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이 상황에서 갑자기 무슨 게임을 말하나 싶다가 떠올랐다.
아, 카드 게임하고 있었지.
“대, 대단하네.”
도인호는 칭찬받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도깨비불이 위험한 게 아니란 걸 뒤늦게 알아차린 최선율이 어두웠던 방 안을 빛으로 밝혔다.
마치 백열등 열 개는 켜 놓은 거 같은 밝기였다.
“위쪽도 현재 대치 중입니다. 다수의 사람이 원신에게 세뇌당한 상태인 거 같아요.”
“그렇다면…….”
위쪽에는 일반인 인질이 있다는 소리였다. 호은은 조용한 창고의 입구를 바라봤다.
“전부는 못 내려올 거 같습니다.”
“그래. 괜찮아. 우리 둘로 충분하잖아?”
호은은 바닥에 굴러다니던 나무 막대기를 주워 들었다. 제법 기다란 것이 훈련장에서 쓰던 목도와 비슷했다.
이능력품도 무엇도 아닌 평범한 막대기지만 맨손보다는 나을 게 분명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가지고 노네?”
자신이 속임수에 당했다는 걸 깨달은 최선율은 호은이 예상했던 것처럼 구겨진 얼굴로 입은 웃고 있는 기괴한 모습이었다.
도깨비란 이름의 스킬은 도인호가 아니라 최선율에게 어울릴 정도로 야차(夜叉) 같은 모습이었다.
“아직 가지고 논 적 없는데?”
호은이 나무 막대기를 허공으로 휘둘렀다.
“하하. 뭐야. 겨우 그깟 막대기로 뭘 할 수 있는데.”
“그깟 막대기라…….”
호은은 엄지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뺐다. 그러자 억제하고 있던 방사 가이딩이 순식간에 창고 안으로 퍼져 나갔다.
“가이드?”
느껴지는 방사 가이딩에 최선율이 놀라고 있을 때 호은은 목도를 앞으로 내밀었다.
맞다. 이건 그저 평범한 나무 막대기일 뿐이다. 하지만, 이제 이것은 그냥 평범한 나무 막대기에서 일회용 이능력품이 될 예정이다.
“인호야.”
호은의 부름에 도인호는 내밀어진 막대기를 손바닥으로 훑었다. 그러자 푸른 불꽃이 막대기를 감쌌다.
막대기는 더 이상 평범한 막대기가 아니다. 청염으로 감싸진 막대기는 에스퍼와 동등하게 싸울 수 있는 무기가 되었다.
“진짜 되네.”
손바닥을 타고 가이딩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능력품의 주재료인 다이아 메인이 없기에 해당 막대기에 이능력이 담긴 것은 아니다.
그저 도인호가 이능력을 막대기 주변에 끊임없이 쓰고 있는 것이고 자신은 가이딩을 불어넣으며 이능력 현상을 유지할 수 있게 돕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 이능력품이 완성되지 않은 도인호가 현장에 들어가기 전 시도해 보자 했던 이 방법은 성공이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가지고 놀아 볼까?”
막대기에 둘린 청염이 날뛰고 싶다는 듯 아름답게 타올랐다.
겁도 없이 최선율에게 뛰어나가려는 듯 자세를 잡는 호은을 본 도인호가 어깨를 붙잡았다.
“먼저 인질부터 한곳으로 모으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신호를 주면 밧줄 풀어 준 다음 밖으로 도망칠 수 있게 해 주세요.”
도인호는 창고 안을 둘러봤다. 누군가를 찾는 듯 들쑤시던 시선은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돌아왔다.
“동생 쪽은 아직 안 온 건가요?”
“한여울 데리러 갔는데 폴 씨 무전 보니까 한여율은 우리가 데리고 있는 거 같아.”
“그럼 이곳에 있는 건 빛 에스퍼와 정신 지배 에스퍼…….”
생각에 빠진 도인호에 호은은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알려 줬다.
“무슨 일인지 원신 이능력이 나한테 안 통하는 거 같아.”
호은의 말에 도인호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레이저 빔이 호은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이게 무슨 만화라도 되는 줄 알아? 적 앞에서 작전회의 짤 시간 줄 리가 없잖아!”
“생각보다 아프네.”
화상이라도 입은 듯 상처 부위가 화끈거렸다. 방심했다. 최선율의 말처럼 적 앞에서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
핏방울이 호은의 볼을 타고 턱선으로 떨어지는 걸 보던 도인호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사르륵 내려앉은 속눈썹이 위로 올라가고 다시 보인 황금색 눈동자는 용암이 들끓는 것처럼 색이 점점 짙어져 갔다.
“잠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호은이 도인호를 붙잡기도 전에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고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쾅!!!
도인호는 단번에 최선율에게 뛰어 들어가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손을 들어 간신히 주먹을 막은 최선율이었으나 부딪힌 벽이 원형으로 움푹 파였다.
‘말린다고 들을 상태가 아니야.’
눈앞에 광경은 CG 범벅의 초능력 영화라도 보는 것처럼 빛과 불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이러다 창고가 무너지겠다 싶어 호은은 가만히 앉아 있는 원신을 흘깃 쳐다봤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을 구경하듯 바닥에 떨어진 초콜릿을 먹으며 감상하고 있었다.
이 틈에 호은은 한여울의 부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일단 이걸로 저 밧줄 먼저 끊어 주고.’
도인호가 판단한 것처럼 어차피 위에도 인질이 있다면 한여울 부모도 거기에 합류하는 편이 나았다.
-화륵
막대기를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화염의 불꽃이 흔들렸다. 최선율을 직접 때려 주지 못한 것은 분하긴 했으나 인질을 구하고 서둘러 원신 또한 제압해야 했다.
저 어린아이가 언제 정신 지배 이능력을 사용해 위에 인질을 조종할지 모를 일이었다.
호은은 여자를 향해 막대기를 휘둘렀다. 불에 탄 밧줄이 풀어졌다. 서둘러 여자를 흔들어 깨우자 감겨 있던 눈을 떴다.
여자는 떨리는 손으로 청테이프를 뗐다. 얼마나 울었던 건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은 엉망이었다.
“당신들이 저지른 범죄는 반드시 죗값을 물을 거니까. 일단은 창고 밖으로 나가요. 우리 쪽 사람이 지켜 줄 겁니다.”
“도, 도대체 당신들 뭐, 뭐야…….”
갈라진 목소리로 여자는 힘겹게 말했다. 실제로 에스퍼를 만난 건 처음인 건지 자신이 어떤 일에 말려든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거 같았다.
“너튜브에 신입 가이드의 VLOG 영상 보는 거 추천할게요. 좋아요랑 구독도 눌러 주시면 좋고.”
호은은 여자의 어깨를 잡아 조심스럽게 일으켜 줬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위기를 풀어주려고 농담을 건넨 건데 먹히지 않은 모양이다.
“빨리 도망 안 가면 쟤네한테 잡힙니다?”
-쿵, 쿠콰캉, 쾅
여자의 시선은 도인호와 최선율에게 향했다. 그녀는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에 애써 힘을 주며 조심조심 창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이. 너도 들었으면 일어나.”
호은은 만신창이가 된 오른손의 남자를 불렀다. 보라색 멍이 들어 있는 손의 상태는 딱 봐도 심각했다. 치료해도 기존처럼 손을 사용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남자는 고통에 기절했다가 정신 차리기를 몇 번 반복한 건지 간신히 숨만 토해 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남자의 허리를 잡아 일으킨 호은의 앞에 가만히 앉아 있던 원신이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것도 살리게? 왜? 너 죽이라고 위치 까발리던 놈인데?”
호은은 한쪽 팔로 남자를 지탱하고 그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너 학교 안 다니지? 날 죽이는 데 동참했다 치더라도 똑같이 상대방을 죽이려고 하면 안 돼. 이런 건 초딩도 알겠다.”
마치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호은이 천천히 또박또박 발음해 알아듣기 쉽게 말해 줬다.
원신의 나이는 12세에서 15세 사이로 추정 중이었다. 호은이 보기에 그의 나이는 12세, 많아 봤자 13세로 보였다.
“그래? 우리 보스는 두 배로 갚아주라고 하던데. 누군가 내 발을 밟으면 다리를 잘라버리라고 말이야. 너도 한 번 해봐. 생각보다 통쾌할걸?”
원신의 눈이 보라색으로 뒤바뀌었다.
“저 남자를 죽여!”
“아니. 살려 보낼 거야.”
“쳇. 이번에도 안 통하나?”
원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을 마주하고 있는데도 이능력이 안 통하다니. 심지어 이능력품을 찬 거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끅.”
호은의 팔에 안긴 남자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했다. 이 상태로 남자를 데리고 창고로 뛰어나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여자는 어느새 창고 문 끄트머리까지 도착한 상태였다.
“걸을 수 있겠어요?”
남자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은은 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남자를 입구 쪽 땅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 줬다.
남자는 걷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힘없이 무릎이 꺾였다.
“흐음. 차라리 여기 밑이 나을지도 모를 텐데.”
원신은 의미 모를 말을 내뱉더니 순순히 남자를 보내 줬다.
‘역시 예상대로 공격하지는 않네. 생각보다 나쁜 놈은 아닌가?’
의중을 알 수 없는 원신의 행동에 호은은 점점 원신이 궁금해졌다. 에스퍼라면 신체가 기본적으로 강해 공격적으로 움직이는데 원신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어째서 이런 범죄를 저지르는 타이거에 붙어 있는 거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신 지배라는 특이한 이능력 때문에 타이거가 그를 데리고 있는 건가. 호은은 원신이 타이거에 소속되어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넌 아직 어려. 이런 잔인하고 끔찍한 현장을 보고 자란다면 제대로 된 어른이 될 수 없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타이거에 나와서 이능력자 협회에 들어가면 보다 더 안정적인…….”
“싫어. 거기 들어가면 정부의 개가 되잖아.”
원신은 혓바닥을 내밀더니 웩 소리를 냈다.
“내가 에스퍼가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닌데. 왜 정부 소속이 되어야 해?”
“뭐? 그, 그건.”
“거길 들어가면 평생을 정부 말에 따라야 하잖아. 내가 왜?!”
상황에 맞지 않게 호은이 들고 있는 막대기는 여전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게 마치 어린아이를 때리는 나쁜 악당 포지션처럼 보여서 들고 있던 막대기를 황급히 내리는 호은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네가 가담하는 일을 봐 봐. 원치 않는 사람을 네 멋대로 지배하고 이용하는 건 나쁜 행동이야.”
“아닌데?! 악을 처단하는 거야. 방금 그놈들은 쓰레기! 보스는 그런 쓰레기를 처리해 주는 착한 사람이야. 그리고…… 우릴 괴롭힌 녀석들에게 복수해 준다고 약속했어.”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상한 사이비 종교를 믿는 사람처럼 원신은 자신의 신념에 빠져 눈앞의 진실을 외면했다.
“한여울도 협회가 아니라 우리한테 오는 게 더 나을걸? 에스퍼로 각성한 이상 협회에 가면 자유를 잃어서 평생 불행하게 지내니까.”
“……무슨.”
“이능력자 협회는 쓰레기야. 정의는 타이거라고! 사람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네놈들이 나빠!”
정의를 논하는 원신을 보자 호은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대화를 나누면 잘 풀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바보였다.
이런 놈이랑 대화는 무슨.
호은은 챙겨 왔던 이능력 구속구를 꺼낼 틈을 엿봤다.
“내 말을 안 믿는 눈치네. 정말 이능력자 협회가 정의라고 확신할 수 있어?”
“…….”
그저 어린아이가 하는 말일 뿐이다. 그저 자신을 자극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이상하게 단어 하나하나 깊이 새겨진다. 마음속 의구심이 천천히 피어오른다.
“우리가 정의고 너희가 악이야.”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원신에게 호은은 아까처럼 말을 받아치지 못했다.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악인이다. 정의의 편에 설 수 있다면 호은은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고 싶었다.
그런 의미로 자신이 속한 회사는 양면적인 곳이었다. 일반인을 지키고 나랏일을 하는 에스퍼와 가이드. 하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악행들.
‘이능력 결정체 같은…….’
이곳을 정의라 부를 수 있는 걸까? 어쩐지 머릿속이 몽롱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