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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90화 (90/129)

90화

“아이 씨. 갑자기 옛 기억이 나고 지랄이야.”

엄태석을 바라보던 시선이 언제 남운수에게 향했는지 고개를 무리하게 꺾어 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저 부끄럼쟁이를 너무 쳐다봤네.”

자세히 보지 않으면 티 나지 않았지만, 머리카락이 덮인 남운수의 귓불이 살짝 붉었다.

꽁초만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던 배연우가 다시 고개를 박기현이 있는 쪽으로 돌렸다.

여전히 귀는 드래곤 조직원이 모여 있는 테이블로 향했으나 주식 얘기를 하는 거 보니 더 듣지 않아도 될 거 같았다.

“어 뭐야?”

배연우는 갑자기 사라진 원신을 보고 급히 일어났다. 잠깐 다른 생각에 빠졌다고 원신을 놓치다니. 척추를 타고 서늘한 감각이 흘렀다.

“이거 느낌이 영 안 좋은데.”

연기와 사람으로 혼잡한 내부를 열심히 둘러봤자 원신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배연우는 서둘러 계단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미 계단을 내려간 원신이 지하 2층으로 내려간 뒤였다.

“권호은. 응답해 봐. 권호은?”

무전으로 애타게 권호은을 불렀지만 치지직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답신은 없었다.

“지금 지하 2층으로 원신 내려갔다. 1팀 원신한테 시선 주지 말고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해. 그리고 권호은 너도 무전 들리면 가만히 숨어 있어.”

무전기에 대고 말을 했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배연우는 입술을 짓뭉개며 초조하게 계단 밑을 내려다봤다.

***

[치지직 권…… 치지직]

“고장 났나?”

벽을 더듬거리며 걷던 호은이 노이즈 소리가 나는 인이어에 인상을 찌푸렸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몸을 낮춘 자세로 천천히 걷던 호은이 불만을 중얼거리자 기다렸다는 듯 멀리서 희미한 조명이 보이기 시작했다.

방 안쪽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자, 전구가 오래된 건지 회색빛에 가까운 조명이 천장에 달린 채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

뒤꿈치를 든 호은이 소리를 줄이며 조명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점점 희미하게 두 인영이 보였다. 호은은 커다란 드럼통으로 한순간에 달려가 몸을 숨겼다.

“으으으읍!”

밧줄로 몸이 꽁꽁 묶인 두 사람은 청테이프로 입이 막혀 있었다.

-탁탁탁

의자에 묶인 남자가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다리로 바닥을 쳐서 소리 내고 있었다.

‘찾았다…….’

드럼통을 기대고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조용한 내부는 누군가 찬 손목시계 초침 소리만 들렸다.

‘왜 아무도 연락을 안 주지.’

호은은 밝기를 최대한 낮춘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며 초조해했다. 분명 발견했다 보낸 문자는 제대로 전달된 상태였다.

일단 한여울 부모를 구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저들을 저렇게까지 만든 이유를 알아내야 하나.

“아아. 새로운 기술 괜찮네?”

“그렇지. 섀도 텔레포트라고 이름 붙이게.”

“키힛. 그게 뭐야. 유치해.”

“!!”

조명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사람의 모양을 만들더니 언젠가 들은 적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 두 사람.’

63스퀘어에서 만났던 율형제였다. 호은은 손을 들어 코와 입을 막았다. 귀가 좋은 에스퍼라면 숨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하이~ 2년 만에 보는 거 같네?”

고개를 살짝만 내밀어 상황을 보자 흰색 머리인 최선율이 가면을 쓴 채 한여울 부모에게 다가갔다.

“으으읍!”

“그래그래. 말하고 싶었어?”

-찌이익

“너, 너네였어!! 너희가 우리를 속이고 사채 끌어다 쓰게 만들고!!”

“형. 이 새끼들 뭘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데?”

“그렇게 말이야.”

차가운 비소를 날린 최선율이 발로 남자의 의자를 차 버렸다. 쿠당탕, 의자가 그대로 밀려가 벽으로 부딪혔다.

“크윽.”

“그렇게 생각하니까 우리 보스가 열받은 거야. 잘 키우라고 했잖아? 이상 행동하는 거 같으면 보고 재깍재깍하고.”

“으읍! 으으읍!!”

가만히 있던 여자가 이번에는 할 말이 있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던 선악율이 여자의 입에 붙은 청테이프를 뜯었다.

“나는! 나는 잘 키웠어!! 학원도 보내고, 또……. 그래 씻겨 주고! 난 하라는 거 다 했어. 나는, 나는 풀어 줘!!”

“하아? 뭐라는 거야. 돌보는 것의 개념을 모르는 거야? 너희들 처놀러 다니느라 애는 학원 뺑이 친 거 우리가 모를 줄 알았어?”

선악율이 위협스럽게 여자에게 다가가자 형 쪽이 그를 제지했다.

“거기까지 해. 굳이 네 손 더럽힐 필요 없어.”

“흐윽, 흑.”

공포에 찬 여자가 눈물을 보였다. 그림자로도 바들바들 떠는 것이 보일 지경이었다.

“우리는 그저 보스의 말을 전해 주려고 왔을 뿐이야. 원래는 보스가 직접 말하려고 했는데. 지금 좀 바빠 보이네.”

최선율은 가면 안으로 낮게 웃더니 여자의 얼굴에 달라붙어 있는 청테이프를 도로 붙였다.

“그동안 줬던 돈은 도박으로 회수했는데. 사채로 빌린 돈은 갚아야 할 거 같다. 오늘 내로.”

“으읍?! 읍! 으으읍!!!”

“형. 오늘 안에 벌려면 이놈들 빡세겠는데?”

“에이 빡세기는. 눈 깜빡할 사이에 처리되어 있을 거야. 그나저나 당신. 눈이 예쁘네? 잘 쳐주겠어.”

율형제의 말에 여자는 발작하듯 몸을 버둥거렸다. 의자에 묶였기에 그녀는 도망칠 수 없었다. 최대한 이리저리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의자를 뒤로 몇 번 움직이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

한여울의 부모는 타이거와 아는 사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한여울을 타이거가 의도적으로 저들에게 맡긴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우리가 키우자니까.”

“참나. 너는 형아의 마음을 몰라.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가정을 경험해 보라는 보스의 뜻을 이해 못 하네.”

“그럼 뭐 해. 이놈들 봐봐. 자기 배 채우느라 제대로 부모 노릇도 안 하고. 만약에 내가 저런 놈들에게 키워졌다 생각해 봐! 형!”

어두운 조명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환하게 방 안을 비추다 다시 희미해지기를 반복했다.

“하? 그랬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저놈들의 목숨을 끊어 버렸을 거야.”

“혀엉. 감동이야.”

“그런 면에서 보스는 참 친절해.”

“동감이야.”

요란하게 깜빡거리던 조명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호은은 최선율의 이능력 덕에 대충 주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은 창고로 보였다. 여기저기 놓여 있는 드럼통과 아까 봤던 커다란 나무 상자가 구석에 쌓여 있었다.

술도 여기다 보관하는 건지 상자째로 뒹굴고 있었다. 일단 장애물이 많으니 숨을 때 유용할 거 같았다.

‘그나저나 분명 한 명은 빛의 능력이고 다른 한 명은 그림자였지.’

호은은 홍보부에서 다뤘던 반정부 프로필을 떠올렸다. 63스퀘어의 기억까지 같이 더듬으니 그림자 이능력은 대충 어떤 건지 감이 잡혔다.

동생 쪽인 선악율은 그림자를 통해 이동했다. 이번에 등장할 때도 그림자로 등장했고.

이대로 한여울 부모를 내버려 둔다면 대충 저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예상됐다. 돈이 되는 모든 것을 팔리겠지. 그렇게 되면 한여울은 반정부 측에서 데려가나?

“형. 이런 놈들 푼돈으로 파는 것보다 ‘그것’의 실험체로 사용해 보면 안 돼?”

“확실히 실전 데이터가 있으면 ‘그것’의 완성도도 높아지긴 하겠지만.”

“어어! 뭔 소리야. ‘그것’의 공격성을 실험하는 건 여기 이 아지트에 있는 놈들이잖아?!”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과 동시에 인이어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권호은, 안 들려? 원신 그쪽 방에 들어갔다. 상황 봐서 나와!!]

“내가 뭐 때문에 이 많은 인원을 정신 지배하는…….”

“…….”

하필이면 호은이 숨어 있는 드럼통 바로 옆으로 원신이 지나가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한 걸음씩 폴짝폴짝 뛰며 드럼통 앞으로 다가온 원신이 손가락으로 드럼통을 튕겨 냈다.

-쿠콰앙

“아씨. 저놈 오줌 지렸잖아.”

원신이 날린 드럼통은 벽 앞에 쓰러진 남자의 바로 옆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남자의 바지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는데 원신이 들어오기 전부터 그랬던 건지 방금 충격으로 그런 건지 모를 일이었다.

원신은 코를 킁킁거리더니 다시 폴짝 뜀박질하며 율형제가 있는 곳으로 갔다.

‘큰일 날 뻔했네.’

호은은 내적 비명을 질렀다. 호은이 숨은 드럼통은 날아간 드럼통의 바로 옆이었다. 조금만 잘못했어도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건 드럼통이 아니라 자신이었을 거다.

어째서 여기에 반정부 세 명이나 있는 거지? 거기다 ‘그것’은 또 뭐고?

머리가 복잡했으나 앓는 소리조차 내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여자애는 각성한 거 맞아?”

“뭐. 정황상 그런 거 같은데. 저놈들이 그동안 입을 다물고 있어서 말이지.”

최선율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하다 뭔가 생각이 났는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뭐야. 우리 신이? 지난번에는 또래라 포지션 겹친다고 데려오지 말라더니. 관심이 생겼나 봐?”

“뭐? 뭐래.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런 어린애는 내 타입도 아니고, 더군다나 우리끼리 그런 감정이 가능할리 없잖아!!”

쓸데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세 사람을 보던 호은은 저릿한 다리를 슬그머니 폈다. 쥐 난 다리에 손에 침을 묻혀 코에 갖다 댔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호은은 다시 한번 핸드폰을 들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요약해 문자를 보내고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서 이놈들 언제 데려가? 가뜩이나 냄새나서 짜증 나는데.”

“그러게. 드래곤에서 내려온다고 했는데.”

선악율이 툴툴거리자 최선율이 기다려 보라며 답했다. 호은은 그들의 대화에 나가는 문을 쳐다봤다. 문은 훤히 열려 있었다.

“아. 나 재미있는 생각 났어. 여기에 걔 부르자.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려면 적당한 충격을 주는 게 낫잖아? 부모를 스스로 버리게 선택하는 거야.”

원신이 작은 악마처럼 키득키득 웃음소리를 뱉었다.

“그거 재미있겠는데?”

선악율이 원신을 따라 웃었다.

“글쎄. 보스가 화낼 거 같은데.”

“그럼 형이 나 보호해 주면 되지.”

“반죽음당하라는 말이야? 그래도 뭐, 동생이 원한다면야. 그래 허락할게.”

“오케이. 갔다 올게.”

호은은 반사적으로 뒷주머니에 있던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폴 씨. 지금 선악율이 한여울 데리러 갔습니다. 먼저 가서 보호해 주세요!”

무전을 친 호은이 다리에 힘을 줘 단번에 일어섰다.

-콰앙!!

드럼통의 가운데가 뻥 뚫리자 기름 냄새가 창고 안 가득 풍겨 왔다.

조금만 늦었으면 드럼통이 아닌 호은이 구멍 난 배를 부여잡고 피를 토하고 있었을 거다.

“뭐야. 너 누구야?”

호은은 원신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문으로 뛰쳐나갔다. 무전기를 든 상태로 몇 번이고 폴을 부르며 같은 말을 되뇌었다.

“폴 씨! 한여울 보호해야 합니다! 반정부가 한여울한테 갔습니다! 한여울, 각성자 맞습니다! 반정부가 노리고 있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던 호은은 근처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숨을 멈췄다.

“빠르네? 에스퍼는 아닌 거 같은데.”

번쩍 빛이 난 순간 호은의 뒷머리를 콱 움켜잡은 최선율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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