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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94화 (94/129)

94화

원신의 목에 막대기를 갖다 댄 호은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정의의 히어로가 어린아이 죽이는 거 본 적 있어?”

따사로운 햇살같이 미소를 짓고 있는 호은의 얼굴은 원신에게 공포로 다가왔다.

-철컥

원신의 손에 이능력구를 채운 호은은 그를 들어 최선율이 있는 벽 쪽으로 집어 던졌다.

“크흑, 뭐야. 일반인이 무슨 힘이…….”

던져진 원신을 받아든 최선율은 천장을 올려다봤다.

“으…… 내가 이능력만 통했어도!”

원신은 억울해졌다. 이능력도 안 통하고 에스퍼의 힘을 자유롭게 다루는 이상한 가이드가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호은은 떠들고 있는 타이거를 무시한 채 도인호에게 뛰어갔다.

“인호야 괜찮아?”

“회복하고… 있습니다.”

피 묻은 도인호의 턱을 닦아 주며 호은은 서둘러 도인호의 손을 잡았다.

감싸 쥔 손으로 가이딩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아까 전 막대기에서 가이딩을 가져가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이럴 작전이었어?”

“믿었으니까요.”

“뭐?”

“최선율의 이능력은 위험합니다. 형이 하나라도 맞았다면 쓰러졌겠죠. 그렇다면 역시 제가 방패 역할을 하고 공격은 형이 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호은은 도인호가 쓰러지고 나서도 막대기를 감싸고 있는 이능력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아니, 오히려 최선율에게 잡혔던 순간 지금이라며 공격 타이밍을 알려 주듯 더 많은 이능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공격을 제대로 못 했으면 어쩌려고.”

“아니요. 그럴 리 없습니다.”

도인호는 벽에 처박힌 최선율과 원신에게 시선을 줬다가 곧바로 호은에게 돌렸다.

투박하면서 고운 손이 호은의 뺨을 매만졌다. 피로 얼룩진 흰 얼굴을 닦아낸 도인호의 손에는 피가 묻어나 있었다.

“빨리 제대로 된 이능력품을 주고 싶어요.”

“……그만 말하고 가이딩이나 받아 가.”

도인호는 다친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에 안도감이 들었다. 자신의 이능력으로 호은이 몸을 지켰다. 다치지 않았다. 그 사실에 깊은 만족감이 서리려고 할 때였다.

호은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가 빠르게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치지 않은 게 기쁘지 않은가? 자세히 보니 호은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최선율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호은의 마음을 괴롭히는 거 같았다.

도인호는 호은을 달래듯 살려줘서 고맙다고 연신 속삭였다.

“…….”

가이딩 퍼센트가 안정권이 될 때까지 도인호를 껴안아 주던 호은은 50%가 넘는 것을 확인하고 일어났다.

아쉬운 표정을 애써 갈무리한 도인호는 호은을 따라 일어나 최선율과 원신의 앞에 섰다.

“데려가죠. 위쪽에 가면 저들을 가둬 놓을 곳이 있을 겁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위에는 원신 이능력에 당한 사람이 많다고 했지.”

도인호는 최선율을, 호은은 원신이 차고 있던 이능력구를 끌어당긴 채 창고 밖으로 나갔다.

***

창고 밖으로 나가자 보이는 것은 전류가 흐르고 있는 감옥이었다. 안에는 일반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무더기로 갇혀 있었다.

“이새끼가. 그냥 처맞을래? 도망갔다 더 처맞을래?”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오자 호은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삼단봉을 들고 있는 배연우가 문신한 남자를 패고 있었다.

“악!! 알았다고, 그만 하라고예!”

배연우에게 맞던 남자는 결국 도망치던 것을 멈췄고 옆에 있던 남운수에게 순순히 밧줄로 묶였다.

“이게 무슨 상황…….”

호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난장판이 된 가게를 맞이해야 했다.

다들 왜 안 내려오나 했더니만 바빴구나. 응. 그랬네. 빨리 내려오기 어려운 상황이네.

“한여울 부모는 저쪽에 있는 거 같습니다.”

도인호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자 일반인이 들어간 감옥에 한여울 부모도 있었다.

도인호는 비어 있는 공간에 최선율을 던졌다. 호은도 원신을 들어다 최선율의 옆에 앉혔다.

“아가. 샌드웨지로 주게나.”

“여기 있슴다.”

들려오는 또 다른 익숙한 목소리에 아는 척을 하려고 하자 도인호가 조용히 호은을 끌어다 타이거가 있는 곳에서 멀어졌다.

강힘찬은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골프 가방 앞에 서 있었는데 그 안에서 골프채를 꺼내 엄태석에게 줬다.

엄태석은 받은 채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자세를 잡았다.

-치직

아무것도 없던 바닥에 번개로 만든 직사각형의 인조 잔디 모양이 생기더니 그 위로 골프공이 생겼다.

엄태석은 쥐고 있던 골프채를 앞쪽으로 움직여 살짝 힘을 줬다. 허공으로 가볍게 부유한 골프공은 타이거가 있는 앞으로 떨어지더니 데구루루 구르다 최선율의 발에 닿고는 멈췄다.

-파지직

골프공에 응축되었던 전류가 퍼져 나가 감옥을 만들었다. 강힘찬이 손뼉을 치며 나이스샷이라 외쳤다.

“우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호은은 도인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저거 봤어? 뭐야? 저것도 이능력품?”

대답은 도인호가 아닌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전류 감옥이라는 거지.”

“대리님!”

삼단봉으로 목 부분을 툭툭 치던 배연우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호은을 위아래로 훑었다.

“피는 다른 사람 건가.”

“네??”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짓는 호은을 보며 도인호가 뺨에 튀긴 피를 손으로 대신 문질렀다.

“아. 이거…… 제 피 아니에요.”

“그럼 다행이네. 도인호만 보낸 게 불안했거든.”

호은에게서 시선을 뗀 배연우는 감옥에 갇힌 타이거 두 명을 보며 목에서부터 차오르는 웃음을 애써 참아 냈다.

“드디어 잡았네.”

배연우는 전류 감옥 안에서 소리 지르며 발길질하는 최선율을 아련하게 쳐다봤다.

싸우다 벗겨진 가면 때문에 최선율은 현재 민얼굴이었다.

“최선율. 이렇게 생겼구나. 그렇구나…….”

가면 속 얼굴은 처음 보는 건지 배연우는 유난히 최선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난생처음 동물원에 가 우리에 갇힌 동물을 구경하는 어린아이 같은 눈빛이었다.

“뭘 봐. 개새끼야! 구경났냐?!”

“그래. 입도 험하구나. 근데 율형제면 둘이 다닐 텐데 동생 쪽은?”

“한여울 잡으러 간 거 같은데 안 왔습니다. 폴 씨는요?”

“무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도중에 끊겼어. 한여울 보호는 성공한 거 같은데.”

“폴 씨는 무사하시겠죠?”

“괜찮을 거야.”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나오던 아지트는 다른 의미로 어수선해졌다. 전류 감옥에서 도망치는 사람들과 처음 보는 이능력에 놀란 비명.

호은이 고개를 바쁘게 움직이며 둘러보자 배연우가 설명하듯 입을 뗐다.

“반정부 만났다는 무전 받고 1층 술집 손님은 전부 내보냈는데, 하필이면 박기현이 눈치 까고 도망치는 바람에 지하 1층 쪽은 일반인도 다 같이 저렇게 잡은 상태야.”

바텐더 바가 있는 곳 전체로 전류 감옥이 만들어져 있었다. 박기현은 이능력 구속구인 수갑을 찬 채 갇혀 있었다.

“저놈들은 약했으니까 그대로 경찰에 넘기긴 할 건데. 보시다시피 부모가 한자리하는 놈이 많아서 어떻게 처리될진 모르겠네. 세상이 말세야. 어린것들이 부모 믿고 저 지랄하는 거 보면.”

“지하 2층에 있는 자들도 그럼 신고당하는 건가요?”

“당연하지. 불법 도박이잖아.”

지하 1층은 돌아다니는 사람 없이 모두가 전류 감옥에 갇힌 것과 다르게 지하 2층은 조직원을 포함해 일반인들도 제법 돌아다녔다.

“빨리 남아 있는 놈들 넣어 놓고 현장 마무리하자고. 반정부 저 새끼들 동료 부르기 전에.”

배연우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던 호은은 아직 감옥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 중 구석에 조용히 쭈그려 앉아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권호은. 너는 일반인들 모아다가 엄태석 부장님께 데려가고. 나머지는 야야, 저 새끼 튄다. 드래곤 놈들 못 도망가게 다 잡아!!”

뒷말을 다급하게 끝내는 배연우와 동시에 홍보부 모두 흩어졌다.

“저기…….”

게임하고 있을 때는 안경을 안 썼던 남자가 지난번에 봤던 뿔테 안경을 쓴 채 가만히 있었다.

“사, 살려 주세요. 저, 저는 여기 처음 온 건데…….”

호은은 바싹 말라가는 입술을 혀로 핥았다.

팬이라는 말은 왜 들어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지금 이능력품으로 모습을 둔갑하고 있어 남자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를 텐데 말이다.

“정말 처음 온 거 맞아요?”

호은은 남자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구부려 앉았다.

“네……. 치, 친하게 지내던 거래처 사장이 소개해 줘서 따라온 것밖에 없는데. 아, 아니다. 그래도 이상한 걸 눈치챘으면서 있었던 게 문제겠…….”

말을 하던 남자가 믿어 달라는 듯 호은의 팔을 잡았다 급하게 손을 내렸다. 호은은 닿았던 팔에 느껴지는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권호은 씨?”

“예?”

“권호은 가이드님이시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뺀 남자는 호은의 팔을 다시 잡았다.

“어?? 아, 아니. 어떻게 알아보시는…….”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더듬자 남자는 뿔테 안경을 손으로 쓱 올렸다.

“아아. 당연히 알아보죠! 지난번에 맡았던 향기가 나는데…….”

“향기요?”

“그나저나 이렇게 위험한 현장에 오시다니! 반정부를 잡으러 오신 건가요?! 지난번 광고 촬영 때처럼 총으로 때려잡은 건가요?! 저기, 저 소리 바락바락 지르고 있는 녀석이 타이거?”

애초에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는 건지, 남자는 떨고 있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말을 우다다 쏟아 내기 바빴다.

“저, 진정하시고요. 여기는 왜 오신 거예요? 일단 죄송하지만, 저 감옥에 가셔야 할 거 같긴 한데.”

“가, 감옥이라뇨?! 저 잘못 저지른 거 없는데요!! 저는 그저 이능력품에 관심 있으신 고객님 따라 여기 왔다가……. 제가 게임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정신 차려 보니 게임을 했고 갑자기 위쪽이 소란스럽더니 상황이 여기까지 온 거죠. 설마 반정부가 있었다니.”

“아…….”

“제가 기자라면 특종으로 바로 올렸을 텐데 말이죠! 아 맞다. 그러고 보니 핸드폰이 먹통이라 못 올리는구나.”

핸드폰을 꺼내든 남자는 수신 불가 지역이라 뜨는 화면을 보여 줬다.

“??”

남자의 배경 화면은 호은이 사냥꾼 옷을 입은 채 멍때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거 저 아니에요?”

볼에 바람을 부푼 채 짝다리를 짚고 있는 호은의 모습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촬영을 대기하고 있을 때 찍혔던 거 같았다.

“아 죄송해요. 너무 귀여워서 팬심으로…….”

“아하.”

짧은 정적 뒤 호은은 남자의 손을 잡아 그를 일으켜 세웠다.

“일단 경찰 오면 저한테 했던 대로 말해 주시고요. 보니까 일반인이랑 깡패랑 구분해서 감옥에 넣은 거 같은데 감옥 안이 안전하실 거 같아요.”

“저, 저 사람들도 눈깔이 이상한데요?! 권호은 가이드님이 저 지켜 주시면 안 되나요?”

“안 됩니다.”

지금 대답한 건 호은이 아니었다.

“아. 아까 게임하셨던 분이군요.”

팔자로 눈썹을 모으고 있던 남자는 도인호의 등장에 애절하던 목소리에서 시니컬한 목소리로 바뀌었다.

“도인호 에스퍼입니다.”

“아아. 도인호. 네…… 뭐.”

“순순히 감옥에 들어가시죠. 강압적으로 넣는 방법도 있지만 기회를 주는 겁니다.”

“인호야. 너무 무섭게 말하지 마. 겁먹으시겠다.”

“힝. 맞아요! 호은 씨! 저 지금 너무 무서워요!!”

호은에게 안기려는 듯 다가오는 남자에게 도인호는 한쪽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다 큰 성인이 안기고 그러는 거 아닙니다. 가시죠.”

게임 하다가 서로에게 앙심이라도 품었는지 두 사람의 사이는 나빠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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