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보스.”
문에 기대선 선악율은 누가 봐도 기분이 나빠 보였다. 험악한 얼굴을 사정없이 구기며 호은을 흘긋 쳐다봤다.
“형 먼저 쓰고 줄게.”
“아 맞다. 걔 회복도 못 하고 있었지? 가져가.”
마치 물건 다루듯 자기를 대하는 두 사람을 보며 호은은 호수가 말한 가이드의 물건 취급이 떠올랐다. 여기서 거절조차 못 하는 현실에 무력감을 느꼈다.
한여름은 깔아뭉개고 있던 것을 비켜 주며 하품을 거하게 내뱉었다.
“하고 나면 밥 먹이고 내 방으로 데려와. 같이 자고 싶으니까.”
“뭐 상황 보고.”
뭘 한다는 거지? 대화에서 철저히 소외된 호은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껏 침대에서 일어섰다.
자신은 현재 납치를 당했다. 다행히 구속되어 있지는 않아 거동에는 문제가 없었다.
말아 올라간 셔츠를 밑으로 내린 호은은 고갯짓하며 다가오라는 선악율을 보며 얌전히 명령을 따르는 척했다.
‘상황을 지켜보다 탈출구를 찾아야겠어.’
한여름과 같이 있으면 머리가 굳어 버리곤 하니 그와 떨어진 시간에 최대한 머리를 많이 굴려야 했다.
옛 동창이자 그것도 괴롭힘당해 자신이 도와줬던 같은 반 친구가 사회악이라 불리는 반정부 보스가 됐다니.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거기다 십 년이나 잊지 않고 자신의 일거일동을 지켜보고 있었다니. 자신이 모르는 사이 십 년이나 스토킹 당하고 있던 것이다.
“하.”
호은은 아무도 몰래 헛웃음을 뱉었다.
자신의 열혈 구독자인 줄 알았던 빵돌이가 한여름인 것도 모르고 항상 감사하다며 댓글을 달았는데. 당장에라도 모든 댓글을 삭제하고 싶었다.
한여름이 소름 끼치고 기분 나쁜 것과 동시에 지금 호은은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반정부에게 납치당한 것도 모자라 에스퍼한테 농락당하는 가이드라니.
같은 남자를 저렇게 끈적하게 만지며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한여름을 보자니 가이딩이 도대체 뭘까 싶었다. 더 짜증이 나는 것은 가이딩을 주고 싶지 않아도 한여름의 접촉 한 번에 쉽게 빠져나갔다. 원치 않음에도 타이거를 도와주는 꼴에 스스로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허튼짓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호은이 다가오자 선악율은 살기를 띠었다. 선악율 그림자는 그의 감정을 대변하듯 크기를 키웠다 줄이기를 반복하며 위협적이었다.
“허튼짓하지 말고 얌전히 따라와.”
“…….”
등을 보이고 걸어가는 선악율은 한눈에 봐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오늘 전투에서 가이딩이 바닥났다는 건 거짓말이 아닌지 자가 치유가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현장은 어떻게 됐을까.’
상황이 어떻게 마무리됐는지 모르겠으니 답답했다. 선악율은 잡힌 반정부 모두를 데리고 온 건가? 우리 쪽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지. 복부가 뚫렸던 배연우 대리님은 무사할까. 치유 에스퍼가 근처에 있었다면 무사하시겠지. 무사하셔야만 하는데……. 그리고 도인호. 설마 내가 없다고 울고 있지는 않겠지. 생각이 멈추지 않고 꼬리를 물며 어지럽혔다. 우울해지는 감정에 호은은 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호은은 주변을 둘러봤다.
공장 내부에 들어온 것만 같은 타이거 아지트는 뻥 뚫린 가운데에 계단이 커다랗게 놓여 있었다. 이동 수단으로 사용하는 용도는 아닌지 엘리베이터가 층마다 배치되어 있었다. 아마도 가운데를 계단으로 만들어 시야를 확보해 각 층이 한눈에 보이게끔 디자인한 거로 보였다.
호은이 있는 곳은 3층이었다. 내려다본 1층은 제조실이라도 있는지 열린 문으로 보인 내부에는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복도 가장 안쪽에 있는 문 앞에 선 선악율은 손잡이를 돌리며 호은에게 으름장을 놨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가이딩만 하는 게 좋을 거야.”
누구 때문에 기분이 아주 안 좋거든. 뒷말은 비아냥거리는 어투였다.
-끼이익
기름칠이 덜 된 철제문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토해냈다. 문이 열린 방 안은 천장 조명을 켜지 않아 어두웠다.
“형. 데려왔어.”
쉽게 발을 떼지 못하는 호은의 등을 밀친 선악율 때문에 호은은 무방비하게 방 한가운데로 던져졌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린다면 살 수 있다. 마치 이것이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호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타닥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방 안은 소파 옆에 놓여 있는 스탠드 조명이 켜짐과 함께 검은색 가죽 소파가 보였다.
“귀신이라도 본 거 같은 표정이네.”
소파에 반쯤 기대 있던 최선율을 확인한 호은은 뒷걸음질 쳤다.
“어딜.”
그러나 몇 발짝 멀어지지도 못하고 선악율에게 막혀 버렸다.
“배연우 대리님은…….”
“대리? 아 그 분홍 머리 말하는 건가. 글쎄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을 안 해서.”
자기와 상관없는 남 일처럼 말하는 선악율을 본 호은은 뒤를 돌아 멱살을 틀어잡았다.
“약속했잖아!!! 열쇠 주면 공격 풀기로!!!”
“캑, 뭔 일반인이 힘이 이렇게 세. 너도 봤잖아? 공격 풀고 형 구하자마자 아지트로 도망친 거. 그 와중에 그놈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내가 확인할 겨를이 어디 있다고.”
분을 삭이듯 콧김을 씩씩 내뱉던 호은은 선악율의 말에 그제야 손을 내렸다.
“지금 멱살 잡고 싶은 게 누구인데. 너 때문에 신이를 구하지도 못하고!!!”
“그만.”
아까부터 바닥에서 꿈틀거리던 그림자가 형상화되려고 하자 최선율이 손을 들었다.
“쳇.”
한 대라도 때릴 것처럼 굴던 선악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호은에게서 멀어졌다. 호은은 분노를 삼키듯 거친 숨만 연신 내뱉었다.
-탁
핑거 스냅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무릎을 노리듯 다가온 가느다란 빛은 직선으로 빠르게 날아오더니 직전에서 꺾였다.
정확히 발목을 관통한 공격에 호은의 복숭아뼈 위쪽이 뼈가 드러날 정도로 살이 파였다. 호은은 비틀거리며 바닥에 넘어졌다.
“크윽.”
바람이 닿을 때마다 살이 따가웠다. 고통 때문인지 손끝까지 덜덜 몸이 떨렸다.
“얼굴을 찢어 줄까 했는데. 그건 나중에 하려고.”
섬뜩한 말을 지껄인 최선율은 선악율을 보고 자신에게 끌고 오라는 듯 시선을 보냈다.
“이거 놔!!!”
선악율의 어깨에 손쉽게 얹힌 호은은 굴욕적인 자세에 손바닥으로 등을 두드렸다. 몸을 움직일 때 상처 난 왼쪽 다리에 힘이 들어가 말도 못 할 고통이 뒤따랐다. 결국 의미 없는 반항은 1분도 가지 못했다.
최선율의 무릎에 앉혀진 호은은 멀어지기 위해 최대한 뒤로 몸을 당겼다.
“이번에도 개처럼 짖어 보지 그래?”
턱을 잡는 최선율에 고개를 돌린 호은은 피부가 부글부글 끓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뭐야. 이 얼굴이 아니었던 건가.”
다섯 시간이 지난 건지 호은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에게 다른 외형을 보여 주던 이능력품의 효과가 사라진 듯했다.
“이 얼굴로 멍하고 짖으면 제법 볼만 하겠는데.”
멀어진 호은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은 최선율에 호은이 고개를 돌리려고 했으나 힘의 차이로 얼굴을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붉은 호은의 입술에 시선을 빼앗긴 최선율이 우악스럽게 입안을 손가락으로 헤집었다.
“으웁!!!”
“하아. 약보다 효과가 좋네.”
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질의 가이딩이 몸에 채워지자 최선율은 호은의 얼굴을 짓뭉개려던 욕망이 점점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본래의 얼굴은 제법 취향이기도 해 질릴 때쯤 망가트리는 게 낫겠다고 조용히 읊조렸다. 그는 나른한 한숨을 내쉬며 호은을 품에 껴안았다.
“악율아 너도 만져 봐.”
“형이 독차지하고 있으면서 뭘 만지라는 거야.”
“아아, 그런가. 그럼 좀만 충전하고 줄게.”
발목을 타고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호은은 바닥에 고여 가는 핏방울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동안 무수히 말했던 호수와 배연우가 말한 가이드 취급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사람으로 취급당하는 것이 아닌 그저 가이딩을 하는 도구였다.
“…….”
도인호가 보고 싶었다. 홍보부가 있는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난 도대체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최선율과 접촉된 피부로 가이딩이 고통스럽게 빠져나갔다. 따끔거리는 촉감이 도인호와 가이딩하던 때와 느낌이 달랐다. 작은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이 몸에 구멍이나 이러다 죽는 건 아닌가 두려움까지 들게 했다.
최선율에게 얼마나 안겨 있었을까. 마치 시공간이 멈춘 듯 더럽게 안 가는 긴 시간을 보내고 이제 끝인가 했더니 이번에는 선악율의 차례였다.
복숭아뼈 위로 난 상처는 더는 피가 흐르지 않았다. 이미 굳어 있는 피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보여 줬다.
“여태까지 가이딩 하던 것들은 쓰레기였어.”
“인정.”
최선율과 선악율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너희한테 그런 말 들어 봤자 하나도 안 기쁘다고 말해 줘야 하는데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
이상하게 평소 가이딩할 때보다 더 많은 양의 가이딩이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몸에 힘은 빠지고 눈은 점점 감겨 온다. 졸리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마치 모든 체력과 기력이 빠져나가 에너지를 모으기 위해 눈이 감기는 것만 같았다.
‘여기서 잠들면 안 되는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써 눈을 부릅떴지만 눈꺼풀이 무거웠다.
“뭐야. 얘 자냐?”
“그러네. 겁대가리 상실했나 봐.”
일정한 박동으로 오르내리는 가슴팍을 본 최선율은 눈썹을 씰룩거렸다.
“형아. 근데 보스한테 안 혼나겠어? 다치게 하지는 말라 했잖아.”
“도망가려고 했다고 말하면 되지. 거기다 발목을 아예 못 쓰게 만든 것도 아니고.”
최선율은 무의식중으로 잘게 떨고 있는 발목을 쳐다봤다.
“흐음. 그럼 다른 쪽도 똑같이 만들어 줄까? 이 자식 때문에 신이 못 구한 것도 빡치는데.”
가느다란 발목을 잡은 선악율은 당장이라도 멀쩡한 발을 꺾으려는 듯 손에 힘을 줬다.
“양발 못 쓰면 귀찮게 계속 들고 다녀야 하잖아.”
“아. 그건 그러네. 역시 형은 똑똑해.”
“다 썼으니까 갖다 놔.”
소파에서 일어난 최선율은 크게 기지개를 켰다. 뼈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긴 했지만 이보다 더 컨디션이 좋을 수 없었다.
선악율은 소파에 기대 잠든 호은에게 다가가 흰 목덜미를 날카로운 이로 잘근잘근 짓씹었다. 자기 형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나른한 숨을 뱉으며 호은의 가슴에 팔을 넣어 껴안았다. 닿는 부위가 넓어지자 차원이 다른 가이딩이 들어왔다. 현장에서 느꼈던 깊은 빡침이 사라진다며 기분 좋은 소리를 뱉은 선악율은 잠든 호은의 볼을 툭 쳤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가이드?”
시체처럼 늘어진 권호은 대답 대신 조그마한 숨소리를 들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