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각인 반지 말입니까?”
“그래. 그거 차면 각인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뜻이거든.”
처음 반지를 받았을 때는 꼭 청혼을 받은 것처럼 기뻤다. 함께하자는 말이 서로를 지탱하자는 의미인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청혼의 의미가 아니라 그냥 각인의 의미였구나.
그럼 그렇지. 이 개자식.
“각인……하면 좋습니까.”
“글쎄. 나는 모르겠지만, 가이드로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해낸 거겠지.”
“가장 중요한 일?”
“에스퍼를 케어한다. 각인만큼 완벽한 케어는 없으니까.”
“…….”
왜 가이드의 미래에 가이드는 요만큼도 없는 건가. 왜 여기에도 에스퍼가 끼워져 있는 건가. 사념을 깬 건 무전 소리였다.
[조직원 중 일부가 일회용 이능력품으로 공격 중, 엄성찬 가이딩 퍼센트 급격히 떨어졌으므로 지원 필요합니다.]
상황실의 무전이었다.
“존나 귀찮게 하네.”
상사에게 들리지 않게끔 욕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대기하고 있던 세 사람은 선박으로 미로가 된 부둣가에 숨바꼭질하듯 엄성찬을 찾아 나섰다.
-쿠쿠쿵
이능력품인지 뭔지가 폭발하는 소리와 엄성찬의 소리가 들려왔다. 모퉁이만 돌면 엄성찬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걸음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지금 저놈을 구하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거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에스퍼와 가이드란 이유로 묶여 평생을 살아야 하는 건가?
평생이 붙잡힌다?
미래가 없어진다?
인사부에서 일하는 건 엄성찬을 제외하면 제법 즐거웠다. 에스퍼 각성자를 데려올 땐 뿌듯함마저 느껴졌다.
거기다 부장님은 본받을 게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친절하고, 다정했으며, 엄격했지만 그 누구보다 가이드를 가이드가 아닌 사람으로서 봐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엄성찬이 뒤에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껄이고 다녀도 참을 수 있었다. 배신감보다 인사부에 소속되고 싶은 욕망이 더 컸으니까.
-툭
여태껏 들고 있던 반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반지를 한참 쳐다봤다.
“연우야. 안 가고 뭐 해?”
다른 쪽에서 허탕을 쳤던 사수가 나를 발견하고 아는 척했다. 가까이서 들리는 진동에 엄성찬이 바로 맞은편에 있다는 것을 그 또한 알아챘다.
“저. 저놈 안 구할래요.”
“뭐?”
“저 자식을 내 미래에 끼워 주고 싶지 않아요.”
다리가 멋대로 움직였다. 방향은 엄성찬이 없는 그 어디든 상관없다.
가이드 같은 거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가이드로서 행복할 방법을 찾는다면, 그건 에스퍼를 위해 사는 게 아니라.
가이드임에도 나로 사는 법을 찾는 거였다. 그것이 날 행복하게 해 줄 거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주인공이 이런 생각을 하고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며 완전히 닫힌 해피엔딩으로 끝을 낸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특별한 사유 없이 현장을 이탈했기에 3개월 감봉과 징계 회의가 열린다고 합니다.”
현장을 이탈하고 꼬박 하루가 지났다. 사무실로 들어가자 인사부 직원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징계 회의요?”
일반인과 에스퍼. 두 사람이 붙는다면 당연히 에스퍼가 이겨야 하는 거 아닌가? 그 당연한 공식을 엄성찬이 깨트렸다.
“이번 임무 실패에 대한 면책 사유를 엄성찬 대리가 배연우 팀장님이라 말씀하셨거든요.”
“……허.”
“아직 정해진 건 아니지만, 아시잖아요. 인사부에서 소문 돌면 그건 기정사실이라는 거.”
인사부의 단점은 이게 문제였다. 다른 부서는 모든 일이 정해지고 나서 알았을 사실을 인사부는 먼저 알게 된다.
그 때문에 부서 이동이나 진급 결과가 나오는 날에는 많은 사람이 인사부 직원을 귀찮게 굴며 정보를 캐내기도 했다.
“부장님이랑 상담받고 싶은데.”
“사실 팀장님 상처받으실까 봐 말씀 안 드린 건데……. 이번 회의에서 배연우 대리님 팀장 진급 취소 건도 나왔다는데 그걸 부장님이 하셨다는 소문이.”
“네?”
머리 위로 쟁반이 떨어진 느낌이다. 차라리 돌로 머리를 맞으면 모를까 쟁반으로 맞으니 기분이 더 더럽다. 아니, 그보다 예기치 못한 순간 떨어진 쟁반에 어안이 벙벙하다.
“부장님이요?”
“쉿. 누가 듣겠어요.”
목소리를 낮추고 말하는 직원에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반응이라면 진짜다.
“하.”
자리에 멈춰 헛웃음을 뱉었다. 지난주 엄성찬보다 먼저 팀장 진급 시험을 본 나는 당당히 현장 임무를 완료했다.
결과는 이번 주에 나오는 거였으나 역시 인사부답게 팀장 진급 확정이라며 벌써 나를 팀장이라 불러 주고 있었다.
“그랬는데 취소라니.”
부장실에 불러 팀장이 된 걸 축하한다며, 부족한 엄성찬을 맡아 줘 고맙다고 말한 그 부장님이 나를 배신했다.
엄성찬보다 나를 더 예뻐해 주고 내 말에 귀 기울여 줬으면서. 추억이라 불릴 만한 것들이 하나둘 쌓여 마음을 짓눌러 갔다.
“…….”
나는 뒤를 돌았다. 어느새 사람들이 나를 보고 속닥거리기 시작한다.
“다른 에스퍼랑 바람난 주제에 엄성찬 대리 엿먹이려고 이탈했다네?”
“정말? 그래서 현장 이탈한 거야? 역시 처음부터 이상하다 했다니까.”
“가이드가 저렇게 가볍게 굴면 되겠어? 더러워.”
가이드란 뭘까? 자신의 행복을 위해 선택한 순간 모두를 적으로 돌려야 하는 존재인 걸까?
나는 그저 나를 위해 살아가고 싶었던 거뿐인데.
이틀이 흘렀다. 부상을 치료한 엄성찬이 아무도 없는 옥상으로 나를 불렀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욕을 뱉을 줄 알았는데 놈은 이상하게 히죽거리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개같이 빌면 내가 용서해 줄게.”
“뭐?”
“너 소문 더럽잖아. 어떤 에스퍼가 너랑 같이 일하고 싶겠냐? 그러니까 나랑 각인하면 내가 그 오해 다 풀어 줄게.”
설마 했더니 이상한 소문을 냈던 건 엄성찬이었다.
“네가 소문낸 거냐?”
“글쎄? 그럼 어쩔 건데. 어차피 네 소문은 협회에 다 퍼졌는데. 다시 옛날처럼 우울증 환자처럼 지낼래?”
“……?”
“너 그때 생각하면. 캬하. 내가 진짜 천사였지 천사였어. 너같이 우울한 놈한테 친히 말 걸어 주고. 자신감도 올려 주고. 사실 나는 그때의 네가 좀 그립다? 지금처럼 거친 말투도 안 사용하고 고분고분한 게.”
“…….”
“그때 각인을 하자 할 걸 그랬나? 어쨌든 너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잖아. 그 우중충한 가이딩 센터에서 꺼내 준 게 난데.”
엄성찬은 그때를 떠올리면 아련하다는 듯 하늘을 바라봤다. 분노로 뜨겁게 열받은 머리는 차갑게 식어갔다.
“너 원래 이런 놈이었구나.”
머리가 식으니 뇌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상이 도운 거다. 이런 놈이랑 각인해서 인생을 저당 잡힐 뻔했다니. 지금이라도 저 본성을 안게 다행이다.
“다행이다. 각인하기 전에 네가 쓰레기라는 걸 알아서.”
나도 모르게 손을 올려 뺨을 매만졌다. 분명 뭔가 흘러내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행히 물기가 느껴지진 않았다.
기분 탓인가.
그래 모든 건 다 기분 탓이다. 우울증일 때 내 기분은 밑바닥에서 하늘 높이 껑충 뛰어오르기를 반복했으니까.
타이밍 좋게 내 기분이 좋을 때 엄성찬이 다가온 거뿐이다. 여태까지 느꼈던 모든 것들은 기분 탓이라고, 그렇게 넘겨짚었다.
“네가 준 반지. 부둣가에 던졌으니까 찾아와봐. 그럼 각인해 줄게.”
“뭐?!!”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 각인 안 해 준다는 걸 친절히 돌려 말한 거니까. 알아들었으면 꺼져. 똥차 새끼야. 아니다, 내가 꺼져야지. 아우 더러워.”
일부러 오버하듯 집게 손으로 코를 막았다.
열에 달궈진 옥상 문손잡이가 유난히 뜨겁다. 덕분에 차갑게 식은 손이 다시 온기를 찾아간다.
잘한 거야. 잘했어. 배연우.
“……저, 저기.”
“아 씨, 깜짝아.”
문을 닫고 나온 순간 남운수의 가슴팍에 부딪힐 뻔했다. 잔뜩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는 남운수를 보아하니 옥상에서 했던 말을 들은 모양이다.
“그, 그러니까.”
“…….”
“부, 부장님께서 부르셔서…….”
“알겠어.”
같은 부서인 남운수와는 여태까지 큰 접점이 없었다. 내가 엄성찬의 보조만 맡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남운수의 존재감이 약한 건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건 처음이었다.
“지나가게 비켜.”
앞머리로 가려진 사이로 보이는 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이 안 갔다.
동정하는 걸까? 아니면 소문을 듣고 나를 경멸하고 있을까?
“자, 잠깐…….”
좁은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서는 남운수가 비켜 줘야 했다. 그러나 남운수는 안절부절못한 상태로 재킷의 안쪽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러나 찾는 게 없는지 이번에는 바지 주머니를 앞뒤로 꺼내 들었다.
속주머니가 나온 곳을 물끄러미 보던 나는 구멍이 난 것이 눈에 띄었다.
“흘린 거 아냐? 이거.”
구멍이 난 주머니를 가리키자 남운수는 얼굴이 시뻘게지더니 식은땀을 흘렸다.
“어, 어쩌지. 그……. 저기 미안.”
“??”
갑자기 사과를 건넨 남운수는 소매 부분을 잡아 늘이곤 내 뺨을 도장 찍듯 소매로 꾹꾹 눌렀다.
“어라.”
하늘색 소매 부분이 물기로 인해 진한 색을 띠었다. 분명 아까 만졌을 땐 눈물 같은 거 없었는데. 문 열면서 흘리기라도 했나.
“돼, 됐다.”
“…….”
의중을 알 수 없는 행동에 고맙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소, 손수건으로 하면 더, 더 좋았을 텐데. 미, 미안.”
“그래. 근데 너 나한테 말 놓았던가?”
“우……, 우리. 인사부 동기인데……. 네가 놓자고…….”
“아 그랬나. 그래.”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제 와 저런 사실이 뭐가 중요하다고. 나는 남운수의 어깨를 두드리고 자리를 떴다.
징계 회의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임무 실패에 대한 원인은 배연우 가이드의 무단 현장 이탈.
그것을 책임지기 위해 팀장 진급을 반납하고 2년 동안 진급 시험의 기회를 박탈한다. 이 모든 건 엄태석의 입김이 크게 들어갔다고 한다.
“너에게는 실망이 크다.”
부장실에 들어가 부서 이동에 대해 말하자 엄태석 부장이 내뱉은 말은 저거였다.
현장을 이탈한 이유는 뭐냐.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냐. 이런 물음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부장님. 저도 실망이 커요. 왜 저한테만 뭐라 하세요. 그쪽 조카가 지금 유언비어 터트리고 다니는 사실은요? 그것도 징계 대상 아닌가요. 왜!! 저한테만.”
“그만하게. 더는 자네에게 듣고 싶은 말이 없다네.”
반강제적으로 부장실에서 쫓겨났다.
부장실 앞에 멍하니 서 있자 시끄러웠던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대신 키보드 소리만 크게 들렸다. 다들 나를 제외한 단톡방에서 열나게 떠들어 대고 있겠네.
나는 사무실 구석에 있던 빈 상자를 꺼내 들어 자리에서 짐을 담기 시작했다. 어차피 잘리지도 못하는 회사. 여기서 울고불고 난리 치며 해명해봤자 내 얼굴보다 엄성찬의 얼굴을 더 많이 볼 사람들이다.
“…….”
짐을 다 담고 들려고 했으나 창백한 피부의 손이 나보다 먼저 상자를 감쌌다.
남운수였다.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왜 도와주냐 뭐라 하고 싶었지만 모진 말 대신 내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왔다.
“고맙다.”
내 편이 없는 사무실에서 누군가 옆에 있어 준다는 사실이 그 순간만큼은 고마웠다.
하지만 이젠 속지 않는다. 에스퍼는 다 똑같다. 엄성찬 같은 생각으로 도와주는 거일 수도 있겠지. 뭐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남운수가 나를 따라와 특수부에 들어오기 전까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