이면서 동시에 가이드인 멀티를 만들고 있던 중이라서 말이야.”
“…….”
“에스퍼가 제법 많이 필요했어. 의심자까지 데려올 정도로 말이야. 하하. 어때? 끝내주지 않아?”
가벼운 어투의 한여름과 다르게 눈앞의 모습은 끔찍했다. 분명 사람이었을 게 확실한 것들이 본연의 모습을 잃은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저게 의심자라고? 아니, 에스퍼라고?”
한때 사람이었다는 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한 모습이다. 살이 녹아내려 진흙 같은 형상으로 있는 건 괴물이라는 단어로밖에 정의할 수 없었다.
“몰골은 이럴지 몰라도 실험은 나름 성공이야. 에스퍼였을 때 가지고 있던 이능력을 사용함과 동시에 가이딩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거든.”
“원래대로 돌려놔…….”
“응? 이렇게 만든 건 되돌아갈 수 없어.”
“으어어…….”
그들은 뇌까지 녹아 버린 건지 흐느적거리며 커다란 창고를 돌아다니거나 이능력을 내뿜고 있었다.
“우린 이걸로 쓰레기를 처리할 거야. 이봐 그 녀석들 데려와.”
전통 탈을 쓴 채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 두 명이 한여름의 명령에 누군가를 데려왔다. 밧줄에 묶인 남자와 여자는 호은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저 사람들은…… 한여울 부모?”
“부모? 푸하핫. 부모는 무슨. 쓰레기지. 자~ 밥시간이다.”
“으아아아아악!!! 살려줘!!!!!”
살려달라는 말에 반응한 호은이 움직이려고 했으나 한여름 품에서 버둥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바닥에 피가 분수처럼 흥건해졌다. 살인지 뼈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바닥에 떨어지는 광경을 두 눈으로 지켜본 호은의 시선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두 사람에게 향했다. 고작 몇 초였다. 괴물의 가운데에 떨어진 두 사람은 순식간에 괴물에게 먹혀버렸다.
“어째서 저들을… 죽인 거야.”
“쓰레기니까? 내 동생 좀 잘 키우라고 했더니만, 개차반으로 키우고 있었거든.”
“한여울이 동생…….”
혀가 굳어 잘 움직이지 않았다. 한여울과 한여름의 이름을 차례대로 나열한 호은은 두 사람의 성이 같다는 걸 눈치챘다.
“우리 남매는 유전자적으로 너를 좋아할 수밖에 없나 봐. 나도 여울이도 너를 좋아하는 걸 보면.”
끔찍한 현장과 어울리지 않게 한여름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얼굴을 붉게 물들며 환희에 젖은 목소리로 말하는 한여름의 모습이 기괴했다.
“으어어어.”
식사를 끝낸 건지 괴물들은 뭉쳐있던 것에서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방안을 맴돌았다.
“반정부는 도대체 뭘 만드는 거야?”
호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반정부는 고작 2년 전에 만들어진 조직이다. 그런 주제에 이런 끔찍한 실험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이런 끔찍한 걸 만들어서 쓰레기를 없앤다고? 그리고 그 첫 희생자가 한여울의 부모고? 그럴 거면 네가 키웠으면 됐잖아. 애먼 사람을 죽일 바에…….”
“…….”
분노로 몸이 부들거리는 호은을 한여름은 가만히 지켜봤다.
“사람을 저딴 괴물로 만드는 쓰레기 같은 너네랑 내가 같은 팀이 될 거 같아?”
“하하. 쓰레기라니 그건 좀 상처다. 근데 있잖아. 이런 끔찍한 걸 먼저 만든 건 우리가 아니야.”
한여름은 방 안에서 빠져나와 문을 서서히 닫으며 멈춘 말을 다시 내뱉었다.
“한때 이능력자 협회이자 지금은 가이드 공단인.”
한여름은 자꾸만 말을 멈추며 호은의 반응을 살폈다. 이능력 협회가 나오자 호은의 동공이 확장됐다.
“백우경 이사장이 실험하던 거야.”
-쾅
괴물처럼 변해 버린 사람들은 문이 닫힘과 동시에 보이지 않았다.
호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한여름을 올려다봤다. 거짓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타이거 간부 다섯 명은 백우경이 진행한 멀티 실험의 실패작들이고.”
호은의 동공이 쉴 틈 없이 흔들렸다. 타이거를 어떻게든 잡으려고 간섭하던 백우경이 떠올랐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진짜 쓰레기는 우리가 아닌 공단과 협회라는 거지.”
“누가 이딴…… 거짓말을 믿을 거 같아?”
“내 말을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이곳에 있다 보면 내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게 될 테니까.”
“그만 말해.”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판별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호은은 그저 쉬고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호은아. 넌 타이거랑 잘 맞을 거야. 네가 원하던 정의는 이곳에 어울려.”
“…….”
“악한 사람이 아니라 선한 사람만 살기를 너도 바라왔잖아?”
“그만…….”
“타이거는 네가 구원해 줘야 하는 선량한 사람이야.”
두 손을 들어 귀를 막은 호은은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왼쪽 발목은 여전히 통증을 호소했고 머리는 생각이 가득 차 폭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만, 그만 말해. 그만!!!!”
숨이 가빠져 헐떡이며 소리치던 호은은 주변이 조용해지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언제 몸을 움직인 것인지 한여름은 호은을 안은 채 처음 보는 방으로 들어왔다.
푹신한 침대에 앉혀진 호은은 오른발을 사용해 침대 구석으로 도망쳤다.
“너무 몰아붙였나.”
“……나가.”
“으응? 여기 내 방인데.”
호은은 이불을 들어 머리끝까지 덮었다. 한여름 얼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저 불타는 눈동자도 어두운 계열의 남색 머리카락도. 그냥 백우경이라는 존재 자체를 보고 있으면 숨이 턱 막혀 가슴이 답답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의 소리를 못 들은 모양인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한여름이 이불을 들어 얼굴을 내밀었다.
“울고 싶으면 품 빌려줄까?”
“필요 없어.”
“흐응. 쌀쌀맞기는. 일단 오늘은 혼자 자. 내일부터는 안 봐줄 거니까.”
침대에서 내려온 한여름은 겁에 잔뜩 질린 호은을 만족스럽게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