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난 운이 좋은 편이라서 말이야. 절대 질 리 없지만, 만약 진다고 하더라도 왼팔로 너 같은 것쯤은 제압할 수 있으니까~”
“…….”
선악율은 바닥을 흘긋 쳐다봤다. 여기에 있는 놈들은 자신이 그림자를 어디까지 이용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림자로 앞을 볼 수 있다는 걸 상상도 못 하고 있을 거다.
카드를 섞을 때 그림자로 확인하고 높은 숫자의 카드를 가장 위쪽으로 올려 뒀다. 당연히 그 카드는 자신이 집은 상태다.
“야. 너 이리 와서 심판해.”
“저, 저요?”
선악율은 테이블 밑에 숨어 있던 딜러를 불렀다. 그는 겁에 질린 얼굴로 힘겹게 일어섰다.
“그래. 저 밑에 있는 칼 들고, 공개된 카드 중에 숫자가 낮은 쪽의 팔을 잘라 내면 돼.”
딜러는 바닥에 떨어진 단도를 들었다. 덜덜 떨리는 손 때문인지 단도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후.”
선악율이 숨을 내뱉자 단도의 날 부분에 검은색 오로라가 씌워졌다.
“이거면 일반인이 하더라도 깔끔하게 도려질 거야.”
“히익.”
딜러는 검은색으로 꿀렁이는 단도에 숨을 삼켰다. 불길해 보이는 단도를 당장이라도 버리고 싶은 눈치였다.
“심판은 딜러가 보고 자르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호은은 안쓰러울 정도로 떨고 있는 딜러를 보더니 손을 들어 선악율이 있는 곳으로 갔다.
“악율아, 저 새끼 이따가 나한테 넘겨. 죽여 버릴 테니까.”
감옥에 갇힌 최선율이 호은을 보자 어금니를 까득거리며 말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선악율은 어느새 앞으로 다가온 호은을 보고 턱을 치켜들었다.
“흐음? 내가 뭘 믿고 너한테 맡겨?”
“일반인에게 칼을 휘두르게 할 수는 없어요. 믿지 못하면 게임은 왜 합니까? 허튼짓 안 할 테니까 진행하죠.”
남운수와 선악율 가운데에 선 호은이 딜러에게 칼을 넘겨받았다. 한여울은 자신의 옆에 선 호은을 올려다봤다.
“…….”
단도를 쥔 손에 땀이 고였다. 남운수 팀장은 왜 말도 안 되는 내기를 한 걸까? 이건 영락없는 운 게임이다.
평소 운 나쁜 남운수가 굳이 머리 쓰는 게임도 아닌 오로지 운으로만 승패가 갈리는 해당 게임을 제안한 게 이상했다.
“그래. 허튼짓하면 바로 모가지다. 자, 딜러 시작해.”
“이, 이번 게임은 각자 한 장씩 카드를 뽑아 상대방보다 더 높은 숫자를 가진 사람이 승리하는 게임입니다…….”
딜러는 침을 꿀꺽 삼켰다. 테이블에는 열쇠를 쥐고 있는 남운수의 오른손과 한여울의 손을 잡고 있는 선악율의 오른손이 올라와 있었다.
“지는 분은 페널티로 파, 팔 한쪽을 잃는 조건입니다. 카드는 조금 전 각자 뽑은 카드로 진행하는 거 도, 동의하십니까?”
남운수와 선악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딜러는 심장을 손으로 부여잡은 채 호흡을 정리하고 마지막 한마디를 뱉었다.
“카드 오픈.”
먼저 카드를 오픈한 건 선악율이었다.
“스페이드 10!”
“내 승리네?”
남운수의 오른팔을 붙잡은 선악율이 호은을 보며 안 자르고 뭐 하냐고 물었다.
“아, 아직 저는 카드 공개 안 했는데…….”
“해 봤자 나보다 높은 카드가 나올 리 없잖아!”
“그래도 오픈하기 전까진 게임이 끝난 게 아닙니다. 팀장님, 공개해 주세요.”
남운수는 테이블에 놓인 자신의 카드를 천천히 뒤집었다.
선악율은 속으로 비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어차피 승리는 자신이다.
섞었던 카드 중 스페이드 10은 자신이 맨 위에 올렸고 맨 밑에 있던 카드가 스페이드 J.
남운수가 이기려면 적어도 무늬가 같은 스페이드가 나와야 했다. 거기다 이미 높은 숫자인 10과 J가 빠진 상태니 자신이 뽑은 카드 밑에 카드가 에이스, 킹, 퀸 중에 나올 확률은 과연 몇 퍼센트나 될까?
남운수가 뽑은 카드는 그림자로 보지 않아도 될 만큼 선악율은 자신의 승리를 자신했다.
“스, 스페이드 K.”
“?!!”
“!!”
선악율과 호은은 동시에 놀란 얼굴로 카드를 확인했다. 남운수 팀장님이 이겼어? 운 게임을? 매번 재수 없게 넘어지던 팀장님이?!
“호은아. 뭐 하냐.”
귓가에 들려오는 배연우의 목소리에 호은은 칼을 들어 깔끔하게 사선으로 내리꽂았다.
“으아악!!”
비명을 지른 딜러는 주저앉았다. 선악율은 바닥으로 떨어진 자기 팔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호은은 이 틈을 타 한여울을 안아 들고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말도 안 돼!! 수작 부렸지?! 어떻게 나보다 더 높은 카드가 나와!! 말도 안 된다고!!!”
“큽, 크하하, 으핫, 아 존나 웃기네. 야 너 뭐라 그랬지? 운이 좋다고?”
배연우는 소리 지르는 선악율을 보며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앞으로 허리를 숙였던 그는 허리를 세우더니 눈물이 고인 눈가를 닦았다.
“여긴 이능력이 행운인걸?”
배연우가 쳐다보고 있는 건 부끄러운 듯 홍조를 띠고 있는 남운수였다.
한편 한여울을 데리고 커다란 게임 테이블 밑으로 도망친 호은은 작은 그녀의 몸을 가슴팍에 숨겼다.
머리만 살짝 들어 올려 상황을 지켜보자 실성한 듯 웃음을 내뱉는 배연우의 말이 들렸다.
“푸하, 아, 진짜 골 때린다. 네가 백 번을 덤벼도 백 번 다 이 녀석이 이길걸?”
배연우는 목에 흐르는 피를 손으로 무심하게 훑었다.
“럭키 초이스.”
남운수가 들고 있는 카드는 노란빛으로 테두리를 빛내고 있었다.
‘설마 팀장님 이능력이 행운이라니.’
호은은 한여울을 안고 있는 게 아니었다면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리고 있었을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게 남운수는 불행의 아이콘이지 않은가? 길을 걷다 넘어진 상처만 해도 꽤 될 거다. 그런 남자의 이능력이 행운?
“……숨 막혀요.”
“어어? 아 미안.”
잠시 생각에 빠졌던 호은은 한여울의 말에 힘주고 있던 팔을 풀었다.
“여울아, 다친 곳은 없어?”
“…….”
호은은 자신을 경계하듯 쳐다보는 커다란 눈망울에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인형 탈을 쓰고 만나서 그런지 못 알아보는 거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한쪽 손에는 선물로 줬던 토끼 인형이 들려 있었다.
“토끼네?”
호은의 말에 한여울은 경계하듯 토끼 인형을 품에 끌어다 안았다.
“음. 여울아 나 누구인지 모르겠어?”
한여울의 작은 머리통이 좌우로 흔들렸다.
“나야. 토끼.”
호은은 손으로 토끼 귀 모양을 만들더니 머리 옆에 붙여 접었다 폈다.
“토끼?”
한여울은 그제야 호은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 봤다. 어린아이가 봤을 때 호감 갈만한 표정을 짓기 위해 연신 눈꼬리를 접어 봤지만 한여울은 휙 고개를 돌렸다.
이럴 때는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거지? 안절부절못한 호은이 우선은 안쪽 상황을 더 지켜보기 위해 고개를 빼꼼 들었다.
“사람 병신 취급하고는 말이야.”
선악율의 주변으로 그림자가 모이며 점점 크기를 키워 나갔다. 뭐 하려는 거지.
호은이 숨을 죽이고 있던 순간 천장 쪽으로 번개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더니 전등이 모조리 깨져 버렸다.
“꺄아악!”
암전이 되어 버린 내부 곳곳에서 비명이 들렸다.
엄태석이 만든 전류 감옥의 빛을 제외하고 더는 사물에 그림자가 지지 않았다.
“아저씨.”
밑에서 잡아당기는 작은 손에 호은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도와줘요.”
“어?”
한여울이 토끼를 꽉 껴안은 채 말했다.
“우리 엄마랑 아빠.”
“…….”
“저기서 꺼내 줘요.”
“……여울아. 여울이네 부모님은 나쁜 사람이야.”
호은은 어린아이의 눈높이에서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할지 몰라 입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했다.
너희 부모는 너를 이용하려고 했어. 잘은 모르겠지만 네가 에스퍼인 걸 알고 키우고 있던 거야.
이런 식으로 말을 해야 하나? 이걸 열 살짜리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토끼 인형을 내밀고 있는 한여울에게 호은은 아침에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내가 준 토끼 인형 있지? 무슨 일 있으면 토끼 인형에게 도와 달라 말하면 돼. 그럼 내가 구하러 갈게.’
한여울이 내밀고 있는 인형은 마치 호은이 했던 약속을 지키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저는 가족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사방이 어두워 한여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호은은 조심히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역시나 눈물로 축축했다.
아직 어린아이다. 새로운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어도 가족이 있다는 그 소속감을 그녀가 모를 리 없다.
“나쁜 사람이어도?”
“…….”
“여울이를 사랑하지 않아도?”
“…….”
한여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울아. 진짜 가족은 그런 게 아니야. 매끼 맛있는 밥을 먹이고 싶어 하고 좋은 옷을 입히고 싶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 주고 싶어서 밖에 돌아다니고, 무엇보다 함께 있고 싶어서 시간을 만드는 게 그런 게 가족이야.”
“……가짜 엄마 아빠잖아요. 난 그렇게까지 바라지 않아요.”
한여울은 토끼 인형에 얼굴을 묻더니 웅얼거리며 말했다.
“난 돌아갈 곳이 필요해요……. 보육원이 아니라.”
한여울의 말에 호은은 숨을 들이켰다. 돌아가고 싶은 장소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가짜 부모가 있는 집이 자신이 돌아갈 곳이라 말하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알겠어. 너희 엄마 아빠는 내가 꺼내 줄게.”
“…….”
“그리고 돌아갈 장소도 만들어 줄게. 부모님 곁이 아닌 다른 곳으로.”
“왜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순수한 질문이었다. 호은은 자신도 왜 이렇게까지 그녀가 신경 쓰이는지 모르겠다.
단순히 보호자가 없는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그녀를 구하는 것이 정의이기 때문에?
“토끼는 외로움이 많거든.”
“??”
“그래서 새로운 가족이 필요한데. 여울이가 함께해 줄래?”
스스로 드는 의문에 답을 내리기 어려웠으나 호은은 한여울이 안심할 수 있도록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약속은 지킬게.”
두 사람 사이로 작은 크기의 도깨비불이 반짝였다.
호은은 손으로 도깨비불을 숨겼다. 가뜩이나 전등이 나가 주변에 새까매졌는데 파란색 불이라니.
누가 볼까 봐 손안으로 숨긴 불은 마치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것처럼 열기를 머금고 있지 않았다.
“……여울아. 너 미래를 보는 능력 있지.”
도깨비불의 기능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쩐지 호은은 지금 내뱉는 목소리를 도인호가 듣고 있을 것만 같았다.
“오늘 보여 줄 수 있어?”
“…….”
“그래야 우리가 널 지켜줄 수 있어.”
“우리?”
“여울이 지키려고 많은 토끼가 왔거든. 음…… 토끼처럼 생기지는 않았는데. 마음만은 토끼야.”
“토끼 좋아요.”
작은 손으로 토끼 인형 털을 매만지는 모습을 바라본 호은은 한여울을 따라 인형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확실히 각성한 에스퍼가 분명하다.
현재 가게에 있는 반정부는 최선율, 선악율, 원신으로 총 세 명.
-쿵
배연우가 있던 쪽에서 테이블이 넘어지고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저기는 이미 전투가 시작된 모양이다.
여기서 선악율까지 잡으면 홍보부의 임무는 성공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한여울이 이능력을 쓰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면.
‘협회에서 한여울을 보호해 줄 명분이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