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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86화 (86/129)

86화

“네 있습니다.”

이번 일회용 이능력품인 물약은 어제처럼 기존에 있던 인물로 변하는 것과 다르게 무작위로 섞인 얼굴로 만들어 준다고 했다.

“이거 한 통에 2억이라 지속 시간은 최대 5시간은 갈 거다. 그래도 아지트 들어가기 직전에 마시는 게 가장 좋고.”

“2…… 2억이라니.”

호은은 뒷주머니에 대충 넣었던 통을 조심스럽게 꺼내 호호 불고는 손에 쥐었다. 2년은 일해야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물약이라니.

“차 준비됐다네. 가자.”

배연우는 관리원과 통화를 끝내고 주차장으로 유유히 걸어갔다. 주차장에는 미리 빼 둔 건지 안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짙게 선팅된 봉고차가 있었다.

차 키가 꽂혀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도인호가 운전석으로 가려는 걸 배연우가 말렸다.

“너네는 뒤에서 체력이나 비축하고 있어.”

호은은 물약을 꽉 쥔 채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차안은 배연우가 틀어 놓은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로 통통 튀는 아이돌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빠른 템포와 높은 하이 톤의 목소리는 신나기 짝이 없었지만, 그 누구도 리듬을 타거나 음악을 즐기지는 않았다.

“후우.”

호은은 떨리는 숨결을 뱉었다. 깡패를 직접 보러 가는 것도 긴장되고 첫 현장 때 무참히 밟혔던 반정부를 떠올리니 심장 박동이 빠르게 뛰었다. 무섭지 않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간신히 반정부를 제압하기 위해 칼로 찌른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몸은 금방 재생될 거다.

“…….”

호은은 재킷 안쪽에 있는 수갑을 떠올렸다. 이능력 구속구. 이걸 반정부에게 채우면 이능력도 자가 치유 능력도 억제된다고 한다. 싸움은 최대한 피하고 어떻게든 구속구를 채우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덜커덩.

비포장도로를 건너느라 흔들리는 차는 공터에 멈췄다.

“여기서부터는 따로 움직인다.”

배연우의 말에 차에서 내린 도인호와 호은은 먼저 아지트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뗐다.

낡은 가로등의 전구가 꺼졌다 켜졌다 반복하며 불안한 빛으로 두 사람을 비추었다.

“호은 형. 손 줘 봐요.”

슬슬 아지트가 보일 때 도인호는 호은을 멈춰 세웠다. 미리 준비해 왔던 은색 반지를 꺼낸 도인호는 호은의 손을 잡아 들었다.

“가이딩 억제하는 반지입니다. 안에 반정부가 있으면 가이딩이 되는 순간 바로 들킬 테니까요.”

“우와. 이런 것도 있구나.”

엄지손가락에 반지가 딱 맞게 들어갔다. 반지를 손에 끼워 본 적 없던 호은이기에 손가락의 느낌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러면 여기서 약도 마시고 갈까?”

골목길로 들어온 두 사람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물약 통을 꺼내 들었다.

“자. 치얼스!”

뚜껑을 열고 물약 통을 마치 근사한 와인 잔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밀자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호은을 귀여워하는 도인호의 시선이 닿았다.

-통

유리잔이 아니기에 서로의 것이 부딪혔을 때 청량한 소리는 나지 않았다.

호은은 불량 식품 단맛이 느껴지는 약을 한 번에 삼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글부글 피부에 방울이 생겼다 터졌다 반복하는 느낌이 짧게 지나갔다.

“됐나?!”

손바닥으로 얼굴을 뭉개듯 만졌으나 평소와 뭐가 다른지 전혀 모르겠는 호은이었다. 핸드폰 카메라를 들어 촬영하자 조금 파리해진 얼굴의 호은이 화면에 비쳤다.

“어? 인호야. 나 얼굴 안 바뀌었는데?”

핸드폰을 내린 호은이 도인호를 보자 이쪽도 변하지 않았다.

“뭐야! 너도 안 변했어. 2억이나 하는 이능력품인데 사기당한 거 아냐?”

“그건 아닐 겁니다. 대리님이 설명하실 때 놓친 게 있는데 해당 이능력품은 약을 먹은 사람을 인지 못 하는 사람에게만 효과가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얼굴이 변할 거란 걸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기존 얼굴 그대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저희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로 보일 테니 괜찮아요.”

도인호는 엄지와 검지로 호은의 양 볼을 꾹 눌렀다. 깜짝 놀라서 입술을 내밀며 속사포로 말하던 호은의 입술이 한층 더 앞으로 나와 존재를 과시했다.

“우우.”

호은은 자기 모습이 얼마나 해괴망측할지 상상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쉽지만 두 사람의 장난은 여기까지였다.

달이 높이 떴다. 작전 시작이다. 구겨진 물약 통이 구겨져 쓰레기통 안에 처박혔다.

***

-쿵쿵쿵

문을 열자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들렸다. 색색의 화려한 조명이 천장에 달린 상태로 가게 내부를 쏘고 있었다.

어수선한 매장 안은 클럽을 연상시켰다. 일반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술을 마시거나 무대에서 노는 모습이 보였다.

“인호한테는 너무 이른데.”

도인호의 나이가 성인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호은은 걱정이 들었다. 매일 회사에서 목 끝까지 셔츠를 잠그던 녀석이 이렇게 헐벗고 놀고 있는 사람을 보고 있어도 되나 싶었다. 호은은 무대를 몸으로 가리며 도인호의의 어깨를 잡고 걸음을 재촉했다.

“눈 아픕니다.”

어두운 곳이 끊임없이 번쩍번쩍 빛나서 그런지 도인호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아마 어두운 곳은 갔어도 이렇게 휘황찬란한 곳은 처음 와 본 거 같다.

“내가 이끌어 줄게.”

“이런 곳 많이 와 봤어요?”

“많이는 아니고. 대학생 때 뒤풀이하다가 한두 번? 나랑은 안 맞더라고.”

커다란 음악 소리에 도인호는 티는 내지 않았지만, 마음 같아서는 얼굴을 와락 구기고 싶었다.

가뜩이나 소리에 예민한 에스퍼인데 평소에 자신을 진정시키던 호은의 가이딩도 막혀 있으니 소리가 더 크게 닿았다.

“저기! 계단 앞에 막고 있는 사람 있는데?!”

평소와 같은 목소리 톤으로 말하면 들리지 않기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물론이며 최대한 몸을 밀착해 말하는 호은에게 모든 촉감이 집중됐다.

도인호는 호은이 가리키는 방향에 시선을 던졌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찼다.

‘한두 번을 이렇게 다른 놈에게 붙어 있었다는 건가.’

생각을 꼬리에 물수록 본인이 알 수 없는 호은의 옛 모습이 상상되었다. 일순 불쾌함이 올라왔다.

“인! 호! 야!”

“아.”

가만히 멈춰 서 있는 도인호를 본 호은이 어깨에 매달려 그의 이름을 한 음절씩 끊어 불렀다. 도인호는 서둘러 미간에 힘을 뺀 뒤 호은을 바라봤다. 도인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를 이 남자는 자신이 보채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있었다.

“정신 차려! 저쪽부터 드래곤 구역 같으니까.”

“……네.”

아랫입술을 느리게 핥은 도인호는 호은의 입술에서 간신히 시선을 뗐다. 아련한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분명 기분 탓이라는 걸 알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지켜서고 있는 가드가 있는 곳으로 갔다.

“회원증.”

“여기.”

박기현에게 받은 초대장을 주자 떡대도 넓고 배도 튀어나온 남자가 두꺼운 손으로 초대장을 요리조리 쳐다봤다.

“약 구하러 왔소?”

“뭐 비슷해. 놀러 오라고도 했고.”

호은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두 사람이 맡은 배역은 외국물 먹은 망나니 재벌 역할이었다. 우연한 경로로 박기현의 약을 접하고 박기현은 돈이 많은 두 사람에게 초대장을 건넸다는 스토리를 만들었다.

물론, 현재의 박기현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겠지만 말이다. 가드는 두 사람을 위아래로 훑었다. 걸치고 있는 모든 것이 명품이자 돈 냄새를 맡은 가드는 이를 드러내며 옆으로 비켜섰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간 호은은 등에 땀이 흠뻑 젖어 있었다. 혹시라도 앞에서 문전박대라도 당하면 어떡하나 싶었다. 그렇게 된다면 가드를 음습한 곳에 데려가 손봐야 했는데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없었다.

“오트. 저기 미스터 박이 있네.”

호은은 도인호를 오트라 불렀다. 여기서 서로의 실명을 부르면 안 되기에 호은은 루카, 도인호는 오트라는 일회성 이름을 만들었다.

지하 1층은 시끄러웠던 위층의 스피커보다는 볼륨이 그나마 낮은 편인지 적어도 서로에게 소리 지르며 말할 필요는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안쪽 가운데에 커다란 칵테일바가 보였다. 박기현은 그곳에 있었다.

“…….”

박기현 바로 앞을 지나갔지만, 그는 두 사람을 알아채지 못했다. 해당 사실을 확인한 호은의 다리가 조금 가벼워졌다. 여기까지 계획대로 순조로웠다.

지하 1층 고객은 대부분 약쟁이인 건지,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입에 뭔가를 물고 있거나 술에 타다 남은 거 같은 흰색 가루가 테이블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무슨 냄새인지 알 수 없는 탁한 공기에 숨을 최대한 적게 쉬며 호은은 훤히 드러난 지하 2층을 내려다봤다.

1층에서는 계단을 내려가고 나서 철제문을 열어야지만, 지하 1층의 모습이 보였는데 지하 1층과 지하 2층은 천장이 트여 있어 지하 2층에서 도박하는 내부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다.

도인호는 박기현이 있는 칵테일바 의자에 앉아 은밀하게 수표를 내밀었다. 지하 2층에 있는 도박장은 초대장이 있다고 해도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마실 건 필요 없나?”

“밑에서 즐기기 좋은 걸로.”

금니를 드러내며 웃은 박기현은 어제 맞았던 흉터가 모두 치료된 상태였다. 꿈같은 이틀의 휴식을 취하고 오늘 밤 출근한 걸로 기억하는 박기현은 아무것도 모른 채 양주 두 잔과 금색 칩 두 개를 건넸다.

“오신 적 있으신가? 이렇게 말도 없이 돈부터 내미는 게 심상치 않은데.”

박기현은 딱 봐도 돈이 많아 보이는 도인호에게 뭐라도 더 얻어내고 싶은지 친한 척 말을 걸어왔다. 회원제로 운영하는 도박장을 지하 1층에서 훤히 보이게 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약을 사러 온 돈 많은 약쟁이 중 호구를 잡는 것.

밑에 관심을 가진 자 중에 게임비와 하루 이용권을 포함한 천만 원을 내는 고객에게 박기현은 지금처럼 금색 칩을 줬다.

“지인에게 듣고 왔다.”

“아아. 그렇군. 해당 칩에는 오백만 원의 값어치밖에 없으니 계단에 내려가면 돈을 내고 칩 교환을 할 수…….”

도인호는 박기현의 말을 듣지도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기현이 줬던 잔 중 하나는 앉아 있는 와중에 다 비운 상태였다. 가게 내부에 깔린 드래곤 조직원이 의심의 눈초리로 신규 고객인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약 때문에 온 걸로 알고 있으니 적당히 어울려 줘야 했다. 어차피 에스퍼의 몸이기에 약 같은 건 입에 닿자마자 맹물이나 다름없게 됐지만 말이다.

도인호는 대충 성의 없는 걸음으로 비틀거리는 척 호은에게 다가갔다.

“재미있으면 칩을 더 교환해 보자고.”

“그래.”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도 여전히 가드들이 서 있었다. 박기현과 무전을 주고받은 가드들이 지나갈 수 있게 자리를 피해 줬다.

계단을 내려가자 깡패가 운영하는 도박장인 것과 다르게 몇 군데에는 딜러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원형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게임을 하는 무리는 가지각색이었다.

‘이곳이 우리가 맡은 구역.’

호은은 커다란 도박장에 기죽지 않게끔 허리를 곧추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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