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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88화 (88/129)

88화

호은은 이 틈을 타 철제문 안으로 들어갔다.

“…….”

방 안은 채도가 낮아 조명 구실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붉은빛이 유일했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방 안 구석구석 커다란 나무 상자가 놓인 게 보였다.

가슴까지 오는 상자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했으나 일단은 한여울의 부모를 찾는 게 먼저였다.

드래곤 직원은 없는 것인지 호은은 걱정과 다르게 제법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전체를 훑었지만 조용한 방안은 드래곤 녀석은커녕 한여울 부모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1팀. 현재 한여울 부모가 지하 2층 안쪽 방으로 들어가 따라 들어왔습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호은은 뒷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내 보고했다. 벽에 기대앉아 한숨 돌린 호은은 숨소리를 갈무리하고 귀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탁탁

조명조차 안 달린 더 깊숙한 안쪽에서 신발 밑창으로 바닥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탁탁탁

방금 들린 게 환청이 아니라는 듯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호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 소리가 나지 않게끔 신경 쓰며 어두운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나저나 한여울 부모가 묶여 있는 게 맞는다면 구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그냥 감시 정도만 하면 되나.’

호은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움직였다.

오늘 낮에 폴과 강힘찬을 통해 도박 자금을 딴 한여울 부모였다. 그러나 방금 판돈은 낮에 딴 돈보다 금액이 컸다. 아무래도 드래곤에게 돈을 빌린 거 같은데.

회사를 그만둔 두 사람은 갚을 능력이 없을 게 분명했다.

‘여울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다 마침내 한여울에게 닿았다. 아직 10살밖에 안 되는 아이다. 그런 아이가 부모가 돈이 없다는 걸 알고 돈을 벌면서 정작 본인은 낡은 신발을 신고 편의점에서 대충 밥을 때운다.

호은은 그녀를 짧게 지켜봤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 올라오는 고통을 느꼈다.

“?”

계속 걷다 보니 넓은 방에 또 다른 문이 있었다. 훤히 열려 있는 문 안으로는 새까만 어둠만이 존재했다.

“여긴가.”

작게 중얼거린 호은이 스스로 어둠에 삼켜지러 가듯 안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권호은. 너 왜 안 보여. 설마 한여울 부모한테 간 게 너냐?]

다급해 보이는 배연우의 무전이 인이어로 들려왔다.

***

“아 이 새끼 왜 대답을 안 해.”

배연우는 누가 볼세라 무전기를 급하게 숨겼다.

지하 1층을 감싸는 자욱한 연기에서는 알 수 없는 냄새가 풍겨왔다. 연기를 피우며 소파에 앉아 있는 무리는 서로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어휴.”

못 볼 장면을 보기라도 한 듯 배연우는 시선을 돌렸다.

무리 틈새에 섞여 담배를 피우며 구석에 자리 잡은 배연우는 박기현이 있는 칵테일 바에 앉아 음료수인지 뭔지를 마시고 있는 원신을 봤다.

“…….”

아무도 어린아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신경 쓰지 않았다. 배연우는 어젯밤 챙겨 왔던 은색 메탈 안경을 썼다.

“뭐야.”

이곳에 있는 반 이상의 사람들의 눈 색이 빨간색이었다. 드래곤 조직원부터 일반 손님까지. 상당수의 숫자가 원신의 이능력에 당한 상태로 언제 원신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지 몰랐다.

“왜 이렇게까지 한 거지.”

테이블에 놓인 재떨이에 담배를 짓뭉갠 배연우는 불안한 듯 다리를 떨어댔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 한가지로 났다. 이곳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이능력에 당한 저들이 최악의 인질이 될 거 같다는 시나리오가.

“씨발.”

절로 욕이 나오는 상황에 배연우는 테이블에 놓인 술잔을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이곳에 정부 측 사람이 들어와 있다는 걸 드래곤이나 반정부가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 주변 좀 돌아볼게. 쟤 감시하고 있어.”

배연우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목소리가 얼마나 작았냐면 나오는 음악 소리에 금방 묻혀 일반 사람이라면 배연우가 입만 뻐금거리는 걸로 보였을 거다.

배연우는 멀리 떨어진 남운수를 쳐다봤다. 정확하게 내용을 캐치한 건지 남운수는 원신을 감시하기 좋은 테이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 슬슬 움직여 볼까.’

배연우는 본격적으로 반정부가 흘린 정보를 줍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 고객층은 대부분 돈이 많아 보이는 류였다. 텔레비전에 나왔던 유명 인사의 자식들도 종종 보이는 걸 보니 드래곤이 작은 깡패 집단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하필 이 녀석과 손을 잡은 걸까.’

1층에는 평범한 술집. 지하 1층은 약, 지하 2층은 도박.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있긴 하다만 그래 봤자 드래곤은 신생이다.

이것보다 더 극악무도한 짓을 한 범죄조직이 많을 텐데.

‘다루기 쉬워서?’

의문을 품고 있던 배연우는 드래곤 측 사람들을 하나둘 관찰했다. 마치 나이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웨이터 같은 차림을 한 사람 일부와 정장을 입은 가드, 그리고 누가 봐도 깡패처럼 생긴 인물이 특유의 셔츠차림으로 가게를 돌아다녔다.

일단 웨이트 같아 보이는 녀석들은 내막을 잘 모르는 직원일 가능성이 크다. 정장을 입은 가드는 드래곤 측 사람일 수도 있으나 원신이 심어 놓은 자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저 껄렁한 놈들인데.

배연우는 목표를 정했다는 듯 조직원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 쪽으로 설렁설렁 걸어가며 안경알 너머로 유심히 들여다봤다.

‘찾았다.’

모여 앉아 있는 사람 중 아직 정신 지배에 당하지 않은 건지 멀쩡한 남자가 있었다. 배연우는 자연스럽게 그들 주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니 그래서. 상품을 다 저놈한테 주고 있다고?”

“그려. 우리도 이제 피 냄새 없이 일하니까 좋고. 돈도 많이 받는다던디?”

“이상하네. 도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사람을 가져가?”

“네가 빵에서 뺑이 치는 동안 많이 변했어. 저 뭐냐. 반정부인가 뭔가. 테러리스트라는디?”

“저 어린놈이 말이야?”

배연우는 담배를 꺼내 물어 근처 의자에 앉았다. 의자에 허리를 갖다 대고 내용을 엿듣던 배연우는 흰색 연기를 느리게 내뿜었다.

사람을 빼돌리고 있었다? 배연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런데 사람이 한둘 나오는 것도 아닌데 그걸 다 사 가?”

“그건 또 아니더라고. 뭐, 뭐더라. 유전자? 유전자 검사지 받고 그중에서 몇 명 데려가던디.”

“그건 또 뭔 소리야. 아니 도대체 형님은 왜 저런 이상한 놈들이랑 손잡은 거람.”

“몰랐어? 우리 팔린 겨. 형님도 반정부 보스인지 뭔지 놈의 명령에 따르는 거 보니까. 옛날의 깡패짓만 하던 드래곤이 아니여. 우리도 이제 뭐야, 컴퍼니. 그런 느낌으로 굴러가는 거지.”

“컴퍼니? 푸하하. 컴퍼니면 여기가 회사라도 되는 거?”

잔을 부딪치며 남자들은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네.”

배연우의 혼잣말은 또다시 음악 소리에 먹혀들어 갔다.

조직원들의 말을 조합해 보자 드래곤은 타이거에게 완전히 먹힌 거 같다. 거기다 사람을 데려간다는 말은 무슨 뜻이지?

사람을 빼돌린다, 유전자 검사지. 핵심 단어를 떠올린 배연우의 얼굴이 무언가를 생각해 낸 듯 표정을 굳혔다.

‘설마. 이 자식들 살아 있는 사람을 가지고 실험하고 있나? 보유하고 있는 이능력자 중 그런 능력은 없을 텐데. 우리가 모르는 다른 인원이 더 있는 건가.’

하나를 알아내면 또다시 물음표가 생겼다. 배연우는 칵테일 바에 앉아 있는 원신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 안 되면 저놈이라도 데려가야 한다.’

하지만 데려갈 때 소란을 피우면 안 된다. 이곳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거기다 건들면 골치 아플 인간들도 몇 있고. 이마에 주름이 점점 깊어지는 게 느껴졌다.

“…….”

배연우의 시선이 원신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는 엄태석에게 향했다. 그때와 비슷하다. 범죄 조직과 연관되어 있던 팀장 진급 시험도 지금처럼 상황이 안 좋았다.

자욱한 연기에 취하듯 배연우는 과거를 회상했다.

***

“이번 일 끝나면 나랑 각인할 거지?”

“…….”

“야 너는 완전히 땡잡은 줄 알아. 가문 좋지~ 이제 팀장 달지~ 너 이거 기회다? 못 잡으면 병신인 거 알지?”

“닥쳐 좀.”

경박하기 짝이 없는 말만 내뱉는 엄성찬에 심기가 뒤틀렸다.

내가 왜 이딴 녀석을 따라 현장직 가이드가 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우울증으로 머리가 어떻게 돌아 버린 게 분명했다.

그깟 사탕발림으로 네가 필요해 소리에 넘어가 쓰레기 같은 현장직에 오다니.

“자기야. 자기는 다 좋은데. 그 개 같은 성격만 좀 어떻게 해 줘라. 이제 나랑 어울리려면 너도 격을 맞춰야지.”

인사부로 끌고 온 엄성찬은 누가 보면 사내 연애라도 하는 것처럼 굴었다. 실제로는 고백이고 뭐고 아무것도 안 한 상태였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래서 다행이었다. 그때의 자신이라면 엄성찬이 고백하는 순간 얼떨결에 받았을지도 모른다.

저 녀석이 뒤에서 자기가 부르면 언제 어디든 가이딩하러 오는 보조배터리라며 성인 배를 따서 배태리라는 별명을 만든 것도 모른 채 말이다.

“넌 진짜 운이 좋은 줄 알아.”

엄성찬의 말대로라면 가문도 좋고 곧 팀장까지 달 녀석이 자신 같은 남자에게 각인을 집착할 필요 없다. 그런 완벽한 에스퍼라면 각인하고 싶은 가이드가 줄 서야 하는 거 아닌가?

보면 볼수록 자기밖에 생각 못 하는 이기적인 성격과 진절머리 나는 가문의 부심은 이따금 자신의 목을 조여 오는 것만 같았다.

한마디로 엄성찬에게 걸린 자신은 참으로 운이 안 좋았다. 내가 왜 이딴 쓰레기 같은 놈에게 각인을 해 줘야 해? 배신감과 모멸감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으나 참았다.

엄성찬의 팀장 진급 시험에 보조 가이드로 따라가는 역할까지만 해 주고 모든 것을 끝낼 작전이었다. 이미 부서 이동과 관련한 상담 요청을 엄태석 부장에게 한 상태였다.

“입 좀 그만 열고 현장에 집중해.”

“알겠어. 우리 깍쟁이.”

“씨발.”

자신의 욕설에 아랑곳하지 않고 엄성찬은 귀엽다는 듯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거칠게 손을 뿌리치며 불법 이능력품 밀매하는 인천 부둣가로 들어갔다.

이번 현장은 A급으로 불법 이능력품을 밀매하는 조직을 잡는 거였다. 일반인은 이능력품에 관련된 거래를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이런 일이 일어났다.

현장의 난이도를 따졌을 때 결코 A급은 아니었다. 그러나 엄성찬의 진급 시험이다 보니 일부러 등급을 높게 측정한 게 분명했다.

“……쳇 재수 없는 가문.”

그래야 A급 현장에서 팀장 진급했다는 타이틀을 가져가기 때문이다. 거기다 에스퍼의 수도 적은 해당 현장에 자신을 포함해 가이드는 총 세 명이었다.

입구 초반까지 엄성찬을 엄호하고 가이드가 모여 있는 임시 대기소로 가 조용히 반지를 꺼내 들었다.

조금 전 엄성찬이 건넨 반지였다. 배터리 취급할 땐 언제고 이딴 걸 주면서 각인하자고 하고 이후의 미래를 속삭인다.

가이드가 되어버려 기껏 세워 놨던 미래가 무너진 것도 열받는데. 겨우 상처받은 마음의 문을 열어 준 녀석의 미래는 까 보니 똥이었다. 똥인 줄도 모르고 그걸 소중하게 품고 다니며 무엇일까 희망에 찼던 자신이 바보 같다.

엄성찬이 억지로 끼워 놓은 반지가 유난히 불편했다.

“뭐야. 각인 반지 받았어?”

유난히 반짝거리는 반지를 본 건지 사수 가이드가 아는척하며 말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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