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호은은 자리에 앉아 녹음기를 틀었다. 가져온 개인 노트북에 녹취 기록을 타이핑하며 보고서를 작성하는 모습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매정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한여울은 우리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거기다 오늘 같은 접촉은 한두 번밖에 못 하는 거니까요.”
폴의 말에 호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두 번이면 두 번째까지는 된다는 건가.’
도인호는 기존 자리를 정리하고 호은의 옆으로 짐을 옮겼다.
한여울을 관찰하기 위해 학교와 학원 등 그녀가 자주 가는 시설에 설치해 둔 CCTV 화면이 분할되어 노트북에 나왔다.
학교 수업을 듣고 있는 한여울은 아이들 몰래 받았던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토끼 인형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토끼 인형에 도청이 있지 않았슴까? 이제 집에서도 무슨 일이 있는지 볼 수 있겠슴다.”
호은의 타이핑 소리가 멈췄다. 강힘찬은 자신을 째려보는 폴에게 입술을 내밀며 휘파람을 불었다.
“한여울의 관찰 기간 만료 일자는 다음 주 일요일입니다. 그동안 집은 건들지 않았지만, 이 정도 기한에 도청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죠.”
폴의 말에 호은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걸 본 도인호는 도청 주파수가 어디에 맞춰져 있는지 확인했다.
***
영어 학원이 없었던 오늘은 현장에서도 큰 문제가 없었다. 폴과 도인호가 번갈아 가며 한여울이 이동할 때마다 근처를 지켜 섰고 호은은 보고서를 마무리하고 나서는 줄곧 한여울을 관찰하기 위해 CCTV 화면만 봤다.
한여울의 수요일 일정은 다른 평일에 비해 여유 있는 편이었다. 오후 7시에 집에 들어간 한여울을 끝으로 현장은 마무리됐다.
인천 지사로 돌아온 도인호와 권호은은 홍보부 회의실 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 둔 호은은 화이트보드에 붙여져 있는 인물 사진과 메모를 천천히 훑었다. 박기현을 제외하고 전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험악한 외관이 평범한 직업을 가진 사람은 아닌 거 같더니, 가운데 크게 드래곤이라 적혀져 있었다.
“드래곤…….”
“박기현이 속해 있는 조직 이름이야. 애들 장난도 아니고 드래곤이 뭐냐, 드래곤이.”
배연우는 유치해 죽겠다며 들고 있던 종이를 구겼다. 박기현을 담당한 팀은 현재 현장에 참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오늘도 따로 모이지 않았다고 한다.
뒷세계와 연결이 된 거 같은 박기현에게 접근하기 위해 자료조사 중인 두 사람을 보며 호은은 주변을 기웃거렸다.
“그런데 요즘 같은 시대에도 깡패가 있어요?”
배연우는 호은의 질문을 듣더니 하품을 내뱉었다. 이미 식어 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배연우는 호은에게 서류 하나를 넘겨줬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여전히 있지. 보니까 마약이랑 도박 대부업 등 안 하는 게 없는 악질 조직이야. 박기현은 최근에 스카우트 된 거 같고.”
호은은 배연우가 정리한 걸로 보이는 드래곤의 범죄 이력을 살펴봤다. 불법을 이렇게 많이 저지르고 있는데 안 잡힌 게 용하다.
“그 녀석. 처음에는 드래곤이 파는 마약을 사다가 다른 사람에게 몇 배 부풀린 돈으로 팔았어.”
배연우는 어떻게 구해 온 것인지 봉지에 들어 있는 흰색 가루를 손으로 집어 흔들었다.
“박기현이 에스퍼 의심자라 놈이 구한 마약을 먹은 사람에게 이능력을 발휘했을 거고, 실제 같은 망상에 그 녀석이 파는 마약은 입소문이 나 드래곤 보스에게 까지 들어갔던 모양이야.”
“그럼 정황상 박기현은 에스퍼가 맞는 거 같은데 빨리 잡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호은의 말에 배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증거가 없어. 마약이라도 없었다면 헛것을 본 사람들의 증언을 모으기라도 할 텐데. 그 녀석이 이능력을 쓴 건지 마약 때문에 그런 건지. 인사부 입장에서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한 거지.”
전기포트기로 커피를 끓여온 남운수가 배연우 머그잔에 커피를 부었다. 식었던 머그잔에서 하얀 김이 올라왔다.
“하필이면 우리가 인사부랑 협력하기로 한 그날부터 드래곤 소속이 되어서 녀석을 마주치기는 더 어렵지. 무슨 회원제가 돈이 있어도 들어가질 못해.”
“회원이 되는 기준이 뭔데요?”
“두 가지 기준이 있어. 첫 번째는 녀석들과 신뢰 관계가 두터운 기존 회원에게 초대장을 받는 것. 두 번째는 녀석들이 노리고 있는 호구 대상자로 타깃이 되는 것.”
자신의 머그잔에 커피를 따르던 남운수는 손이 데기라도 한 건지 미간을 찌푸렸다.
“호구 대상자요?”
“도박 사업도 한다고 했지? 그 피해자를 말하는 거야.”
호은의 질문에 대답한 배연우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일단 해당 피해자 리스트업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골라 변장해서 들어가든지 해야지.”
배연우는 복잡하게 됐다며 욕설을 뱉었다.
“그래도 회원제로 운영하고 있으니까 반정부도 박기현에게 접근하는 건 어렵지 않을까요?”
호은의 말에 배연우는 책상에 엎어졌다. 지구 내핵을 뚫을 기세인 그의 한숨에 호은은 입을 다물었다.
“아니. 우리 지금까지 놀아나고 있었어.”
남운수는 호은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더니 화이트보드를 가리켰다.
“?”
화이트보드에는 호은이 잘 알고 있는 남자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반정부 원신. 회원제여도 이렇게까지 정보가 안 빠져나갈 수 없는데 저놈이 정신 지배를 하고 있어서 가능했던 거다.”
“드래곤과 타이거가 연관되어 있다는 말씀인가요?!”
호은이 입술을 달싹일 때 도인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맞아. 그래서 굳이 박기현은 납치할 필요가 없던 거지. 이미 지네 손안에 있는 놈이니까.”
인사부는 에스퍼 의심자를 감시하다 이능력을 확인하면 이능력자 협회로 스카우트한다.
홍보부는 반정부를 잡는다.
현 상황에서 박기현은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차질이 생긴 거다.
“그놈의 이능력 증거가 뭐라고 그거 기다리다가 허무하게 반정부한테 뺏긴 건지.”
배연우는 몸을 일으킨 뒤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나마 다행인 건 드래곤인지 뭔지를 잡으면 반정부의 꼬리도 잡을 수 있는 거니까. 어찌 되었든 현장 잠입이 시급하네.”
호은은 수첩을 가져와 배연우가 말한 내용을 알기 쉽게 마인드맵을 그려 정리했다. 반정부와 깡패의 조합이라.
“그런데 원신은 어린아이 모습 아닌가요? 어떻게 깡패집단인 드래곤이랑 손을 잡게 된 걸까요.”
“정신 지배 이능력은 세뇌도 가능하니까 그걸 이용했겠지. 하지만 세뇌를 쓰더라도 가이딩 소모가 클 텐데.”
중얼거린 배연우는 담뱃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네는 뭐 특별한 거 없었지?”
피곤해 보이는 배연우는 지금 당장이라도 휴식이 필요해 보였다. 호은은 그와 한여울에 대해 의논을 나누고 싶었으나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애써 삼켰다. 배연우의 퇴근 시간을 더 늦추면 안 될 거 같았다.
“없으면 우리도 마무리하고 갈 테니까 먼저 가 봐.”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건넨 호은이 도인호의 팔을 붙잡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밤 10시가 되니 바깥은 깜깜했다.
“별일 없어?”
“인형을 방에다 두고 계속 공부 중인 거 같습니다.”
호은의 물음에 도인호는 왼쪽 귀에 차고 있던 인이어를 손으로 감쌌다.
도인호가 듣고 있는 건 토끼 인형에 심은 도청 장치로 다행히 한여울이 인형을 버리지 않고 자신의 방에 갖다 놓았다.
“역시 내가 듣는 게 낫지 않을까?”
인이어를 가져가려고 손을 들자 도인호가 괜찮다며 호은의 손을 잡았다.
마주 잡은 손을 적당히 흔들며 숙소로 향하자 풀벌레 우는 소리가 노랫소리처럼 두 사람 주위를 채워 나갔다.
“아까 인사부에서 나보고 폐 끼치지 말라고 했을 때 말이야.”
귀뚜라미 소리를 가르고 나온 고운 미성의 목소리가 귓가에 부드럽게 닿았다.
“나는 가이드면서도 영웅 놀이를 하고 싶었던 걸까 싶더라. 가이드 우선순위는 에스퍼잖아.”
올려다본 하늘은 오늘따라 별 한점 보이지 않아 까만 물감을 칠해 놓은 거 같다.
앞서 걷던 호은이 걸음을 멈췄다. 가느다란 발목부터 도드라진 복숭아뼈를 음미하듯 쳐다본 도인호는 호은을 따라 멈추어 섰다.
“앞으로도 나는 이런 일을 보면 계속 덤벼들 거 같은데……. 매번 네가 억지로 내게 맞춰 줄 필요 없어. 그러니까 싫으면…….”
호은의 등은 넓은 편이었지만 도인호와 비교했을 때 한참이나 작은 등이었다. 어둠에 당장이라도 삼켜질 거 같은 왜소한 등을 뺏기기 전 도인호가 끌어안았다.
“회사 몰래 이런 일 하다 문제 생기면 책임 물어야겠죠.”
고조없는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63스퀘어처럼 징계받을 수도 있습니다.”
목덜미에 갖다 댄 입술이 점점 위로 올라오고 있다.
“그런데 전. 형이랑 하는 건 다 좋아요. 징계든 뭐든.”
“…….”
“좋은 짓도 나쁜 짓도 다 나랑 해요. 책임져 줄 테니까.”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서 말한 도인호는 할 말이 끝난 건지 붙었던 몸을 떼려고 했다.
“잠깐만.”
잘익은 사과처럼 불타오르는 얼굴을 들킬까 호은은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하게 붙잡았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달아오른 뺨의 온기를 식히듯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목소리까지 잘생긴 건 진짜 반칙아닌가.’
도인호에게 닿은 모든 곳에 열감이 피어올랐다.
호은은 떨리는 숨소리를 들키기라도 할까 봐 잠깐 숨을 멈췄다.
***
숙소로 들어와 잠잘 준비를 한 두 사람은 사이좋게 인이어를 나눠 꼈다. 애초에 각자 하나씩 주어진 인이어라서 둘 중 한 사람만 듣고 있어도 상관없는데 말이다.
“조용하네. 자는 거 같기도 하고.”
소파에 앉아 따듯한 차를 마시며 호은이 말했다.
“숨소리가 일정한 거 보니 자는 거 같습니다.”
담요를 가져온 도인호가 호은의 어깨에 덮어 주며 그 옆에 앉았다.
“그런 게 들려?”
호은은 마시고 있던 차를 거실 테이블에 올려 뒀다. 따듯한 차까지 마시고 나니 절로 하품이 터져 나왔다.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고 있을 때였다.
“얼마 남은 거야. 그래서?”
“이제 1억도 안 남았어.”
“돈 더 벌 수 있다면서! 어떡할 거야 이제?!”
뭔가에 막힌 듯 윙윙거리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지금 이거 한여울 부모지?”
“그런 거 같습니다.”
잠이 달아난 호은은 소파에 기댔던 허리를 곧추세우고 소리에 집중했다.
“어떻게 일주일 만에 그만큼 잃어?! 짜 놓은 판에 당한 거 아니냐고!!!”
“내가 잃고 싶어서 잃었냐고!!! 그리고 뭐가 문제야. 저게 있는데.”
쿵쿵, 발소리와 함께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으음 아빠?”
“어. 여울아. 번호 나오는 꿈 꾼 거 없어?”
“없는데…….”
“거짓말하지 마! 우리한테 돈 주기 싫어서 그런 거지. 너 볼 수 있잖아!!!!”
“아니에요……. 정말……, 이번에는 안 꿨는데…….”
“그럼 빨리 꾸란 말이야! 우리가 왜 힘들게 널 데리고 있는데! 그놈들한테 넘겨 주기 전까지 값어치를 하란 말이야!”
“죄송, 죄송합니다…….”
대화를 듣던 호은이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