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엄태석의 공격을 계속 받아낸 박기현은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아지트에 박혀 있다가 왜 나온 거지?”
“으윽, 휴가를 받아서…….”
엄태석의 질문에 박기현이 힘겹게 대답했다.
“휴가 기한은?”
“이틀…….”
박기현의 몸은 한계에 다다랐는지 대답을 하다 말고 쓰러졌다.
“이틀이면 충분하군.”
배연우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지 엄태석의 행동을 멍하니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뭐 하는 건가. 구속하지 않고.”
“……네!”
엄태석은 허리춤에서 수갑 모양의 이능력품을 건넸다. 머뭇거리던 배연우는 엄태석이 내민 수갑을 받아 기절해 버린 박기현에게 채웠다.
“협회로 돌아가서 인사부 호출하고 전체 회의하자고. 배연우 대리 말처럼 협력 임무니까 홍보부 작전이 뭔지, 우리도 들어 봐야 하니까 말일세.”
엄태석과 배연우를 지켜보는 남운수는 불안한 듯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홍보부와 인사부의 관계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닌 거 같아 걱정하는 걸까?
남운수는 유독 인사부와 관련되었을 때 불안해 보였다.
“앗.”
호은이 너무 빤히 쳐다봤던 건지 눈이 마주쳤다. 피할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남운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
고갯짓을 갸웃거리고 나서야 남운수는 화들짝 놀라더니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현장 수습부 부를 테니 이만 복귀하세.”
현관문은 박살 나고 벽과 바닥에는 피가 튀겨져 있었다. 밑에 사는 일반인이 올라왔다가 이 현장을 보면 당장 경찰에 신고했을 게 분명한 모습이었다.
호은은 이런 현장을 수습하는 부서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기절한 박기현은 여기서 가장 힘이 센 도인호가 맡기로 했다. 아수라장이 된 집안을 벗어나자 차가 주차되어 있던 골목길 가로등 조명 아래 사람이 서 있었다.
“뭐야.”
가장 먼저 나갔던 배연우가 짜증 난다는 어투로 말했다.
“너! 너야말로 뭐야! 사람 얼굴 보고 다짜고짜 그렇게 말하냐?! 기껏 걱정, 크흠. 사고 칠까 봐 왔더니.”
엄성찬이 벌겋게 익은 목덜미를 손으로 벅벅 문질렀다. 보이지 않는 배연우의 뒷모습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가증스러운 새끼.”
독설을 내뱉은 배연우는 앞에 주차된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벙찐 표정의 엄성찬은 두 눈을 멍청이 깜빡이다 허, 하고 기가 찬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배터리 주제에 자꾸 저따위로 행동해?”
혼잣말을 중얼거린 엄성찬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현, 현장에서 담배 피우면 안 되는데.”
엄성찬의 앞을 지나가던 남운수가 담배를 뺏어 들었다.
“아 씨발. 안 내놔?”
“다, 담배꽁초 같은 거 남겼다가 발각될 수도 있고…….”
“재수 없는 새끼가 뭐라는 거야.”
엄성찬이 남운수의 어깨를 툭 치며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으으.”
호은은 엄성찬의 모습에 진저리쳤다. 저런 놈이 신입 가이드를 홀라당 꾀어서 각인무새가 된다는 건가? 앞에서는 착한 척 굴고? 상상만으로 토 나올 거 같았다.
지금은 대리님께 성격을 들켜 저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는 거 같지만 과거에 성격을 숨겼을 걸 생각하니 구역질이 절로 올라온다.
“아. 박기현은 우리 차에 태우게나.”
호은이 소름 돋은 팔을 쓸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오고 있던 엄태석이 검은색 자동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 실으면 돼.”
엄성찬은 뒷좌석 문을 열었다. 뒷좌석이 넓은 카니발은 박기현 한 명 정도 누워 있다고 해도 큰 문제 없어 보였다. 도인호는 뒷좌석에 박기현을 던졌다.
“으윽.”
기절한 와중에도 고통은 느껴지는지 박기현이 신음을 뱉었다.
“자동차에 물티슈 있나 물어봐야겠다.”
호은은 박기현의 피가 묻은 도인호의 손바닥을 안쓰럽게 쳐다봤다.
지난번 배연우가 손수건을 들고 다니던 게 떠올랐다. 현장 일을 하려면 손수건은 필수 아이템인 거 같다.
“피 냄새나요?”
도인호는 바지에 손바닥을 문지르며 어떻게든 피를 지우려고 애썼다.
“남에 차 앞에서 뭔 짓거리야? 이거 줄 테니까 저리 가.”
엄성찬은 버럭 성질을 부리더니 물티슈를 던졌다. 인사부 자동차에서 준 물티슈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호은은 왠지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엄성찬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가 있기에 그가 건네는 호의는 껄끄러웠다.
“괜찮습니다.”
그건 도인호도 마찬가지였는지 두 사람은 거절하고 홍보부 자동차로 걸어갔다.
“인사부 새끼들 더럽게 싸가지 없네.”
뒤에서 개가 짖나. 호은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귀를 손으로 막으며 자동차에 탑승했다.
***
뻥 뚫린 도로를 지나 서울에 있는 본사로 들어갔다. 일반 회사라면 건물 내부가 전체 소등되어 있었겠지만, 이능력자 협회는 밤낮 상관없이 일하기 때문인지 지난번 낮에 왔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출입문 게이트에 카드를 찍고 인사부가 있는 층으로 올라가 사무실에 들어가자 CCTV를 감시하는 소수의 직원이 남아 있었다.
호은은 자연스럽게 한여울을 감시하는 CCTV를 확인했다. 집안까지 CCTV를 달고 있는 건 아니어서 그런지 현관문 앞과 창문 등 나갈 수 있는 출입구 쪽 위주로 둘러보고 있었다.
‘별일 없겠지.’
현장에 집중하기 위해 인이어를 빼 둔 상태라 이후의 상황은 알지 못했다. 집안 도청은 호은뿐만 아니라 인사부에도 넘어갔을 테니 지금 헤드셋을 끼고 있는 직원이 틈틈이 체크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회의실 중앙에 박기현을 꽁꽁 묶어 두고 나자 폴과 강힘찬이 사복을 입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자다가 연락을 받은 건지 강힘찬의 머리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어떻게 된 검까?”
소매로 눈을 비비며 들어왔던 강힘찬은 박기현에 관해서는 설명을 못 받은 건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자리에 멈추어 섰다.
“이놈 각성한 거 숨기고 있었어.”
“증거도 확보했슴까?”
엄성찬이 심드렁하게 말하자 강힘찬이 커다란 목소리를 내뱉었다. 배연우는 지금까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증거품입니다.”
안경알을 손으로 밀자 작은 sd 카드가 숨겨져 있었다.
호은은 불현듯 박기현이 걸었던 이능력으로 상상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안 돼. 저걸 도인호 앞에서 보인다고?!’
사색이 된 호은의 얼굴을 확인한 배연우는 엄태석 자리로 가더니 노트북에 sd 카드를 연결했다.
“박기현의 이능력은 사람이 원하는 이상(理想)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이능력이 걸린 사람 말고는 보이지 않아 그동안 약을 먹은 사람과 구분하기 어려우셨겠죠.”
“뭐야. 우리는 안 보여 줘?”
엄태석 뒤에 서서 화면을 보고 있던 배연우는 회의실에서 반말을 내뱉는 엄성찬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우리 부서 직원의 사생활이라 양해 부탁드립니다. 엄. 성. 찬. 팀. 장. 님?”
“뭐? 이게 아까부터 기어오르네?!”
공손한 말투였으나 한 글자씩 음절을 끊어 말하는 배연우의 목소리는 비꼬는 것만 같았다.
“엄성찬. 아무리 두 사람이 과거에 아는 사이라 해도 말하는 태도가 그게 뭔가? 쯧.”
노트북을 닫은 엄태석은 혀 차는 소리를 내며 엄성찬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참 나. 알겠다고요.”
입술을 삐죽거리는 엄성찬의 모습은 마치 복어처럼 독을 가득 품은 모양새였다.
‘그나저나 모두에게 공개된 건 아니라 다행이다.’
호은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자신이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던 이상이 이런 거일 줄이야.
아마 과장된 면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이걸 남들에게 특히, 도인호에게 보여 줬다면 부끄러움에 혀를 깨물었을지도 모른다.
“알다시피 드래곤은 지금 반정부인 타이거와 동맹으로 보입니다. 도대체 왜 범죄 조직과 손을 잡은 건지, 박기현을 데리고 무엇을 하려고 한 건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말을 끝낸 배연우는 회의실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생수통의 뚜껑을 열더니 그대로 박기현의 머리에 뿌렸다.
“어푸푸. 콜록, 콜록. 뭐야?!!!”
기절했던 박기현은 코에 물이 잘못 들어가기라도 했는지 연신 기침을 뱉으며 몸을 발버둥 쳤다.
그는 뒤늦게 자신이 의자에 앉아 꽁꽁 묶여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
찡그린 얼굴에서 자신의 상황이 좋지 못함을 눈치챈 박기현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박기현. 아까 말했던 거 잊지 않았겠지? 몇십 년을 몸이 뚫리고 베이고 반복하는 것보다 조직 배신하는 게 더 낫잖아.”
“…….”
회의실은 박기현의 거친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대답을 망설이듯 미간을 찌푸리던 박기현은 손을 들어 올리는 엄태석에 급하게 입을 열었다.
“각성한 건 얼마 안 됐어. 처음엔 마약의 효과가 뛰어난 줄 착각했으니까.”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사실을 털어놓았다. 하는 게 주먹질밖에 없던 박기현은 깡패 생활을 전전했다.
그러다 우연히 마약을 제조하는 녀석과 얽히게 되어 브로커 역할을 해 주다 제조까지 도와주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때 그놈들이 나타난 거야. 드래곤…….”
모두의 시선이 박기현에게 쏠렸다. 그는 과거를 회상하는지 허공을 바라봤다.
“드래곤이 어중간한 조직을 쓸어 모으기 시작했지. 내가 발 담그고 있던 곳도 드래곤 때문에 박살 났고, 살아남은 건 나같이 운 좋은 말단 직원이 다였어.”
그는 그때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일을 겪었으면 깡패는 그만 접고 똑바로 살지 그랬어?”
배연우가 삼단봉을 꺼내 들어 박기현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그랬으면 진작에 그렇게 살았겠지. 어쨌건 살려면 돈이 필요했고 나는 마약을 제조했을 뿐이야. 어느 순간 내가 파는 게 드리밍이라는 이름이 됐고 찾는 사람도 제법 늘었지.”
여기까지는 인사부가 박기현을 조사한 내용과 일치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나. 유명해져도 너무 유명해졌는지 드래곤에게까지 내 이야기가 들어간 거야.”
“그게 언제지?”
“한 달 전인가…….”
“드래곤 조직원 중에 스카우트한 사람은 누구였어?”
“드래곤 조직원이 아니야. 어린 꼬마였지.”
“!!”
“어린 꼬마가 와서 약을 산다고 했어. 돈을 다른 사람의 세 배는 쳐주길래 이놈도 어디 조직에 속한 심부름꾼인 줄 알았지. 하지만 녀석은 심부름꾼 따위가 아니었어. 그 녀석은 타이거였던 거지.”
박기현은 피식 웃더니 점점 웃음소리가 커졌다.
“큭. 쿠큭, 크하하하! 쓰레기 같은 내가 사실은 에스퍼라네?!! 내가!! 더 이상 시궁창 인생을 안 살아도 된다고!! 범법자의 왕이 되게끔 만들어 준다며 날 드래곤에게 데려간 거야!! 오늘이 지나면 드래곤에서도, 타이거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그야 난!!! 옛날의 무능력한 말단이 아니니까!!”
-쫙!!
“시끄러워.”
무표정한 얼굴로 배연우가 박기현의 뺨을 때렸다. 호은은 눈을 굴리며 주변 반응을 살폈지만 다들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정신 차려 새끼야. 에스퍼 각성은 이게 문제야. 각성하고 나서 자기가 뭐 대단한 놈이 된 줄 안다니까? 너 나한테 맞으면서 기분 좋지?”
-쫙, 쫙
왼쪽과 오른쪽을 차례대로 때리는 배연우는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네가 쓰레기 새끼라는 건 둘째 치고. 그거 알아? 너 말이야, 가이딩 흐름이 엉망이야. 그러니까 내 감정이 더러운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가이딩을 받아먹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