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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97화 (97/129)

97화

선악율도 잡고, 한여울의 이능력도 직접 봐야지만 인사부도 홍보부도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료한 게 된다.

“여울아. 아저씨가 안아 줄 테니까 옷 제대로 잡고 있어.”

호은은 주저앉은 상태로 한여울을 끌어다 품에 안았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그런지 반쯤 다리를 폈을 때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아 의아해했다.

“여울이는 뭐 좋아해?”

“딸기 케이크…….”

“그래? 아저씨가 진짜 맛있는 곳 알고 있는데. 끝나면 먹으러 갈까?”

“…….”

말없이 쳐다보는 까만 눈동자는 자신을 해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듯 보였다.

매캐한 담배 냄새와 욕설이 난무하는 공간 속에서 호은은 무해한 웃음을 지으며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손에 감추고 있던 도깨비불을 밖으로 꺼내자 도깨비불이 바닥으로 가라앉더니 마치 길을 안내하듯 움직였다.

“따라오라는 거지?”

-부웅 부웅

대답하듯 도깨비불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뭔가 귀엽기도 하네.”

한여울을 고쳐 안은 호은은 움직이는 도깨비불을 따라갔다.

남운수와 배연우는 선악율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 고전인지 들리는 소음이 심상치 않았다.

“열쇠 어디 있어!!”

“열쇠? 삼켰다 어쩔래.”

“이 미친 새끼들이!!”

악에 받친 선악율과 여전히 여유로운 배연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쪽은 별문제 없는 거 같고.’

지금 문제는 한여울을 도인호에게 맡기고 일반인이 갇힌 전류 감옥에서 한여울의 부모를 꺼내는 거다.

“여울아. 부모님은 오히려 저 감옥에 있는 게 안전할지도 모르는데.”

“아빠 손. 병원 가야 해요.”

“아.”

아빠 손이 망가진 건 언제 봤는지 또박또박 말하는 한여울을 본 호은은 입을 다물었다.

일단 한여울 부모만 빼내서 병원에 보낸다……. 아니,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려나?

-툭

“!!”

도깨비불을 따라 걷던 호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 드래곤 조직원인가? 아니면 우리 쪽 사람?

“궈, 권호은 씨.”

“아. 썬…… 님?”

촬영장에서 팬이라고 말한 남자를 딜러 직원이 썬이라 불렀던 걸 떠올린 호은이 이름을 부르자 남자는 잠깐 정적을 유지하다 뒤늦게 대답했다.

“부, 불이 꺼져서. 어디로 가야 하는 거죠?”

“전 일단 동료에게 합류하려고 하는데. 제 뒤로 쫓아오세요.”

“네, 네. 그나저나 아이를 구하셨군요.”

“네. 아직 완벽하게는 아니지만요.”

호은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한여울이 처음 듣는 목소리에 궁금하기라도 했는지 몸을 움직였다.

“……아, 안녕.”

썬은 한여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뚫어져라 썬을 쳐다보더니 대답 없이 다시 호은의 가슴팍에 얼굴을 숨겨 버렸다.

“…….”

충격받은 듯 가만히 멈춰선 썬의 팔을 툭툭 건든 호은이 움직이라 재촉했다.

도깨비불은 어딘가 불만족스러운지 썬의 주변을 뱅글뱅글 돌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여기 사람 있으니 잡아가라는 듯 말이다.

“도인호.”

으름장 내듯 호은이 이름을 부르자 도깨비불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앞으로 나아가 길 안내를 시작했다.

마침내 도인호 앞에 도착한 도깨비불이 위아래로 통통 튀었다.

“호은 형.”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도인호는 호은의 어깨를 감싸 쥐더니 벽 쪽으로 데려갔다.

덕분에 따라오던 썬은 어정쩡하게 뒤에 서성이는 모습이 되었다.

“다친 곳은 없죠?”

“난 괜찮아. 그나저나 부장님이랑 다른 인사부 직원은?”

“밖에 지원팀 왔다고 해서 현재 전류 감옥에서 밖으로 이동시키고 있습니다.”

낯선 목소리가 들리자 한여울이 호은의 셔츠를 세게 쥐었다.

“여울아. 여기 또 다른 토끼야.”

“??”

같은 팀이라고 알려 주기 위해 미리 설명했던 토끼를 들먹였다. 한여울은 커다란 덩치의 도인호를 작은 눈으로 훑더니 셔츠를 세게 쥐었던 손에 힘을 풀었다.

“한여울 데리고 위쪽으로 가세요. 저는 밑에 있는 반정부가 못 올라오게 계단을 막고 있겠습니다.”

호은의 뒤를 따라가려는 썬에게 도인호가 팔을 뻗었다.

“……할 거 없으면 그쪽은 밑에 남아 있어도 됩니다.”

“무슨 소리야 인호야. 일반인이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은 도인호는 호은이 뭐라하자 미간을 찌푸리며 썬을 계단 쪽으로 밀었다.

“그대로 쭉 올라가시면 됩니다.”

“흐음. 네에.”

도깨비불은 썬을 뒤따라가는 호은의 옆에 있었다. 마치 호은에게만 빛을 보여 주겠다는 것처럼.

위쪽으로 천천히 올라가자 엄태석과 강힘찬이 전류 감옥을 없앤 뒤 안에 있던 사람 한 명 한 명 위로 넘기고 있었다.

더 위로 시선을 올리자 어느새 합류한 건지 모를 엄성찬이 있었는데 특이한 건 엄성찬이 여러 명이라는 것이었다.

“이능력이 분신이라도 되나.”

여러 명의 엄성찬이 일반인을 통솔하고 폴은 두 명씩 손을 잡아 순간 이동을 하고 있었다.

“썬 씨. 저쪽으로 들어가시면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 거예요.”

“권호은 씨는요?”

“저는 아직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요.”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선 썬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호은을 눈에 담았다.

“히어로는 역시 멋지네.”

멀어진 호은의 귀에는 닿지 않은 말이었다.

“부장님!”

엄태석을 발견한 호은은 급하게 그를 불러세웠다.

“한여울 부모 어디 있어요?”

“저쪽에 대기 중이라네.”

엄태석이 가리킨 방향을 보자 강힘찬이 있는 곳에 일반인 다섯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엄마…….”

호은의 품에서 버둥거린 한여울을 내려놓자 그녀는 한걸음에 부모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여, 여울아.”

한여울의 이름을 부른 여자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여자의 얼굴에 묘한 위화감을 느낀 호은이 다가가려는 순간 강힘찬이 나타났다.

“오셨슴까?”

“네. 지원하러 온 본사 사람은 위쪽에 있는 건가요?”

“맞슴다. 일반인 인질을 이송 중임다. 위쪽에 올라가면 대기하고 있는 엄성찬 팀장님이 기억을 지우고 있슴다.”

“기억이요?”

“이사장님 명령임다. 현장을 어디까지 전달받으신 건지, 인질 먼저 이송하라고 하시는 게.”

“설마 인질 중에 문제 될 만한 사람을 빼 두는 건 아니겠죠?”

내가 누군지 아냐며 바락바락 소리치던 사람이 떠올랐다.

이번 현장은 마무리되는 대로 경찰에게 넘길 예정이었다. 도박과 마약을 저지른 범죄자는 죗값을 치러야 했는데 그마저도 돈이 많은 사람은 빠져나갈 것만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슴다.”

“하.”

호은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현장을 지휘할 거면 저런 쓸데없는 명령이 아니라 좀 더 현장에 유익한 명령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이사장 지위는 어떻게 먹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나저나 한여울 부모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제가 듣기엔 저분들 반정부와 단단히 엮인 거 같던데.”

“그게 무슨 말이지.”

골프채를 든 채 인질을 위쪽으로 보내고 있던 엄태석이 대화에 참여했다. 호은은 밑에서 알게 된 사실을 빠르게 전달했다.

“한여울을 입양한 건 전부 반정부의 계획이었던 거 같습니다. 듣기로는 돈까지 지원받으며 키웠던 거 같더라고요. 혹시라도 이능력 증상을 보이면 말하라는 조건도 있었고.”

“에스퍼로 각성한다는 확실한 근거가 없을 텐데. 그 정도로 철저하게 관리했다는 게 이상하군.”

깔끔하게 정돈된 턱수염을 만지작거린 엄태석은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여울 아빠 손은 좀 괜찮은가요? 완전히 으스러져서 잘못하다간 손을 못 쓸 거 같던데.”

“위쪽에 우리 쪽에서 준비한 구급차가 대기하고 있다네. 일반인이자 그것도 범죄에 연루된 자를 치유 에스퍼가 고쳐 줄 순 없으니 병원으로 이송시킬 예정이라네만.”

엄태석은 한여울을 쳐다보고 있었다.

동상처럼 굳어 있는 엄마의 어깨를 잡고 있던 한여울은 아무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뭐라 말하고 있었다.

“한여울은 위로 보낼 수 없다네.”

“네?”

“위로 보낸 자들은 기억을 지우고 있다고 했지? 한여울은 아직 에스퍼 각성자라는 증거가 없는 상태라 올라가게 되면 그녀도 일반인으로 분류되어 기억을 지우고 다시 현실로 돌아가는 거라네.”

“하지만. 분명 에스퍼 각성자가 맞아요! 아니면 반정부가… 이렇게까지 나설 이유가 없잖아요.”

목에 핏줄이 돋을 만큼 소리친 호은은 혹시라도 한여울에게 들릴까 봐 급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회사의 방침이라네. 일반인인 한여울의 기억을 지우고 그녀를 집에 보내 준다. 거기까지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이지.”

“다른 방법은요?”

“위쪽으로 보내지 않고 현장이 마무리될 때까지 그녀의 이능력을 확인한다. 이렇게 두 가지라네.”

호은의 단정한 미간으로 얇은 주름이 잡혔다. 아랫입술을 사정없이 깨물자 피 맛이 느껴졌지만,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렇다고 저 어린아이를 반정부가 있는 위험한 현장에 놔두라고요? 저희가 지킨다고 하더라도 만일이라는 게 있잖아요! 이능력에 휘말려 다치거나……, 아니면 반정부에 뺏길 수도 있고요.”

“…….”

쏘아붙이듯 말을 내뱉은 호은을 강힘찬이 말렸다.

“어쩔 수 없슴다. 인사부는 엄격하게 회사 규율을 따름다. 사실상 에스퍼가 아닌 일반인을 현장에 계속 두는 것 또한 규율 위반임다.”

흐트러진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호은은 답답한 한숨을 내뱉었다.

규율을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멍청한 사람이 만든 게 틀림없다.

“아저씨?”

시선을 느낀 건지 한여울이 호은을 돌아봤다. 토끼 무늬가 그려진 잠옷을 보고 있자니 그녀와 현장이 더더욱 어울리지 않았다.

“엄마랑 인사는 잘했어?”

한여울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은은 고민에 휩싸였다. 현장은 위험하다. 지금이라도 그녀를 위로 보내고 싶었으나 그거야말로 반정부가 원하는 시나리오일 게 분명하다.

“참고로 현장이 끝날 때까지 한여울의 이능력을 보지 못하면 다시 저희는 관찰만 하는 상태로 돌아갈 검다.”

강힘찬이 선택하라는 듯 입을 열었다.

-쿠당탕탕

싸움의 결판이 나지 않은 건지 밑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말발로는 배연우가 이길지 몰라도 역시 선악율의 힘을 제압하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밑에서 들리는 전투 소리가 꼭 타이머 소리처럼 들렸다.

제안 시간 내에 선택하지 않으면 폭탄이 터져 버리는 타이머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위험한 현장에 한여울을 계속 둬야 하는 건가? 지하 2층에서 무전을 줬을 때만 하더라도 그녀가 에스퍼가 맞는다고 확신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눈에 보이는 증거라면…….

“이능력을 강제로 보이게 할 수는 없는 거죠.”

“본인의 의지가 아닌 이상 어렵슴다. 저도 잘 모르지만, 대부분 본인이 에스퍼라는 걸 인지하는 순간 컨트롤할 수 있다고는 들었긴 하는데…….”

한여울의 나이는 고작 열 살이다. 열 살이 본인을 이능력을 쓰는 에스퍼라 인정한다?

지금도 미래 보는 이능력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허술한 토끼 이야기를 꺼낸 호은이었다. 어린아이에게 이번 일을 제대로 설명하고 이능력을 보여달라고 설득할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호은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을 때 차분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랑 있으면 내 미래는 아무것도 안 보여요.”

“…….”

한 발짝씩 한여울이 호은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아저씨랑 있으면 미래가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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