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눈앞의 초점이 흐려졌다. 바보가 된 것처럼 뇌가 천천히 굳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거지?’
온몸에 힘이 서서히 빠져나가던 호은을 바라본 원신의 입술 한쪽이 올라갔다.
“호은 형!”
뒤쪽에서 들려오는 도인호의 목소리에 힘이 빠진 다리에 겨우 힘을 줘 뒤를 돌았다.
-쿠웅!
커다란 빛이 화살표 모양이 되어 자신을 공격하고 있었다. 호은은 반사적으로 막대기를 들었다.
청염과 빛이 부딪히며 커다란 소음을 만들어냈다. 발이 점점 뒤쪽으로 밀리는 걸 느낀 호은은 간신히 화살을 옆으로 밀어냈다.
“헤에. 아쉽네.”
원신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가 있던 방향을 쳐다보자 방금까지 대화를 나누던 원신이 사라지고 없었다.
“가짜예요. 최선율의 빛에 반사된 모습으로 있었던 겁니다.”
도인호는 이마에 땀을 맺힌 채 호은의 옆에 섰다.
막대기로 내리친 빛의 화살은 바닥에 꽂혀 있었다. 도인호가 손을 들자 청염이 작은 폭죽처럼 여러 개 동시에 터졌다. 균열이 간 화살은 얼마 못 버티고 처참하게 부서졌다.
“원신의 이능력을 완전히 막을 수 있는 건 아닌 거 같네요.”
안개가 낀 것처럼 제대로 된 사고를 멈췄던 호은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골이 울리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언제 당했던 거지?”
“정신 지배는 당하지 않았지만, 교묘하게 정신을 파먹으려고 했던 거 같습니다. 세뇌라고 하죠.”
“에잉. 그런 거 알려 주면 어떡해. 재미없게.”
작은 상자에 앉아 있던 원신이 다리를 달랑거리며 투덜거렸다.
“세뇌라니. 몰랐어…….”
호은은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시야에는 얄미운 표정을 짓고 있는 원신과 바닥에 쓰러진 최선율이 일어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크, 크큭, 아 그걸, 망가트렸네? 좀 더 커야 하겠구나.”
몇 번이나 몸을 재생했는지 모를 최선율의 옷은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반대로 도인호의 옷은 먼지와 구멍이 뚫리긴 했으나 대체로 깨끗한 편이었다. 호은은 도인호의 손을 잡아 가이딩을 불어넣었다.
“하아……. 가이드여서 적당히 싸우려고 했더니만 안 되겠는데. 형으로서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린 최선율이 총을 들어 올렸다. 총구로 빛의 형상을 띤 구체가 점점 모양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아까 호은을 공격했던 두꺼운 화살의 모양에서 그것은 더 커졌다.
“저게 뭐야. 미사일이야?”
커다란 미사일로 변한 빛에 호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봤다.
“쟤 미쳤나 봐. 저거 던지면 천장 무너질 거 같은데.”
“그전에 막겠습니다.”
도인호의 말이 들렸는지 최선율이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어떻게 막게?”
최선율이 주먹을 쥐자 미사일 모양의 빛이 가느다란 바늘 모양으로 수십 수천 개로 증식했다. 그것들은 호은과 도인호를 원 모양으로 둘러싸서 틈 하나조차 보이지 않게 두 사람을 가두었다.
“신아. 꼬챙이 구경시켜 줄게.”
최선율이 손가락을 튕겼다.
호은의 눈에 마지막으로 담긴 건 수많은 바늘 모양의 빛이 당장이라도 자신에게 쏟아질 듯한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이 꼭 멈춘 것만 같았다. 눈꺼풀이 닫히는 느릿한 사이로 모든 것이 천천히 움직였다. 뒤통수와 허리를 감싼 도인호의 손과 정확하게 두 사람에게 다가오는 빛 공격.
시야는 천천히 천장으로 바뀌었다.
호은은 바닥에 쓰러졌다. 머리와 허리 부근을 감싼 도인호의 손 때문에 넘어졌음에 불구하고 고통은 없었다.
“인호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도인호의 품에 갇힌 호은이 힘으로 밀어내도 꿈쩍하지 않는 도인호를 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가이드는 계속 지켜 줘야 하는 존재인 건가?’
몸 어느 곳에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커다란 도인호의 몸에 가려진 자신은 최선율의 공격에 털끝 하나 닿지 않았다.
“쿨럭.”
피를 토하는지 기침 소리가 들렸다. 시야가 암전되기 직전 도인호가 이능력을 쓴 걸 봤으나 모든 공격을 막지는 못한 거 같다.
막대기를 쥐고 있는 손에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 건지 막대기가 부서질 것만 같았다.
“흐음. 가이드가 그렇게 소중해? 하기야. 일반인은 방금 게 닿았으면 즉사겠지. 지금 그 행동이 정답이긴 해.”
점점 가까워지는 구둣발 소리가 어느 순간 멈췄다.
“에스퍼는 핵만 무사하면 죽지 않으니까. 하지만 못 움직이겠지?”
-퍼억
최선율의 발길질에 도인호는 굴러 나갔다.
“그야 당연할 거야. 내 총은 가이딩을 흡수하는 이능력품이거든. 그 많은 바늘을 혼자 다 맞았으니 자가 치유할 가이딩이 남아나질 않겠지.”
보라색 총을 든 최선율이 히죽 웃었다. 이번에는 호은의 차례라는 듯 그는 호은의 가슴을 구두로 짓밟았다.
“큭!”
“도망쳐 봐. 가이드 특기잖아. 에스퍼 버리고 도망치기.”
“너도…! 으윽, 만만찮게 혀 길다.”
호은의 말에 최선율은 픽 웃음을 흘리더니 호은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가이드 주제에 너무 건방져.”
호은은 최선율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는 호은의 눈을 본 최선율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재미있네. 살려 달라고 애원해 봐. 나 그 말 좋아하거든.”
“꺼져!”
“반항적이기까지 하네. 길들이고 싶게.”
야릇한 눈웃음을 짓는 최선율에게서 고개를 돌린 호은은 바닥에 쓰러진 도인호를 바라봤다.
한눈에 봐도 그의 상태는 안 좋아 보였다. 등에 박힌 바늘이 내부에 있는 가이딩을 빼앗기라도 하는지 피를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나 때문이다. 나 때문에 인호가…….’
입술을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피 맛이 났다.
“하아. 역시 괴로워하는 표정은 최고로 짜릿해♡”
호은의 턱선을 잡고 자기 쪽으로 돌린 최선율이 눈을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신아. 얘 데려가면 되는 거지?”
“응.”
“퉤. 누가 순순히 따라간대?”
호은은 최선율의 뺨에 침을 뱉었다.
“하하. 보채지 마. 아지트 가면 가이드로서 가져야 할 예의를 알려 줄 테니까.”
“꺼지라고!”
최선율을 노려보던 호은의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괴롭다. 매번 도움 당하는 자신이. 누군가를 지키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동안의 훈련은 무엇을 위한 거였을까? 정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거였을까?
“…….”
호은은 막대기를 쥔 손을 바라봤다. 일반인일 때는 분명 누군가를 지킬 만큼 강했는데. 가이드가 되어 버린 순간 약자가 되어 버렸다.
호은은 손에 힘을 줬다. 아까보다 조금 더 많은 가이딩이 빠져나갔다.
“!!”
막대기를 둘러싸고 있는 불꽃이 크기를 키워 나갔다.
최선율은 들고 있던 총을 호은의 이마에 갖다 댔다. 실실 웃던 얼굴은 순식간에 무표정으로 바뀌었다. 짜증으로 일렁거리는 최선율의 눈동자는 오로지 호은에게만 향해 있었다.
“시발. 가이드만 아니었어도. 아 그래. 팔 하나는 없어도 되지 않나? 아니다 닿는 면적이 커야 하니까……. 그럼 눈깔?”
총구로 호은의 얼굴을 툭툭 치던 최선율은 호은의 눈가에 총을 들이밀었다. 아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 망가트리고 싶었던 부위였다.
“눈 한쪽은 안 보여도 괜찮지?”
호은은 밑으로 향하려는 시선을 최선율에게 애써 고정했다.
가이딩 빠져나가는 속도가 더 커졌다. 그것은 마치 존재감을 과시하는 거 같았다. 내가 있다고. 나를 사용하라고.
‘설마…….’
막대기를 고쳐 잡은 호은은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는 최선율의 팔 쪽으로 막대기를 휘둘렀다. 청염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깨끗하게 팔을 잘라 냈다.
“하?”
바닥에 떨어진 자기 팔과 총을 본 최선율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뭐야.”
호은이 들고 있던 막대기의 불꽃은 처음보다 그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호은 형.”
도인호의 입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호은은 도인호의 부름에 얼빠진 최선율을 지나쳐 달려갔다. 도인호의 자가 치유를 막고 있는 무수한 바늘을 향해 막대기를 내리쳤다.
-휘익
허공을 가로지르는 바람 소리와 도인호의 등에 꽂혀 있던 바늘이 산산조각이 났다. 부서진 조각이 가루가 되어 반짝반짝 빛내며 허공을 부유했다.
“잠깐 쉬고 있어.”
피를 멈춘 도인호를 벽에 기대어 앉힌 호은은 어느새 잘린 팔이 재생된 최선율에게 막대기를 내밀었다.
가이드는 약하다. 가이드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에스퍼에게 가이딩을 주는 행위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현장을 마주치게 된다면 인질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는 게 맞았을 거다.
하지만 호은은 고집을 부렸다. 마냥 지켜지기만 하는 가이드는 싫다. 동등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지키고 싶은 사람은 지킬 수 있는 가이드가 되고 싶다.
“별것도 아닌 게 자꾸 기어오르네. 인내심 테스트시키는 거야? 응?”
살기로 가득 찬 최선율의 몸으로 빛이 번쩍거렸다. 그러나 두렵지 않았다. 불꽃이 느껴졌다. 혼자가 아니다. 도인호와 함께다.
가이드는 약하지만, 에스퍼의 능력을 빌린 가이드도 과연 약할까?
“그냥 죽여 버려야겠어.”
커다란 빛이 날카로운 창이 되어 호은에게 던져졌다. 호은은 타오르는 불꽃을 느끼며 땅을 밟았다. 필요 없는 힘은 버린다. 지금 필요한 건 빠르게 달려야 하는 다리의 힘.
“!!”
창을 피한 호은이 최선율의 앞에서 뛰어올라 막대기를 그대로 내리꽂았다.
최선율의 어깨에 관통한 막대기는 호은이 내던진 몸의 반동으로 인해 그대로 벽에 박혔다. 호은은 양손으로 잡았던 막대기에서 한 손을 빼고 가지고 있던 이능력구를 꺼냈다.
“그러네. 괴로워하는 표정 볼만하다.”
“씨이발!!!!”
철컥, 이능력구로 인해 힘을 구속당한 최선율이 난동을 부렸다. 에스퍼의 힘은 여전해 움직일 때마다 벽의 금이 심하게 그어졌지만 이능력은 확실히 못 쓰는 거 같았다.
호은은 최선율의 몸에 박혔던 막대기를 뽑았다.
-투둑
최선율의 피가 얼굴에 묻었지만, 호은은 전혀 개의치 않은 얼굴로 이번에는 원신이 있는 쪽으로 걸었다.
“죽어! 죽어!!”
겁에 질린 원신이 이능력을 쓰며 호은을 향해 외쳤지만 호은은 천천히 원신에게 다가갔다.
“네가 봤을 땐 내가 악당 같지?”
적을 무찔렀다는 쾌감 때문일까? 호은은 피가 들끓는 걸 느꼈다. 걸을 때마다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발걸음이 붕 떴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겁먹은 원신이 창고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순간 호은이 순식간의 원신의 앞을 막아섰다.
피로 물든 자신의 몰골이 원신의 눈동자에 비쳤다. 사람을 피가 날 정도로 공격해 본 적이 있던가.
당연히 없다. 일반인이라면 그런 경험을 하는 순간 범죄자가 되니까.
“너희들이 말한 정의. 내가 실컷 부정해 줄게.”
“……!!”
“내가 정의니까.”
범죄를 저지른 건 타이거나 회사나 똑같다. 그들의 말처럼 에스퍼와 가이드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 회사나. 테러를 꾸미는 타이거나. 어느 한쪽도 정의라 보긴 어렵다. 하지만 지금 이 행동만큼은 정의일 게 분명했다.
이 순간만큼은…… 소중한 사람을 다치게 만든 타이거가 분명한 빌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