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난 사실 현장직 가이드가 아니었어.”
호은이 떨어트린 목도를 주운 배연우가 가볍게 목도를 휘둘렀다.
“인턴 기간이 지나고 나서도 가이드가 된 걸 적응하지 못해서 사무실 쪽도 현장직도 버거웠거든.”
목도를 가볍게 휘두르고 있는 배연우의 자세는 깔끔했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다뤘던 사람처럼 말이다.
“그래서 가이딩 센터에서 일했어. 거긴 바빠서 다른 생각 할 틈이 없기도 했고, 에스퍼를 마주치더라도 아주 잠깐만 접촉하고 있으면 됐으니까.”
배연우의 목소리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무덤덤했다. 호은이 생각한 배연우는 에스퍼를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현장직 가이드로 처음부터 일했을 것만 같은 이미지였다.
젊어 보이는 외모에 일 처리는 차장을 달고 있는 호수보다 나아 보였고, 가끔 그가 말하는 내용을 짐작할 때 오랜 기간을 현장에서 보낸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약이라고 1년 정도 일하니까 괜찮아지더라?”
배연우는 천장을 쳐다보며 무언가 떠올리는 거 같았다.
“정신이 맑아지니까 뭔가 나를 변화시키고 싶었는지 생각 없이 현장직 가이드에 지원했지.”
눈썹이 모아진 배연우는 쓴 미소를 지었다.
“아. 이렇게 옛날얘기부터 할 생각은 없었는데.”
“……저, 대리님. 혹시라도 말씀하시기 힘드시면 안 하셔도.”
“괜찮아. 이미 옛날 일인걸.”
단호하게 말하는 배연우에 호은은 입을 도로 닫았다.
“에스퍼 중에 각인에 안달 난 놈들이 있어. 그놈들은 아직 사회생활을 덜 해 본 어리숙한 가이드만 노려. 그래야 각인할 확률이 올라가거든.”
“각인?”
“그래. 각인한 에스퍼는 가이딩이 안정되고 또 자기보다 등급이 높은 가이드와 각인하면 자신의 이능력 등급도 올라가.”
아직 각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호은이기에 어느덧 이야기에 집중해 버렸다.
“가이드한테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각인을 강요하는 에스퍼중 보통은 그런 짓 벌이다가 개망신 당해서 알아서 매장이 되는데.”
위에서 아래로 내리친 목도가 배연우가 낸 공기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반으로 부러졌다.
“반대로 가이드 쪽한테 개망신 줘서 매장시키는 경우도 있거든.”
정확하게 반으로 부러진 목도를 보며 호은은 느리게 침을 삼켰다.
“그게 인사부의 엄성찬이다.”
“엄성찬 팀장님이요?”
어금니를 가는 듯한 소리를 낸 배연우는 분노를 참는 듯했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가문 대대로 에스퍼가 각성하는 집안이 있는데 그게 엄성찬네 집안이야.”
“집안이요?”
“지금 4대째 에스퍼를 배출했거든.”
손칼국수 맛집도 아니고 에스퍼 4대라니. 호은의 얼빠진 얼굴을 본 배연우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래. 4대째 에스퍼가 나온 가문이니까 이능력자 협회에서 위치도 높고 실력 쥐뿔도 없는 놈이 핏줄 하나로 인사부에 들어온 거야.”
인사부는 가이드와 에스퍼를 처음 인도하는 부서인 만큼 엘리트 집단이 모여 있단 느낌을 받았다. 딱 한 사람. 엄성찬을 제외하고 말이다.
“엄성찬은 사실상 C급 에스퍼. 뭐 그렇다 치더라도 팀장 진급에는 등급이 중요하지 않지만. 인사부는 가이드도 에스퍼도 B급 이상으로 구성된 부서야.”
“어쩐지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엄성찬이 이능력을 보여준 적은 없지만, 그의 행동이나 말투는 열등감으로 가득했다. 호은은 쓸데없이 커다란 목청으로 비속어를 섞어 쓰던 언행과 폭력적인 몸짓을 떠올렸다.
“등급이 낮은 엄성찬은 등급 높은 신입 가이드 하나 꼬셔서 각인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되니까 더러운 소문을 내더라고.”
서울 본사에 갔을 때 저기압이었던 배연우를 생각하며 호은은 대화를 마저 들었다.
“뭐 너는 등급 낮긴 해도 어쨌거나 신입 가이드이긴 하니까. 그 녀석이 집적거릴 수도 있으니 조심하란 소리다.”
일부러 긴장감을 조성하고 꺼낸 말치고는 껍데기뿐인 내용이었다. 마치 하려던 말을 숨긴 것처럼 말이다.
호은은 숨겨진 내용이 궁금했으나 배연우가 말해 주고 싶은 부분이 여기까지라면 일단은 이걸로 만족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목도 연습 끝나면 단도 가자.”
호은의 반응을 천천히 살펴보던 배연우는 새로운 목도를 건넸다.
***
녹초가 된 몸으로 숙소로 돌아간 호은은 씻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 날이 쌀쌀해질수록 반신욕 하는 게 취미가 될 것만 같았다. 반쯤 쓰러지듯 누운 호은은 김 서린 욕실 천장을 보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배연우가 한말을 떠올리던 호은은 뭔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 안으로 들어가 입으로 바람을 불자 부글부글 거품이 올라온다.
“아!”
호은은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결국 대리님이랑 엄성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못 들었잖아.”
뜨거운 탕에서 밖으로 나오자 찬 공기가 몸을 스쳐 지나가 소름이 돋았다. 호은은 수건을 몸에 두르며 배연우가 조각낸 퍼즐을 하나씩 맞춰 봤으나 여전히 퍼즐보다 여백이 많았다.
아이스크림 집에 맛보기 스푼이라도 먹은 듯 배연우의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그러나 이 이상을 알려고 하는 건 오지랖이라는 것을 알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중반인 수요일 아침이 밝아 왔다. 도인호와 호은은 어제와 다른 장소의 가게로 갔다.
밖에서 보기에는 평범한 치킨집으로 보였으나 가게 내부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오늘 상황실은 여기인가요?”
호은은 빈 테이블을 둘러보자 폴이 가볍게 고갯짓했다.
“음료 좀 드실래요?”
업소용 냉장고 옆에 있던 폴이 자연스럽게 탄산음료와 얼음 잔을 꺼냈다. 이번에도 가게 전체를 빌린 건지 자연스럽게 단체석 테이블에 노트북을 세팅하고 있었다.
도인호는 들고 있던 커다란 박스를 테이블에 올려 뒀다. 상자의 내용물을 본 강힘찬은 인형 탈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 어제 배연우 대리님이 말씀하신 게 이건가 보네요.”
폴은 배연우에게 설명을 들은 건지 인형 탈을 꺼냈다. 흰색과 갈색 점박이인 강아지 탈을 손바닥으로 여러 번 쓸더니 털 촉감이 제법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저랑 잘 어울리는 느낌입니다.”
강아지 탈을 집어 든 폴의 박스에는 이제 토끼 인형 탈만 남아 있었다.
어린아이의 관심을 받기 위해 그 나이대 가장 좋아하는 동물로 가져온 탈을 마주하자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배연우 대리님께 들었겠지만 상담사 역할 한 명과 나머지 두 분은 탈을 쓰고 보조 역할로 들어갈 겁니다.”
어젯밤 호은이 숙소에 들어갔을 때 도인호는 그보다 더 늦은 시간에 들어왔다. 이능력품을 만드는 것 외에도 뭔가를 하고 온 건지 박스의 내용물은 도인호가 들고 온 것이다.
“이거라면 얼굴이 아예 보이지 않으니까 호은 씨도 안심이네요.”
폴은 토끼 탈 인형을 호은에게 건넸다. 호은은 커다란 토끼 탈을 품에 안은 채 자리에 앉았다.
“이번 작전은 홍보부에서 의견 냈습니다. 아동 심리 상담 센터로 위장해 상담사 한 명과 인형 탈을 쓴 두 명이 상담실에 들어갈 겁니다.”
폴은 자연스럽게 회의를 진행했다.
“인원 구성은 에스퍼 한 명과 가이드 두 명이 상담실, 남은 에스퍼 한 명은 상황실에 있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조용히 듣던 도인호가 폴의 앞에 놓인 인형 탈을 집어 드는 순간이었다.
“도인호 씨가 상황실에 계시죠.”
“?”
“그야 상담실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제 이능력이 빠져나오기 좋으니까요.”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의 폴은 악의 없는 말투로 이유를 설명했다.
“거기다 화염의 이능력은 위험합니다. 저라면 반정부가 나왔을 때 도망치겠지만, 도인호 씨라면 거기서 싸우셔야 하잖아요? 그럼 어린아이들이 다칠 겁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는 폴은 꼭 책을 읽어주는 사람처럼 듣기 편안했다. 그러나 도인호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홍보부는 반정부 잡으러 온 겁니다.”
인형 탈을 잡은 도인호가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도망이 아니라 싸워야 하는 게 저희 임무입니다.”
이번에는 폴이 도인호 손에서 인형 탈을 채갔다.
“그러다 일반인이 다친다고 해도요?”
폴의 말이 끝나자마자 도인호는 다시 한번 인형 탈을 채가며 대답했다.
“반정부만 때려잡는 선택지도 있습니다.”
-쓱, 쓱
왼쪽 오른쪽. 강아지 인형 탈이 테이블 위로 바쁘게 움직였다.
호은은 손을 든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서로 장난감 갖고 싶다고 싸우는 애들도 아니고 왼쪽 귀와 오른쪽 귀가 나란히 잡힌 강아지 인형 탈이 불쌍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저 둘 왜 저러는 검까?”
“그러게요.”
강힘찬과 호은은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게임이라도 해서 이긴 사람이 참여하는 걸로 할까요?”
“호은 씨. 이런 중대한 문제를 게임으로 할 순…….”
“좋은 생각입니다.”
인형 탈을 자기 쪽으로 확 끌어당긴 도인호는 호은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폴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 안 그래도 저 동전 있슴다. 동전 뒤집기 해서 앞면 나오면 도인호 에스퍼가, 뒷면 나오면 폴 에스퍼가 가는 거 어떻슴까?”
“좋네요.”
편법 없이 정정당당한 승부가 가능한 게임에 폴은 승낙했다.
“그러면 이건 제가 가지고 있을게요.”
호은이 손을 내밀자 도인호의 얼굴에 긴장감이 스쳤다. 강아지 인형 탈을 넘긴 도인호는 어딘가 비장한 모습이었다.
“자 그러면 던지겠슴다!”
동전을 손안에 넣어 흔들던 강힘찬이 동전을 던졌다.
탁.
손등에 동전이 떨어지는 순간, 에스퍼의 동체시력으로도 보지 못하게 빠르게 손을 덮은 강힘찬은 MC라도 된 것처럼 멘트를 길게 내뱉으며 시간을 끌었다.
“자. 결과는 제 손안에 있슴다. 놀랍게도 도인호 에스퍼! 그리고 폴 에스퍼! 둘 중 한 사람이 이기게 됩니다. 그럼 60초 광고 뒤에!”
“강힘찬 가이드? 장난치실 때가 아니지 않을까요?”
눈웃음을 짓고 있는 폴의 얼굴에 살기가 묻어나왔다. 사르르 접힌 눈웃음에서 실눈으로 바뀌자 강힘찬은 서둘러 손바닥을 뗐다.
“……!”
“…….”
호은은 강아지 인형 탈을 들어 폴에게 건네줬다.
“다음 기회에는 도인호 에스퍼 시켜 드릴게요.”
폴은 상쾌한 얼굴로 활짝 웃었고 도인호는 분하다는 듯 주먹을 쥐었다.
***
“안녕하세요. 아동 심리 상담 센터 강지안 실장입니다.”
강힘찬의 말투는 어제도 그렇고 변장한 모습에 따라 달라졌다. 사람의 말을 잘 들어 주고 선할 것만 같은 상담 실장의 목소리를 흉내 낸 강지안은 교사들과 인사를 끝내고 본론을 꺼냈다.
“저희가 이번에 소망초등학교 3학년 대상으로 상담을 진행한다는 건 들으셨죠?”
“네. 어제 전화받았습니다.”
“아무래도 학생들이 많아서 다 봐줄 수는 없고 이혼 가정 아이나, 특수한 환경의 아이 위주로 상담을 받아도 괜찮을까요?”
반지르르한 얼굴을 들이밀며 강지안이 눈웃음을 치자 교사는 얼굴을 붉혔다.
“네! 물론이죠. 우선 상담실로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저 두 분은…….”
교사의 시선이 인형 탈을 쓰고 있는 폴과 권호은에게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