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어린 친구들 눈높이에 맞춰서 이야기를 들어야 하다 보니까. 인형 탈을 준비했어요. 두 분 다 센터 사람이니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호은은 토끼 앞발을 흔들고 손을 잡았다 펴며 재롱을 부렸다.
“젠장.”
화면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인호는 직접 보지 못했다는 분함에 몸에서 푸른 화염이 새어 나왔다.
세 사람은 교사가 안내한 상담실로 들어갔다.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와 전체적으로 따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이 놓여 있는 테이블까지 확인하고 나자 교사는 학생을 데려오겠다며 나갔다.
세 명의 아이가 동시에 들어올 예정이라 테이블도 세 군데로 나누고 서로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간격을 넓히며 자리 배치를 바꾸고 나자 문이 열리고 3학년 학생 세 명이 상담실 안으로 들어왔다.
“자 순서대로 앉아 볼까?”
강힘찬의 말에 아이들은 각자 자리에 앉았다. 호은은 자신의 앞에 앉은 한여울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안 더워요?”
인형 탈 안에 사람이 들어 있는 걸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한여울에 호은은 동작이 보이게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울아 안녕. 내가 누구게?”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얼굴이 안 보이잖아요.”
열 살치고는 똑 부러진 대답이었다.
호은은 턱받침을 한 손이 삐끗거리는 걸 느꼈지만 꿋꿋하게 콘셉트를 밀고 가기로 했다.
“나는 여울이랑 친해지고 싶은 토끼야.”
“아저씨. 자기소개할 때는 자기 이름을 제대로 밝혀야 한다고 안 배웠어요?”
새초롬하게 눈을 뜬 한여울은 작은 팔로 팔짱을 꼈다. 인형 탈 안에서 낮게 신음한 호은은 공기가 막혀 더운 것인지 저 당돌한 꼬마 때문에 당황해서 그런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캐럿이야.”
한여울이 자신의 이름을 알 리는 없을 거 같았지만 호은은 가명을 알려 줬다.
“당근을 좋아하나 봐요?”
“응. 토끼니까.”
꼬마 탐정 한여울의 취조는 끝났는지 그녀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흑요석같이 까만 눈동자가 잠시 인형 탈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흥미를 잃었는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건 뭐야?”
“영어 단어요.”
“우와. 여울이 영어 할 줄 알아? 대단한데.”
숙였던 고개를 든 한여울이 슬쩍 자신이 보고 있던 수첩을 내밀었다. 입 안에 방울토마토라도 든 거 같은 빵긋한 볼때기는 말랑해 보였다.
호은은 한여울의 영어 수첩을 보며 양팔을 위로 올렸다.
“이렇게 어려운 단어를 외우고 있는 거야?”
과장된 호은의 몸짓은 한여울에게 칭찬을 퍼부어 경계심을 낮추기 위함이긴 했으나 실제로 한여울이 외우는 단어는 초등학생이 외울 만한 단어는 아니었다.
‘Careless.’
부주의하다는 단어를 외우고 있는 초등학교 3학년이라니. 호은은 수첩을 돌려주며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냈다.
“여울에는 공부하는 거 좋아해?”
“아니요.”
“응? 그런데 지금도 영어 단어 외우고 있잖아.”
“시간이 아까워서요.”
벽을 허물었나 싶었으나 콘크리트 벽은 호은이 아무리 손으로 내리쳐 봤자 금 하나 가지 않았다.
“그러면 공부 말고 여울이가 좋아하는 건 뭐야?”
통통한 입술이 일자로 닫혔다. 고민하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한여울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도 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당근을 좋아해! 그리고 당근 케이크도 좋아하고! 당근 주스도 좋아해!”
호은은 토끼 발바닥을 까닥거리며 좋아하는 것을 나열했다.
“그게 뭐예요. 다 당근 음식이잖아요.”
볼멘 목소리로 한여울이 말하자 호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토끼니까 당근을 좋아해. 좋아하는 것의 기준은 다 다르고 음식일 수도 사람일 수도 있는 거야. 여울이도 그런 게 있지?”
알아듣기 쉽게 말했다고 생각한 호은이었지만 한여울은 여전히 이해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우물쭈물하는 아이는 처음으로 정답이 뭔지 모르는 문제를 만난 사람처럼 보였다.
“예를 들어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고 따듯한 기분이 드는 그런 것들을 말하는 거야. 부모님이랑 함께 있으면 그런 감정이 드니?”
호은의 말을 듣던 한여울은 풍성한 속눈썹을 여러 번 깜빡였다.
“돈. 돈이 있으면 집이 따듯해요.”
“돈?”
“엄마랑 아빠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한테 웃어 주니까.”
호은은 인형 탈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안 그랬다면 아이에게 굳어 있는 얼굴을 들킬 뻔했을 테니 말이다.
“돈 싫어하는 어른은 없잖아요?”
“그럼 여울이가 공부하는 이유가 돈 잘 벌고 싶어서 그런 거야? 캐럿은 너무 궁금해!”
또다시 의자 끝 쪽으로 몸을 밀착한 한여울에게 호은은 상담이라는 생각이 안 들게끔 재롱을 부려야만 했다.
주먹 쥔 손을 볼에 붙여 놓고 열심히 상체를 흔들자 한여울은 무심코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공부도 체육도 다 잘해야지 값어치가 올라간대요.”
보통 아이에게 값어치가 올라간다는 말을 쓰나? 호은은 대화하면 할수록 한여울의 부모가 궁금해졌다.
“여울이의 꿈은 돈 많이 버는 거야?”
한여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뭐가 되고 싶어?”
또다시 생각에 빠진 한여울에 호은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러나 침묵은 길어지고 한여울의 안색이 점점 어둡게 변해 갔다.
“돌아갈 곳이 있는 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한여울은 10살짜리 어린아이답지 않게 외로워 보였다. 호은은 애써 화제를 돌렸다.
“여울아 이거 맞추면 선물 줄 건데 1에서 9까지의 숫자 중에 하나를 맞추면 돼.”
호은은 여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준 다음 준비했던 카드를 꺼냈다.
한여울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뒤집힌 카드가 아닌 호은에게 시선을 주었다.
“선물이 뭔데요.”
“미리 알면 재미없지!”
호은의 대답에 한여울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책상에 놓인 카드를 쳐다봤다.
미래를 알 수 있는 아이라면 맞춰야 한다. 한여울의 입술이 동글하게 모였다.
“……7.”
“자 보자, 보자.”
호은이 카드를 오픈하자 다섯 개의 하트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두 사람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호은은 숨겼던 선물을 꺼냈다.
“틀렸지만! 그래도 오늘 여울이가 캐럿이랑 놀아 줬으니까 선물 줄게!”
“…….”
한여울은 호은이 내민 선물 상자를 받았다.
어느덧 상담 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폴과 강힘찬 쪽도 슬슬 마무리하려는 듯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이 교실에 가기 위해 일어났을 때 호은은 한여울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 다리를 굽혔다.
“여울아. 오늘 이야기하니까 어땠어?”
“나쁘지 않았어요.”
“하하. 나쁘지 않았다 정도였구나.”
호은은 두 팔을 벌렸다.
“한번 안아 주고 싶은데. 괜찮을까?”
호은의 말에 고민하던 한여울은 품에 안고 있던 선물을 바닥에 내려놓고 천천히 다가갔다. 호은은 품에 다가온 한여울을 꼭 안아 줬다.
“여울아. 다음에 또 보자.”
호은의 가슴에 머리를 갖다 댄 한여울은 싫어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작지만 분명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끝나는 시간에 맞춰 온 담당 교사는 아이들을 인도해 데려갔다. 열린 문으로 나가는 와중에 한여울은 뒤를 돌아 호은을 쳐다봤다.
아이들을 보내고 뒷정리를 끝낸 세 사람은 상황실로 복귀했다. 폴과 강힘찬은 중간중간 내용을 듣긴 했으나 앞에 있는 아이와 대화하느라 제대로 못 들었는지 어떻게 된 거냐 물었다.
“맞은 상처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만…….”
호은은 한여울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다 주머니 속에 넣어 뒀던 녹음기를 꺼냈다.
“대화 중에 이상하다 느껴진 부분이 많았어요. 부모가 돈을 좋아한다거나……. 같이 한번 들어 보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카드 부분은 어떻게 됐슴까?”
상담실에 들어갔을 때 강힘찬은 트럼프 카드를 발견했다. 미래시가 아니다에 한 표를 던진 강힘찬은 자신의 의견이 맞는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가져온 선물을 빌미로 숫자 맞추기를 제안했기에 호은은 그의 말을 따랐던 것이다.
“카드는 5였는데 한여울은 7이라고 말하더라고요.”
“역시 제 말이 맞았슴다! 한여울은 에스퍼가 아님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도인호는 노트북을 끌어다 녹화해 둔 영상을 틀었다.
“어쩌면 한여울은 숫자가 5인 걸 알았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인호의 말에 세 사람은 일제히 화면을 쳐다봤다. 입을 오므리는 한여울의 모습은 숫자 5, 6, 9중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말을 내뱉기 전 멈칫한 한여울은 입 모양을 바꾸고 7을 외쳤다.
“확실히 숫자 5라고 생각하고 입 모양을 보면 그렇게 보이긴 하네요.”
“아무 숫자나 말하려다 7로 정한 거 아님까? 제가 보기엔 우연 같슴다.”
영상 화면을 본 폴과 강힘찬은 각자 한마디씩 뱉었다.
“5인지 7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인호는 호은의 말간 얼굴을 바라봤다. 곧 저 입술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예상이 됐다.
“한여울을 조금 더 지켜보고 싶습니다. 에스퍼 의심자가 아니더라도 어른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는 맞는 거 같아요.”
“그건 에스퍼 의심자 기간 끝나고 나면 다른 기관에 연결하는 걸로 하죠.”
“네?”
단호한 폴의 말에 호은은 재차 물었다.
“그 문제는 저희랑 상관없는 거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전에 무슨 일이 생기면…….”
“하하.”
폴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상황실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호은 씨. 특별 관찰 대상자를 감시하고, 반정부도 잡아야 하는 게 이번 임무입니다.”
강힘찬은 폴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호은 씨가 하려는 행동. 팀에 폐를 끼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드시나요?”
호은은 입술이 점점 마르는 걸 느꼈다.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당연히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따라 줄 거라 믿었다.
그야 어린아이가 학대받는 거 같으면 어른으로서 관심을 주고 해결해 주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건 일반인에게만 해당하는 말이었나 보다.
이들은 에스퍼와 가이드다.
“직접 나서지 않아도 어차피 관찰 기간에는 지켜봐야 합니다. 제 말은 굳이 이 이상 할 필요 없다는 뜻이에요.”
폴의 입장도 이해가 갔다. 인사부는 바쁜 부서다. 에스퍼 의심자를 지켜보는 그들로서는 이런 일이 생겼을 때마다 직접 움직이는 건 어려운 게 당연하다.
거기다 에스퍼 의심자에게 정체를 들키면 안 되니 어쩔 수 없이 묵인하는 순간도 많을 것이다.
“맞슴다. 관찰 기간 끝나면 저희 쪽에서 사람 붙이도록 하겠슴다.”
강힘찬까지 거들자 호은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을 표한다.
폴과 강힘찬이 호은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을 때 도인호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참았다.
저 두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 오직 자신만이 호은의 생각을 눈치챘다. 대답하지 않은 건 의견에 따라서가 아니다. 숨긴 거뿐이지.
지금 눈만 하더라고 여전히 안광이 빛나고 있었다. 다. 포기한 사람의 눈이 저럴 순 없었다.
“……피식.”
그 사실을 자신만 눈치챘다는 것이 도인호는 미치도록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