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도박을 즐기고 있는 사람을 훑어보자 한눈에 봐도 질이 안 좋아 보이는 사람부터 평범하게 생긴 사람까지 가지각색이었다.
“오트. 너 게임 잘해?”
“내 실력 알잖아.”
“어? 알지, 알지.”
전혀 모르는 얼굴로 호은이 대충 아는 척을 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트럼프 카드 게임부터 명절에 익숙하게 봐 왔던 고스톱까지.
구석에는 여러 개의 머신과 보여 주기식 룰렛이 있었다.
커다란 내부는 카지노 분위기가 더 강한 편이었다.
“루카. 저 테이블 재미있어 보이는데.”
호은의 어깨에 팔을 걸친 도인호가 자연스럽게 몸을 틀었다. 그러자 호은의 눈앞에 사진으로 봤던 한여울의 부모가 있었다.
그들은 초조해 보였다. 여자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카드를 보더니 남편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배팅.”
일부 칩을 내려놓는 여자를 지켜보던 호은의 앞에 낯선 그림자가 졌다.
“저기는 이미 게임 진행 중이라 끼실 수 없습니다. 원하시는 게임이 있으실까요?”
와이셔츠에 조끼를 입은 남자는 해당 층의 총관리자처럼 보였다. 그는 직업 정신이 깃든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가느다랗게 뜬 눈은 마치 뱀처럼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
“게임이 다 운이지. 뭐. 일단, 칩 교환부터 해야 할 거 같은데.”
따라오지 말라는 무언가의 말이었으나 직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의 곁을 졸졸 따라다녔다.
“칩 교환은 이곳에서 하시면 됩니다. 혹시 게임이 처음이시라면 블랙잭 같은 쉬운 것도 있습니다. 딜러와 함께 게임을 하니 방법 익히시기도 좋으실 거고요.”
직원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호은은 대충 고개를 까닥였다. 교환소에 들른 도인호가 수표를 내밀었다.
“일단 이것만 바꾸고 나머지는 테이블에서 교환해도 되나?”
“네. 가능합니다만, 고객님 해당 수표 확인이 필요할 거 같은데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실까요?”
캐셔는 전화기를 들더니 누군가에게 수표 번호를 확인했다.
“우린 배팅 낮은 게임 말고 판 큰 곳에서 하고 싶은데.”
칩 교환을 끝낸 도인호가 말하자 직원의 입술이 한쪽으로 올라갔다. 마치 호구를 발견한 것만 같은 미소였다.
처음부터 한여울 부모가 있는 테이블로 가고 싶었으나 도인호는 호은의 생각과 다르게 직원이 제시한 것처럼 블랙잭을 먼저 시작했다.
[3팀 들어왔습니다.]
소형 인이어는 겉으로 봤을 때 티가 나지 않았다. 덕분에 호은은 귓바퀴를 만지는 척 소리에 집중했다.
1팀은 한여울 부모를 지켜보는 자신과 도인호를 말했다.
2팀은 엄태석과 강힘찬이다.
마지막으로 3팀은 남운수와 배연우 팀이었다.
“21 숫자 만드는 게 쉽지 않네.”
호은은 Q가 쓰인 카드를 던졌다. 의자에 기댄 채 자연스럽게 시선을 위로 올리자 박기현이 있는 쪽에는 엄태석과 강힘찬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시선을 올리자 계단을 내려오는 남운수와 배연우가 보였다.
“어차피 질 거라면 조금 더 재미있는 거 하고 싶은데.”
호은의 시선이 VIP 테이블로 향했다. 두 사람이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얼쩡거리던 직원은, 인제 보니 드래곤 중 한 명인 거 같았다.
돈을 잃어감에도 오로지 재미만 쫓는 도인호와 호은을 보고 어떤 확신을 얻었는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다면 포커 게임은 어떻습니까? 초반 게임룰은 어려우실 수 있으실지 몰라도 재미는 보장합니다.”
“어떤 재미?”
“원하셨던 판돈이 커지는 재미도 있고…….”
흰색 장갑을 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 직원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들거렸다.
“사람의 나락을 볼 수도 있죠.”
“그래? 그거 재미있겠는데.”
호은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표정 중 가장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불행을 재미로 사는 쓰레기 같은 인간처럼 말이다.
속으로 빙고를 외친 직원은 바닥 색이 다른 VIP존으로 두 사람을 데려갔다.
일반 플레이어도 볼 수 있게 커다란 홀에서 진행하는 VIP 테이블은 이미 한여울의 부모가 차지하고 있었다.
“해당 게임은 여기서만 합니다. 앞에 플레이가 끝날 거 같으니 잠시 구경하시죠.”
호은은 직원의 말에 테이블 상태를 봤다. 플레이어 앞에 카드 두 장이 놓여 있고 위쪽에 카드 네 장이 오픈되어 있었다. 정확한 룰은 기억 안 나지만 저렇게 놓여 있는 게임이라면 텍사스 홀덤 플레이 중인 거 같았다.
“리버 오픈하겠습니다.”
딜러가 다섯 번째 카드를 앞으로 돌렸다.
다섯 장의 카드는 스페이드 10, 하트 10, 하트 Q, 하트 K, 클로버 A 순으로 놓여 있었다.
한여울 부모의 얼굴은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무언가 지나치게 몰두한 사람의 얼굴이 저렇게 추할 수도 있는지 호은은 처음 알았다.
“배팅.”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는 남자가 자신의 칩 전체를 내밀었다.
“폴드.”
한여울 엄마는 뒤집어진 카드 두 장을 딜러에게 전달했다. 아빠 쪽은 고민하는 듯 손가락으로 콧등을 매만지고 있었는데 정했는지 칩을 내밀었다.
“배팅.”
한여울 부모 쪽에는 이제 칩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 판에서 이기는 게 아닌 이상 그들은 더 이상 게임을 진행하지 못할 거다.
관전자를 데려왔다는 것은 곧 게임이 끝난다는 걸 의미했다.
직원은 알고 있는 거다. 저 두 사람이 질 거라는 걸.
“쇼다운. 패를 공개해 주세요.”
길쭉하고 곧게 뻗은 손가락이 카드를 한 장씩 공개한다.
“하트 J, 하트 A.”
남자가 오픈한 카드와 테이블에 있는 5장의 카드를 조합하자 한여울의 아빠 카드는 공개할 필요도 없이 게임이 끝났다.
“로열 스트레이드 플레쉬. 썬 님의 승리입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내 패도 나쁘지 않았는데… 로, 로열 스프레이드? 이것들이 어디서 수작질이야!!”
한여울 아빠가 테이블 위에 있던 카드를 뒤엎으며 난동 부리자 대기하고 있던 가드들이 움직였다.
“이거 놔!! 놓으라고!! 내가 여기다 얼마나 꼬라박았는데!! 날 이렇게 취급해!! 이 새끼들 이거 신고할 거야!!”
소리를 크게 지르는 남자를 다들 불구경하듯 쳐다봤다. 그건 호은 또한 마찬가지였다.
‘딸이 벌어다 준 돈을 이딴 곳에 쓰다니.’
“그러게. 돈을 제대로 사용하셨어야죠. 올바른 곳에.”
“??”
호은은 순간 자신이 입 밖으로 말을 뱉었나 싶었다. 속으로 생각한 말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
“……라 했더니. 허영심을 키우고 있었네.”
앞에 말은 여전히 소리 지르는 한여울 아빠 때문에 제대로 듣지 못했다.
호은은 뭔가 꺼림직함을 느꼈다. 자신의 속마음과 같은 말을 꺼낸 남자를 확인하고자 가까이 다가갔다.
“어?”
게임에 승리한 ‘썬’이라는 남자는 자세히 보니 지난번 촬영장에서 사인을 요구했던 남자였다. 두꺼운 뿔테안경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민얼굴인 남자의 눈동자는 마치 시체처럼 텅 비어 보였다.
눈앞에 남자가 자기를 못 알아볼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호은은 반사적으로 몸을 피해 버렸다.
어쩐지 들키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이게 바로 연예인병이라는 걸까? 이런 곳에서 팬을 마주하는 것이 껄끄러웠다.
“끌고 가.”
“꺄악!!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촬영장 스태프에게 정신 팔렸던 호은은 한여울 엄마의 비명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두 사람이 가드에게 잡히더니 굳게 닫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
호은과 도인호는 시선을 맞췄다. 원래 계획이라면 도인호가 한여울 부모를 따라가고 호은이 게임을 진행하며 해당 층을 감시하고 있어야 했다.
“아는 사람?”
호은의 행동이 어수선해지자 도인호가 호은에게만 들리게끔 속삭였다.
“지난번 촬영장에서 사인했던 남자야.”
“……아 그놈.”
순간 도인호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눈치채지 못한 호은은 테이블 쪽에 앉아 있는 남자와 굳게 닫힌 철제문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다행히 철제문 앞을 막고 있는 가드는 없었다.
“이런 소란스럽게 했군요. 자 그럼 자리가 정리된 거 같으니 포커 게임 진행하시겠습니까?”
직원은 영업용 미소를 장착한 채 다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저 남자도 참여하는 건가.”
도인호가 썬이라고 불린 남자를 흘긋 내려다봤다.
직원이 딜러와 눈짓하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좋은 패가 나오는 건 흔한 경우가 아니죠. 한 판 더 진행하시겠다고 합니다.”
“오트……. 나는.”
호은이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원신 출입했습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폴이 무전을 쳤다.
[3팀. 밀착하겠습니다.]
곧바로 배연우의 목소리가 인이어를 통해 들려왔다.
소식을 들은 도인호는 생각에 잠겼다. 원신의 이능력은 정신 지배다. 이능력을 발동할 거면 일반인이 많은 지하층에 머물 거다. 하지만 한여울 부모에게 접근할 확률도 배제할 수 없다. 어느 쪽이 더 높을까…….
“여기는 제가 맡겠습니다. 들어가서 다른 거 하지 말고 상황만 보고 있어요. 위험해 보이면 바로 무전하고.”
“알겠어.”
서로에게 딱 달라붙어 친근하게 귓속말을 하는 두 사람을 보며 직원이 사이가 좋다며 어색하게 웃었다.
“두 분이 사이가 참 좋으시네요.”
“그런가? 난 오늘 운이 안 좋아서 패스.”
직원의 말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친 호은이 한 발짝 물러났다.
괜히 주변 테이블을 얼쩡거리며 구경이나 해 볼까 혼잣말을 뱉으며 직원 눈치를 보던 호은은 슬쩍 다른 곳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재미있어 보이니 난 참여해야겠군. 다른 플레이어도 받자고. 판은 커야지 재미있으니까.”
점차 시야에서 멀어진 호은을 확인한 도인호가 게임 테이블에 앉자 구경하던 다른 두 명이 해당 테이블에 참여했다. 아마도 손님으로 가장한 드래곤 측 선수일 거 같았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드래곤과 관련된 건가? 아니면 정말 손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못 본 촬영하는 호은의 모습을 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첫인상은 최악으로 찍힌 상태였다.
도인호는 썬이라고 불린 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내렸다.
“사람 얼굴 보고 웃는 건 실례인데.”
“아. 실례.”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도인호가 칩을 만지며 별거 아니라는 듯 툭 던졌다.
호은의 이상형을 물어본 적은 없었으나, 분명 저렇게 생긴 얼굴은 아닐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들었다.
“말이 짧네.”
앞에서 느껴지는 적의에 썬이 턱을 괴며 언짢은 기분을 티 냈다.
“그쪽도.”
“흐응. 뭐야. 형씨 나한테 뭐 돈이라도 잃었던가? 싫어하는 티를 못 감추네.”
오늘 처음 만나는 두 사람이지만 서로에게 숨길 수 없는 적대감을 보였다.
팽팽한 긴장감이 게임 테이블 위로 지나갔다. 카드를 나눠주기 전부터 이미 두 사람은 경쟁하고 있었다.
***
호은은 주변 테이블을 구경하는 척 철제문이 있는 쪽으로 조금씩 좁혀 나갔다. 한여울 부모를 데리고 간 가드는 금방 방에서 나왔다.
‘안에 드래곤 직원은 없는 건가.’
철제문 옆에 서서 괜히 딴청을 부리고 있던 호은은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드래곤 직원으로 보이는 자들이 일제히 위쪽으로 시선 집중된 걸 눈치챘다.
‘럭키!’
게임은 그렇게나 안 풀렸건만 다행히도 이런 운은 따라 주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