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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79화 (79/129)

79화

당장이라도 한여울의 집에 들어가 남자의 얼굴을 한 대 쳐야지 분이 풀릴 거 같았다.

“미친놈들. 지금 복권 당첨금을 도박으로 다 탕진한 거 아니야? 거기다 애한테 협박까지 하고?”

목에 핏줄이 선 호은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외투를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한여울 집에 가서!”

-지이잉

소파에 올려둔 도인호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각. 걸려 온 전화의 발신자는 남운수 팀장이었다.

“…….”

인이어에서는 여전히 한여울의 부모가 쓰레기 같은 발언을 이어 가고 있었다. 호은은 집어 들었던 겉옷을 내려놓으며 전화를 받으라 손짓했다.

“도인호입니다.”

전화를 받은 지 1분도 채 안 되어서 도인호는 알겠다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통화 내용이 들리지 않았기에 호은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앞을 얼쩡거렸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래?”

“호출입니다. 회의실로 가야 할 거 같아요.”

“지금 호출이라고?!”

바닥에 떨어진 겉옷을 주워든 도인호는 호은에게 건넸다.

“최대한 빨리 오라고 했습니다.”

“왜 그런데?”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찰나의 순간 도인호의 표정이 구겨졌다 펴졌다.

“남운수 팀장님께 전화가 온 건 처음입니다.”

그만큼 급하다는 뜻이겠죠. 이어 나온 도인호의 말에 호은은 조금 전 도인호가 지었듯 인상을 찌푸렸다. 여전히 시끄러운 인이어가 신경 쓰였으나 새벽에 긴급 호출이라니.

양말을 신을 새도 없이 현관으로 나가 운동화를 급하게 구겨 신었다.

***

두 사람은 회의실로 빠르게 뛰었다.

남운수와 배연우는 퇴근하지 않고 계속 회의실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준비할 시간도 없이 바로 회의실에 오라고 명령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

닫힌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라니까!”

문밖에까지 들려오는 배연우의 커다란 목소리에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서둘러 노크를 한 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칠게 전화를 끊은 배연우가 핸드폰을 던질 듯 들었다.

“일머리 없는 새끼!”

“저…….”

“뭐야. 너네 왔……, 잠깐만. 너네 잘 때 그렇게 입냐?”

색만 다를 뿐이지, 같은 패턴의 위아래 옷을 입은 두 사람의 잠옷은 누가 봐도 커플 옷처럼 보였다.

회의실의 위치가 걸어올 만큼 가깝다 보니 두 사람은 빨리 와야 한다는 생각에 옷차림새는 크게 신경 쓰지 못한 것이었다.

배연우는 올라오던 화가 빠르게 가라앉는 대신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느꼈다.

“빨리 오려다 보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변명 아닌 변명을 내뱉은 호은은 괜히 겉옷의 단추를 만지작거리다 앞부분을 잠갔다. 그렇게 하면 커플 잠옷이 숨겨지기라도 하는 듯 말이다.

“그래. 급했지.”

웃던 것을 멈춘 배연우는 핸드폰을 째려봤다.

“일단 권호은. 너 왜 보고서에 적은 부분 바로 말하지 않았어?”

“어떤 거 말씀하시는 건지.”

“그래. 일이 바쁘다 보면 기억 퇴화도 생기고 그럴 수 있지.”

배연우는 뒷주머니에 차고 있던 삼단봉을 꺼내며 음산하게 웃었다.

“이럴 땐 충격 요법이 딱 맞는데. 그렇지?”

며칠 잠을 설친 배연우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삼단봉을 들려는 배연우의 팔을 간신히 막은 호은은 기억났다며 외쳤다.

“한, 한여울 사건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라라. 기억났어? 안 나도 괜찮은데.”

“아니요! 기억이 선명해도 너무 선명합니다!”

“…….”

배연우는 삼단봉을 조용히 원래 위치에 넣었다. 흥분을 가라앉은 채 자리에 앉은 배연우는 다리를 꼬았다. 맞은편에서 죄인처럼 눈치를 보던 호은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너무 바빠 보여서 나중에 말씀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계속 말해 봐.”

“한여울을 관찰하는 도중 학대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만나서 상태를 봤었고…… 당시에는 증거를 찾지 못했지만, 도청을 통해 증거를 얻었습니다.”

호은은 귀에 차고 있던 인이어를 내려놓았다.

“노트북에 연결해서 녹음본 들려드리겠습니다.”

호은의 말에 배연우는 그럴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어지럽게 굴러다니는 서류 뭉치를 건넸다.

“그 증거가 부모가 도박한다는 거냐?”

배연우가 던진 서류는 도박장을 출입하고 있는 사람들의 신상이 적혀 있었다. 형광펜으로 두 줄 그어진 부분을 확인하자 한여울 부모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우리도 방금 알았어. 한여울 부모가 드래곤과 얽혀 있다는걸.”

“!!”

배연우는 회의실이라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매캐한 연기가 시야를 흩트려놨다. 호은은 손바닥으로 앞을 휘적거리며 연기를 없앴다.

‘한여울의 이야기를 말하지 않아서 이 시간에 부른 건가?’

호은이 의문을 가졌을 때 회의실 문밖으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퀵 왔습니다.”

문 근처에 있던 도인호가 문을 열자 캡 모자를 쓴 남자가 택배 상자를 들고 있었다. 남자는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일반적인 택배 회사의 로고가 아닌 이능력자 협회 로고가 들어가 있었다.

도인호는 받은 택배를 배연우 앞에 내려놓았다.

“대리님 이건?”

“주문한 일회용 이능력품.”

커터칼로 테이프를 자르자 상자 안에는 주사기와 링거 팩이 있었다. 푸른빛의 오묘한 색을 내는 팩을 배연우가 집어 들자 아직 나가지 않은 기사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요청하신 체인지 도구입니다. 급하게 요청하신 만큼 3개 중 1개 먼저 보내 드립니다. 주사기에 팩 내용물을 담고 몸에 투입하면 1시간 정도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변합니다.”

“팩 하나당 몇 번 사용할 수 있죠?”

“네 번입니다.”

기사가 허공에다 원을 그렸더니 반짝이는 재질의 종이가 나타났다.

“서명 부탁드립니다.”

배연우는 바닥에 떨어진 볼펜을 주워 확인서에 사인했다. 그러자 글자가 종이에서 움직이더니 허공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하나씩 떼진 자음과 모음이 전부 허공에 뜬 순간 글씨와 확인서 모두 사라졌다.

“네. 다음에 또 이용 부탁드립니다.”

기사가 회의실을 나가자 배연우는 주사기를 들었다.

“자. 누구부터 맞을래?”

날카로운 주삿바늘 부위가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호은은 저 주사를 맞고 무슨 일이 생길지 걱정이 들었다.

“의료 자격증 없는 사람이 주사를 놓아도 되는 건가요?”

“상관없어. 이능력품인데 뭐.”

“사, 상황 설명을 해 줘야 할 거 같은데…….”

호은이 기피하는 모습을 확인한 남운수는 배연우를 말리며 조심스럽게 주사기를 뺏어 들었다.

“아. 내가 설명을 안 했던가. 현장 나갈 거야.”

“현장이요?”

“박기현이 드디어 드래곤 아지트에서 나왔어. 그러니까 이 시간에 불렀지.”

아까부터 남운수는 손에서 태블릿을 놓지 않았다. 틈틈이 뭔가 하는 거 같더니 아지트에 빠져나간 박기현을 관찰하고 있던 것이다.

“인사부에도 연락했지만. 그놈은 내 말을 개같이 알아먹으니까.”

으득으득 어금니를 갈며 배연우가 중얼거렸다.

“인사부 없이 저희가 박기현을 만나러 가도 되는 건가요?”

“생각보다 문제가 커서 말이야. 우리가 먼저 치지 않으면 나중에는 경찰까지 개입할 거 같아서 말이지.”

“경찰이요?”

어쩐지 그 정도 범죄를 저지른 집단인데 경찰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리 없었다.

깡패와 반정부까지 연관된 이번 사건에 배연우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게 어느 정도 이해 갔다.

“그러니까. 박기현 만날 기회가 생겼을 때 만나야 된다는 거지.”

배연우는 팩을 찢더니 남운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사기를 건네받은 남운수는 팩에 담긴 액체를 주사기에 담았다.

“박기현은 지금 자기 집으로 돌아갔어. 언제 다시 나올지 모르니까 빨리 가야 해.”

팔에 주사기를 찌른 배연우는 주사를 다 놓고 나자 새로 바늘을 갈아 끼웠다.

“현장 잠입이군요.”

이해한 듯 호은이 말하자 대충 고개를 끄덕인 배연우는 차례대로 주사를 맞혔다.

호은은 피부 안의 세포가 커졌다 작아졌다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느꼈다. 실제로도 피부가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이 모습으로 들킬 일은 없겠지.”

가장 먼저 모습이 바뀐 건 배연우였다. 분홍색 머리카락은 새까맣게 변하고 기존의 생김새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어디서 본 거 같은 흔하디흔한 얼굴로 변한 배연우가 거울을 보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약 구매한 일반인 리스트에 있는 사람의 모습이야. 오늘 주문 넣은 것치고 퀄리티는 제법 괜찮은데?”

배연우는 호은에게 거울을 넘겼다. 호은 또한 거울로 변한 자기 모습을 확인했다. 축 처진 눈매와 작은 콧방울과 입술은 어딘가 옹졸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게…… 나?”

더듬더듬 얼굴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호은은 충격을 받았다.

“원래 얼굴로 돌아오는 거 맞죠?”

“얀마. 그 사람한테 실례다. 걱정하지 마. 금방 돌아갈 거니까.”

호은이 도인호는 어떻게 변했는지 확인하고자 고개를 돌렸다. 기존의 얼굴과 비교하면 몇 배는 형편 없는 얼굴이었으나 변한 도인호의 얼굴은 일반인치고 제법 준수했다. 어딘가 억울한 감정이 드는 호은이었다.

“박기현이 언제 아지트로 갈지 모르니까 바로 출발하자.”

목소리까지 전혀 다른 톤으로 변한 배연우가 먼저 회의실을 나갔다.

태블릿을 챙겨 든 남운수의 모습은 어딘가 중성적인 외모였다. 네 사람 모두 얼굴이 변한 걸 확인한 호은은 새삼스럽게 자신이 일하는 곳이 어딘지 자각하게 됐다.

“운전은 내가 할게.”

운전대를 잡은 배연우는 과감히 액셀을 밟았다. 차는 마치 스프링에 튀어 나가듯 거칠게 앞으로 나아갔다.

“이번 일 해 뜨기 전에 마무리해야 한다.”

듬성듬성 놓인 가로등이 희미하게 도로를 비추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있지. 첫 번째는 일반인 범죄 조직과 연관되어 있다는 거고. 그 범죄 조직과 반정부가 손이라도 잡았다면 세상이 이걸 아는 건 금방일 거야.”

“그렇게 되면.”

“기껏 에스퍼와 가이드 인식을 바꿨는데. 일 못 하는 무능한 집단으로 언론 플레이되겠지.”

도로를 빠져나온 자동차는 주택이 모여 있는 골목길 사이로 들어갔다.

“두 번째는 에스퍼 의심자인 것만 확인하면 인사부만 도와준 꼴이 된다는 거다. 의심자랑 반정부를 같이 잡아야 해.”

“협력해서 같이 임무 수행하는 거 아니었나요?”

“인사부는 의심자가 각성하는 순간 인계하면 그만이야. 설마 자기네 할 일 끝났는데 우리가 반정부 잡는 거까지 기다려 주겠냐?”

이유를 들은 호은은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세 번째는 반정부의 계획을 망쳐야 해. 무슨 목적 때문에 에스퍼 의심자를 강탈해 가는 건진 모르겠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안 돼.”

배연우의 말에 호은은 자연스럽게 한여울을 떠올렸다. 한여울의 부모도 이 일과 연관되어 있다. 그들을 막지 않는다면 한여울은 부모에게 그런 막말을 계속 들어야 할 게 분명했다.

“세 가지 이유면 충분하지? 우리끼리 현장에 들어가는 게.”

배연우의 말에 남운수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을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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