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저, 정확히 말하면…… 엄, 엄성찬이 현장을 거부해서 우리끼리 가는 거지만…….”
남운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난폭한 핸들링을 배연우가 선보였다.
“도착했다.”
옆으로 몸이 기울어진 호은을 도인호가 단단히 받쳐 주었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걸 느끼며 호은은 난폭 운전자를 쳐다봤다. 사나운 낯빛의 배연우가 불만 있냐는 듯 쳐다봤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호은은 애써 시선을 피하며 결의를 다졌다.
“박기현의 집은 옥상 쪽이야.”
CCTV가 없는 골목길에 주차한 자동차는 어둠에 숨듯 시동을 끄고 쥐 죽은 듯 잠복하고 있었다.
“박기현을 덮치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계속 침묵을 유지하던 도인호가 배연우를 보며 서늘한 눈빛을 빛냈다.
“일단 우리는 손님인 척 박기현에게 다가갈 거야. 지금 변한 모습 전부 기존에 박기현한테 직접 약을 구입한 적이 있거든.”
“손님인 척 위장한 다음은 무엇을 하면 되는 거죠.”
“원신에게 세뇌당했는지 아닌지 확인할 거야.”
배연우는 안경을 꺼냈다.
“이 안경을 쓰고 정신계 관련 이능력을 당한 사람을 쳐다보면 눈동자 색이 빨갛게 보여.”
배연우는 민얼굴에 안경을 썼다. 은색 테두리가 인상적이었다.
“세뇌당했다면 그놈 몸에 도청기 붙이고 끝. 만약 세뇌당하지 않았다면 녀석의 이능력을 우리가 직접 확인할 거다. 이 안경에는 카메라도 달려 있으니까 에스퍼라는 증거를 일단 확보하는 거지.”
“저……. 세뇌당하면 왜 그냥 나와야 하나요?”
“원신의 이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계 에스퍼 중 세뇌한 사람의 생각을 공유하는 녀석도 있어.”
그 말인 즉시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보인다면 이쪽의 정체가 들킬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거 줘 봐.”
배연우의 말에 남운수는 들고 있던 태블릿을 줬다. 박기현은 집에서 나간 흔적이 없는지 현관문 앞에 몰래 설치한 카메라의 장면은 고요하기만 했다.
“혹시라도 소리 들리는지 잘 체크하고.”
도인호와 남운수를 겨냥한 말이기에 두 사람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배연우는 태블릿의 펜을 꺼내더니 화면에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두 명은 현관문 앞으로 대기한다. 신호를 주면 현관문을 정확히 9번 두드려. 그게 암호니까.”
“넵.”
“박기현을 마주하면 드리밍을 구하러 왔다면서 약쟁이 흉내 좀 내. 돈은 이거 건네면 될 거다.”
배연우는 언제 준비한 건지 오만 원권이 가득한 돈뭉치를 꺼내 들었다.
“박기현이 정말로 에스퍼라면 그 자리에서 이능력을 쓸 거다. 만약에 아니라면 약만 주고 내보낼 확률이 높아.”
“이때 박기현이 세뇌당한 게 확인되면 도청을 심은 뒤 바로 빠져나오면 된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세뇌당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박기현을 붙잡아라. 이후에 차에서 대기하던 두 명이 합류해서 그 녀석을 잡을 거니까.”
화면에 그려진 작전도에는 두 명씩 짝이 맞춰져 있었다.
“박기현의 이능력은 환상을 보여 주는 거야. 그만큼 상상력이 좋은 녀석이 가야 이능력 확인도 제대로 하겠지.”
배연우의 시선이 호은에게 닿았다.
“그리고 한 명은 해당 작전을 완벽하게 이해해야 하니까.”
배연우는 펜을 돌리며 저울질했다. 누구를 선택해야 성공할 확률이 높아질까. 빠르게 돌아가던 펜이 멈췄다.
“남운수, 권호은. 박기현은 너희가 만난다.”
“작전 이해도라면 저도 완벽합니다.”
호은의 이름이 불리자마자 도인호가 반박했다.
“……작전은 나랑 남운수가 짠 거니 둘 중 한 명이 가는 게 맞아. 이왕이면 팀장과 신입 조합이 낫잖아?”
“…….”
도인호의 인상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호은은 그를 달래듯 등을 살살 어루만졌다.
“홍보부 임무가 뭐냐. 반정부 잡아야지? 사사로운 감정을 현장에 끌어다 놓지 말아라.”
배연우의 말이 맞기에 도인호는 입을 다물었다.
“그, 그럼 너랑 내, 내가 가는 건?”
남운수의 목소리에 세 사람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내가 사사로운 감정…….”
-지이잉
배연우의 말을 끊은 건 핸드폰 진동음이었다.
“여보세요.”
-뭐야. 너 진짜 현장 나갔냐?
성량이 큰 목소리가 핸드폰 스피커를 뚫고 나왔다. 끝 쪽이 갈라진 목소리. 한번 들으면 잊기 어려운 엄성찬의 목소리였다.
“갔으면 어쩔 거고, 안 갔으면 어쩔 건데.”
-미쳤네?! 지금 당장 복귀해! 이번 임무는 협력하는 건데 홍보부 혼자 개인 행동하면 어떡해?!
“홍보부가 반정부 잡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쓸데없는 말 할 거면 끊어.”
-잠깐!
뒤에 목소리가 더 들렸지만 배연우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었다.
흘깃 남운수를 쳐다본 배연우가 턱을 치켜들었다.
“이놈 쫄보라 안 올 거니까 권호은이랑 가.”
“…….”
남운수는 입술을 달싹이다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부는지 창문 너머 바람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정리된 상황에 호은은 눈치를 보다 차 문을 열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남운수도 따라 내렸다.
골목은 조용했다. 가로등 밑에 버려진 쓰레기더미의 퀴퀴한 냄새와 담벼락에는 누구의 짓인지 보기 흉한 그림이 페인트로 낙서 되어 있었다.
호은은 박기현이 있는 옥탑방을 보기 위해 시선을 올렸다. 커튼이 쳐진 창으로 붉은빛 조명이 일렁거렸다.
“갈까요.”
“…….”
두 사람은 혹여나 아랫집 사람에게 들킬까, 발뒤꿈치를 들고 소리가 나지 않게 계단을 올라갔다.
철문 앞에 선 호은은 배연우가 말한 것처럼 일정한 박자로 총 9번의 노크를 했다.
-철컥
걸쇠 사이로 눈가에 상처가 있는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충혈된 두 눈과 다크서클이 내려온 눈가는 사진으로 봤던 박기현의 모습과 사뭇 달랐다.
“약 구하러 왔어. 드리밍 남아 있지?”
가래가 들끓는 듯 걸쭉한 목소리가 남운수를 통해 나왔다. 그는 손을 떨며 주섬주섬 재킷에서 봉투를 꺼내 신경질적으로 박기현에게 들이댔다.
“내가 따로 판매하는 건 지난번이 마지막이라 했을 텐데.”
“돈은 충분히 줄 테니까 빨리 내놓으라고!!”
헉헉. 쇳소리를 내며 숨을 내쉬는 남운수는 마약 중독자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앞에서 시선을 끌어 준 덕에 호은은 안경을 고쳐 썼다. 박기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안경알이 짧은 순간 빛났다.
-툭툭
호은은 통화 기능이 켜져 있는 가이드 워치를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렸다. 박기현이 세뇌당하지 않았다는 신호였다.
“내가 안내한 가게에서 구매해야 한다고 했잖아. 거기는 한 개만 줘서 성에 안 차?”
“그래!! 씨, 씨팔. 성에 안 차! 오, 오늘만이라도 좋으니까 우리한테 드리밍 팔라고!!”
박기현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걸쇠 사이로 남운수가 건넨 봉투를 집었다.
-퉤
침을 뱉어 봉투를 열어본 박기현은 돈뭉치를 빠르게 세기 시작했다.
“뭐야. 어디서 돈이라도 땄나?”
금니를 드러내며 씩 웃은 박기현은 문을 닫더니 걸쇠를 풀고 다시 문을 열어 줬다. 현관에 들어가자 밖보다 온도가 낮은 집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에취.”
호은이 코를 훌쩍거렸다. 천천히 집안 풍경을 구경하자 무언가를 만들고 있던 건지 안쪽 방에서 흰색 연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두 사람을 현관에 세워둔 박기현은 연기가 나는 방이 아닌 커다란 작업 테이블이 있는 거실로 갔다.
이틈에 호은은 신발장 턱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스위치 아랫부분에 도청기를 설치했다.
“자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앞으로는 회원비 내고 아지트로 와.”
수전증이 있는지 가루약을 전해 주는 박기현의 손이 덜덜 떨렸다. 작은 봉지에 담긴 가루약을 받는 동시에 호은은 박기현의 소매에 소형 도청기를 붙였다.
“집이 평소랑 다른데.”
뒤를 돌아 양주와 잔을 꺼내 드는 박기현에게 남운수가 말했다.
“요즘 몸에 열이 많아서 에어컨 몇 대 설치했어.”
“잠을 잘 자지 못하나 봐?”
바닥에는 귀마개 여러 개가 뒹굴고 있었다.
“그럴 일이 있었어…….”
글라스 잔에다 양주를 따른 박기현이 잔을 건네자 남운수는 자연스럽게 가루를 탔다.
호은도 남운수가 하는 행동처럼 글라스 잔에 가루를 털고 잔을 흔들었다. 가루가 떠다니는 글라스 잔에 입을 대는 척을 하고 실제로는 혀만 갖다 댔다.
호은이 술을 마시는지 확인한 박기현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공중에 붕 떴다.
-쨍그랑
호은은 들고 있던 잔을 떨궜다. 머리가 빙빙 돌더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핑크빛으로 노을이 진 하늘로 도인호와 함께 회전목마를 타고 있었다.
치아를 내보이며 활짝 웃은 도인호가 만세를 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밝은 목소리로 도인호는 그렇게 외쳤다.
화면은 다시 전환됐다. 최후의 만찬 그림에 나왔던 식탁이 호은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식탁 위에는 호은이 평소 먹고 싶었던 음식이 나열되어 있었다. 식탁 양 끝에 앉은 도인호가 포크를 들고는 또 해맑게 웃었다. “맛있는 걸 먹다니!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도인호의 해맑은 목소리와 웃음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다음은 63스퀘어에 앉아 있는 용이 등장했다. 호은은 어디서 생겼는지 알 수 없는 검과 방패를 들고 용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호은의 맞은편, 푸른 불꽃을 양손에 띄운 도인호가 또 한 번 외쳤다.
“강해진 형과 같이 싸울 수 있다니! 살아 있어서!”
하늘을 날아다니던 호은은 멈췄다.
이상하다. 내가 이렇게 하늘을 날 수 있었나?
“다행이야.” 귓가에 속삭이는 도인호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균열이 생긴 천장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아닌 촌스러운 벽지가 되고 뻥 뚫린 바닥은 노란 장판을 보여 줬다.
“낄낄. 어때? 한층 더 꿈같지?! 더 이용하고 싶으면 드래곤 아지트에서…….”
비틀비틀 중심을 못 잡는 호은의 팔을 잡아 준 박기현은 말을 하다 멈췄다.
“아아……. 뭐야 너? 이거 장난 아니게…….”
텅 비어 버려 초점을 잡지 못한 박기현의 눈동자가 정확히 호은의 얼굴로 향했다.
“역시.”
중얼거린 남운수는 호은을 잡고 있는 박기현의 손목을 꺾어 버렸다. 우두둑.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최근에 몸이 타오를 거 같고 소음에 유난히 민감해졌죠? 당신 도대체 언제 각성한 건가요…….”
남운수의 말은 귀에 들리지도 않는지 박기현은 오로지 호은만을 눈에 담고 돌진하려 했다.
-퍽
제정신이 아닌 박기현의 다리를 남운수가 발로 찼다. 평소의 남운수라 생각하지 못할 만큼 과격한 행동이었다.
“더……! 더 만지고 싶어!! 최고야!! 그 약이랑 비교도 안 될 만큼!”
벽에 부딪혀 주저앉은 박기현의 뼈에서 으드득 소리가 났다. 돌아간 어깨가 원래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거기다 보기 흉하게 뼈가 튀어나온 다리도 시간이 지나자 뼈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히익. 힉. 너 얼마야?! 내가 널 살 테니까 이리 와!!”
박기현은 몸이 정상화되자 돌진하듯 호은에게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