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한여울이 멀어지자 사시나무처럼 떨던 여자가 한여울을 잡으려 팔을 들었다.
하지만 한여울의 걸음이 더 빨랐다. 호은의 코앞에 다가온 아이는 손을 내밀었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은 마치 호은이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 보였다.
길게 뻗은 손을 내밀어 작은 손을 잡자 그녀의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부유하더니 까만 눈동자가 마치 우주처럼 광활해 보였다.
“!!”
호은은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수많은 정보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저씨! 나 이거 다 사도 돼요?
케이크 가게 진열장 앞을 뛰어다니며 한여울이 케이크를 하나하나씩 손으로 가리켰다.
장면은 다시 바뀌었다.
-인호야. 옷은 그냥 우리가 직접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얼마 전 갔던 백화점 VIP룸에서 땀 흘리는 자신과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도인호가 한여울의 옷을 고르고 있었다.
마지막은 장면이 아닌 목소리만 들려왔다.
-우리 남매는 유전자적으로 너를 좋아할 수밖에 없나 봐. 나도 여울이도 너를 좋아하는 걸 보면.
“허억. 허억.”
호은은 거친 숨을 뱉으며 허리를 숙였다.
“권호은 가이드님 괜찮으세요?”
아직 계단을 안 올라간 건지 썬이 호은의 어깨를 다정스럽게 잡아 줬다.
덕분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뒤에 있던 썬에게 기댄 채 호은은 머리카락이 허공에 떠 있는 한여울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의 흑요석 같던 까만 눈동자는 일순간 회색빛이 돌았고 그 눈동자 안으로 자신이 봤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말도 안 돼. 정말 자기 스스로 깨달았다고?”
강힘찬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보던 엄태석은 골프채를 바닥에 내리쳤다.
“인사부에서 알린다. 9월 xx일 2차 발현자 한여울. 에스퍼 각성 확인 완료. 이능력은 미래시.”
엄태석의 주변으로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이능력 증거 수집 완료. 지금부터 한여울을 에스퍼로서 안전하게 보호해 협회로 이송하겠다.”
엄태석이 바닥을 밟을 때마다 파지직, 하고 전류가 바닥으로 흘렀다.
“강힘찬 씨. 이게 대체?”
“인사부 부장님의 특권임다. 현장에서 에스퍼 2차 발현을 확인하면 바로 본사로 보낼 수 있슴다. 한여울이 에스퍼 각성자라서 정말 다행임다.”
“네?”
“방금 보셨잖슴까. 이능력 쓴 거. 이것도 남운수 팀장님 운 덕임까? 그동안 우리가 관찰할 땐 보이지 않더니.”
한여울의 눈동자는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이번에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기라도 하는 듯 호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지금부터 부장님이 한여울 씨를 이능력자 협회로 안전하게 데려가 줄 검다. 전기 구이가 된 박기현과 다르게 상냥하게 말이죠.”
“아저씨. 나중에 봐요.”
멍청히 두 눈만 깜빡이는 호은에게 한여울은 자신이 들고 있던 토끼 인형을 줬다.
“빨리 와야 해요. 그리고 몸조심해요.”
의중을 알 수 없는 말을 야무지게 내뱉은 한여울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엄태석에게 다가갔다.
엄태석이 하늘로 손을 뻗자 둥근 막대기에 번개 모양의 장식이 달린 창이 내려왔다.
“부장님! 이거 챙겨 가십쇼!”
강힘찬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박기현을 쓰레기 줍듯 엄지와 검지손가락만 이용해 잡아다 건넸다.
엄태석은 하늘을 향해 커다란 선을 그리더니 그것이 완벽한 원 모양이 된 순간 스파크와 함께 세 사람이 사라졌다.
“아, 안 돼! 여…… 여울아. 네가 가면 난……. 히, 히익.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가만히 있던 한여울 엄마는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호은을 향해 빌었다.
“저……. 진정하세요. 법적 처벌을 받긴 하겠지만 이렇게 무서워하실 필요는.”
그러나 호은은 말을 끝까지 뱉을 수 없었다.
-콰아아앙!!
아래층 창고 쪽에서 폭발 소리가 들렸다. 가게는 검은 연기와 함께 붉은 불길이 빠른 속도로 번져 나갔다.
조명이 망가져 어두컴컴한 가게 내부는 커지는 불길로 인해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제,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여자의 비명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기절한 한여울 아빠와 손을 싹싹 빌던 여자 아래에 있던 그림자가 점점 커지더니 순식간에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잠깐!!”
뒤늦게 호은이 손을 뻗었으나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라진 두 사람에 당황한 강힘찬이 난관으로 다가가 밑을 내려다봤다.
복부에 피를 흘리고 있는 배연우와 그 앞을 남운수가 막아서고 있었다.
“아쉽게도 법으로는 못 다룰 거 같네요.”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호은이 고개를 돌렸다. 썬은 부부가 사라진 곳을 쳐다보며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뱉었다.
“썬 씨. 아무래도 여기에 더 있으면 위험해질 거 같아요. 빨리 위로 올라가세요.”
“…….”
“자! 두 명씩 올라가던 거 네 명씩으로 바꾸겠습니다. 빨리 올라와요!”
밑이 어수선한 걸 느꼈는지 엄성찬의 분신은 더 늘어 빠르게 일반인을 위로 보냈다. 이제 남은 건 소수 인원밖에 없었다.
썬은 그중 한 명이었다. 호은은 다급하게 그의 팔을 잡아 위로 올렸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불이 너무 빨리 번지고 있슴다. 기름이라도 있는 건지…….”
강힘찬의 말에 불현듯 창고에 있던 드럼통이 떠올랐다.
설마 드럼통에서 쏟아 낸 기름에 불이 붙었나?
그게 사실이라면 폭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거였다.
“저희도 빨리 빠져나가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아무래도 창고에 기름통이 있는 거 같은데. 밑에 있는 사람한테도 알려 줘야!!”
엄태석이 사라짐과 동시에 모든 전류 감옥 또한 없어져 드래곤 조직원과 일반 직원 그리고 미처 피하지 못한 일반인이 불을 피해 계단을 향해 뛰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쇼! 그러다 권호은 씨도 말려들 수 있슴다. 폴 씨한테 부탁해서.”
“허억. 헉. 저 말인가요.”
지친 기색의 폴이 순간이동으로 강힘찬의 앞에 등장했다. 그는 가이딩을 많이 소모한 건지 핼쑥해진 얼굴로 강힘찬의 손을 잡아챘다.
“……폴 씨는 가이딩이 필요해 보이네요. 아무래도 제가 내려갔다 오겠습니다. 선악율이 왜 그 부부를 데려간 건지도 알아야겠어요.”
호은은 내려가는 계단을 확인했다. 계단을 지켜서고 있던 도인호가 보이지 않았다.
뒤에서 강힘찬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애써 무시한 호은은 계단을 서너 개씩 건너뛰었다.
“콜록, 콜록.”
아래로 내려갈수록 심해지는 연기에 마치 63스퀘어 현장에 온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바닥에 굴러다니는 행주가 보였다. 게임 테이블을 닦는 용도인지 허름한 행주를 들어 코와 입을 막은 호은이 아직도 자신을 따라오는 도깨비불을 바라봤다.
“너. 네 주인한테 돌아가. 그리고 나 내려왔다고 전해.”
이능력 주제에 도깨비불은 이상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크게 동그라미를 그린 도깨비불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호은은 사라진 도깨비불을 잠시 바라보다 아직 도망치지 못한 사람을 구해 주기 시작했다.
“여기예요! 이쪽으로 올라가세요!!”
다행히 불은 애먼 가구만 태우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길은 마치 전등을 켠 것만큼 시야를 밝혔다.
호은은 남아 있는 사람 한두 명씩 빠르게 위로 올려보냈다.
“괜찮아요? 걸을 수 있겠어요?”
“흐윽, 네, 네.”
마지막으로 남운수와 선악율 게임의 진행을 맡았던 딜러를 일으켜 세우고 나자 구조를 바라는 일반인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콰앙! 쾅! 콰앙!
“…….”
불길의 중심 속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났으나 기름통이 터지는 폭발음은 아니었다.
호은은 망설임 없이 바닥을 힘차게 밟고 섰다.
불길 안으로 들어가자 뜨거운 바람이 훅하고 주변을 지나쳤다.
지옥을 연상시키듯 시뻘건 불꽃이 위에서 봤을 때보다 더 큰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열쇠 던져. 그러다 네 가이드 죽는다?”
안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호은이 숨을 죽이며 은밀히 거리를 좁혀나갔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검은색 그림자가 커다란 가시처럼 돋아나 배연우의 복부를 뚫고 있었다.
“주……지마.”
배연우가 말을 내뱉을 때마다 복부와 입에서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내렸다.
“마, 말하지 마.”
배연우 앞에 서 있던 남운수는 여태까지 봤던 얼굴 중에 가장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누가 보면 복부 뚫린 게 배연우가 아니라 남운수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야야. 럭키 가이. 빨리 주라고. 열쇠 던지고, 지금 이 자식도 좀 치우고.”
벽에 처박힌 선악율의 양팔은 도인호에게 붙잡힌 상태였다.
도인호는 선악율의 양팔을 손으로 제압하고 있었으며 화르륵 타오르고 있는 푸른 불기둥 안에는 원신과 최선율이 갇혀 있었다.
“크, 크핫. 어차피 나도 쓸 수 있는 이능력은 이제 한두 번이 다야. 보스가 그 녀석들은 꼭 데려오라 해서 힘 좀 썼더니 가이딩이 바닥이네.”
도인호는 자꾸만 입을 놀리는 선악율을 보다 그를 벽 깊숙이 처박았다.
“으윽! 하 씨.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 줘라. 나는 선택지를 주는 거야. 확률 게임을 하는 거지.”
선악율이 말을 내뱉고 있을 때 도인호의 등 뒤로 파란색 용이 서서히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이능력을 쓸 건데 어디다 쓸 것인지 맞추는 거야! 내 선택지는 두 가지야. 하나, 너희가 던진 열쇠를 받고 우리 팀을 데리고 도망치는데 이능력을 쓴다.”
용은 당장에라도 선악율을 공격할 듯 형형한 기세였다.
“둘, 가시의 크기를 키워 가이드를 죽여 형을 저렇게 만든 복수를 한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건지 키득키득 웃은 선악율은 남운수를 보며 세 치 혀를 놀렸다.
“어떻게 할래? 럭키 가이?”
“도…… 도인호……. 공…… 쿨럭.”
배연우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이 희생할 것을 표했다.
끝맺지 못한 문장이었으나 도인호는 알아들은 듯 청염으로 만든 용을 날려 선악율에게 공격했다.
“안 돼!!!”
남운수의 다급한 비명과 함께 바닥에 쇠가 떨어진 소리가 들렸다.
“크큭. 한 명이라도 정이 있어 다행이네.”
용이 자신의 얼굴 코앞에 다가왔을 때 선악율은 자신의 그림자로 숨어 들어가더니 열쇠가 있는 땅에서 다시 나타났다.
“쿨럭, 쿨럭.”
“여, 연우야!”
가시가 사라지자 검붉은 핏덩어리를 배연우가 토해 냈다.
남운수는 급하게 자신의 옷을 찢어 구멍이 뚫린 배를 지혈했다.
선악율이 있었던 벽은 커다란 구멍이 난 상태였다. 도인호는 눈썹 산을 까닥이며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
호은은 박살 난 벽과 그 앞에 서 있는 도인호를 보며 혼란에 빠진 듯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자신이었다면 선악율이 말하는 것이 설령 거짓이라고 할지라도 배연우를 택했을 것이다.
인질은 가이드였다.
아무리 공격당해도 재생하는 에스퍼가 아니라 너무나도 쉽게 죽을 수 있는 가이드.
남운수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배연우는 죽었을 거다.
“누가 악당인지 모르겠네요.”
뒤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호은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못마땅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썬이 태평하게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