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호은의 말에 강힘찬은 이해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제가 한 말 못 들었슴까? 그냥 단순한 우연일 수도!”
“이능력 의심자이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에요.”
강힘찬이 말하는 걸 중간에 끊은 호은은 괴로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
“아동 학대가 의심되어서 그런 겁니다.”
생각지도 못한 호은의 말에 강힘찬은 당황했다. 지난 4주 동안 한여울 주변 CCTV를 관찰했을 때 그런 정황은 보이지 않았다. 강힘찬은 평소의 성질대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려다가 폴에게 제지당했다.
“한여울은 또래보다 집에서 지원해 주는 것이 많습니다. 혹시 모를 상황에 저희도 유심히 지켜봤으나, 외적으로 다친 적도 없는데 증거라도 있는 겁니까?”
“특별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지만…….”
한여울의 옷소매가 지저분한 건 밥 먹다 묻은 음식일 수도 있다. 신발이 바랜 건 한여울이 그 운동화를 좋아했기에 자주 신어서 그런 거일 수도 있다.
호은은 자신이 본 것만으로는 아동 학대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직접 얘기해 보고 싶어요.”
“흥. 이 알약은 못 드림다.”
강힘찬은 도와줄 생각이 없다는 듯 알약 통을 품에 숨겼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도인호가 입을 열었다.
“알약이 아닌 다른 방법을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그러면 괜찮습니까?”
도인호까지 나서자 강힘찬은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서 위반되는 건 아니니까 당연히 괜찮습니다.”
폴의 말에 호은은 한시름 놓았다. 대화가 끝난 네 사람은 현장 보고서를 만들었다. 한여울이 돈을 받고 시험 문제를 알려 주는 것과 그녀의 부모님이 실직자가 된 상태라는 것을 정리하면 현장팀의 업무는 끝이었다. 이후 관찰 일은 사무실에서 한여울 주변을 CCTV로 감시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관련 업무 이슈 생기면 내일 다시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노트북 화면을 닫은 폴은 뻐근한 목을 풀었다.
“차는 어디다 주차하셨나요?”
“카페 앞쪽에 있어요.”
호은과 도인호가 타고 온 자동차에 탄 폴은 순간 이동을 써서 두 사람을 인천 지사로 데려다줬다. 차에서 내린 폴과 강힘찬은 내일 보자며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아까 왜 내 편 들어 준 거야?”
폴과 강힘찬이 사라지고 나자 호은은 기다렸다는 듯 궁금한 걸 물어봤다.
한여울을 직접 만나고 싶다고 말했을 때 호은은 어떤 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야 할지 머뭇거렸다.
이번 현장은 무작정 떼만 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도인호처럼 변장 도구를 준비해야 했고, 인사부처럼 한여울 공간에 자연스럽게 침입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호은은 어떻게 해야 할지 그 어느 것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변장 도구는 인터넷에서 구매하면 되는 건가? 한여울이 집에 가는 찰나에 말을 걸어야 하나?
현장 경험과 더불어 누군가를 관찰하는 업무가 처음인 호은에게는 모든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도인호가 자신의 편에 서서 방법을 찾겠다고 했을 때 의지가 되면서도 평소 일을 크게 벌이는 걸 싫어하는 녀석이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의문이었다.
“믿으니까요.”
“어?”
“제가 봐 온 권호은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그 누구보다 잘 압니다.”
“…….”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무작정 편이 되어주겠다고 말하려는 걸까 싶었는데 그런 게 아니라…….
“그래서 형의 선택을 믿습니다.”
호은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얼굴이 못생기게 변할 것만 같았다.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 내뱉은 호은은 따끔거리는 목구멍에 억지로 침을 삼켰다.
“고마워.”
더 멋진 말이 있을 텐데 호은이 내뱉은 말은 고작 이게 다였다.
“회의실로 복귀할까요.”
“그러자.”
오전에는 없던 코스모스가 화단에 심겨 있었다. 색색의 코스모스가 바람에 따라 흔들려 마치 춤추는 듯 보였다.
호은은 조심스럽게 도인호의 손을 잡았다.
***
홍보부는 현장이 끝나면 회의실로 모이기로 했다. 남운수와 배연우는 먼저 와서 회의라도 했는지 많은 자료로 인해 책상이 어지러운 상태였다.
“왔냐.”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배연우가 얼굴도 못 들고 손바닥만 흔들었다.
빈자리에 앉은 호은은 책상에 놓인 종이를 하나둘 집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쪽은 어때. 뭐 건진 거 있어?”
질문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호은은 곧바로 대답했다.
“한여울 소문 중에 미래를 점쳐 준다는 게 있었는데 오늘 확인해 보니 시험 문제를 알려 주는 거였습니다.”
“열 살 아니었나.”
“그것도 돈을 받으면서요.”
“에스퍼 의심자랑 상관없이 흥미롭네.”
수첩에 뭔가 끄적이던 배연우는 다 적었는지 고개를 들었다가 사례 걸린 사람처럼 웃음을 토했다.
“푸하하하. 뭐야!”
“네?”
“너 그거 변장이냐? 으하하 이리 와 봐. 사진 찍자.”
호은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배연우의 옆으로 갔다. 핸드폰을 들이미는 행동에 어쩔 수 없이 브이자 포즈를 취하며 셀카 모드인 화면을 보자 멀쩡한 배연우와 그 옆에는 눈이 콩알만 한 호은이 있었다.
“대, 대단한 변장이네요…….”
남운수가 조용히 엄지를 들었다.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배연우는 만족스러운 듯 호은의 안경을 벗겨 자신이 써 보고 다시 셀카를 찍었다.
“안 그래도 오늘 일 안 풀려서 웃을 일이 없었는데. 잘했다, 권호은.”
“못생긴 거로 칭찬받으니 기분이 이상한데요…….”
회의실 아래에 놓고 갔던 보조 가방을 꺼내 호은은 배연우에게 돌려받은 안경과 가발을 벗어 차곡차곡 넣었다.
“대리님 쪽은 잘 안 풀리신 건가요?”
배연우는 기다렸다는 듯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었다.
“관찰을 제대로 하지 못했어. 완전 허탕이다.”
“네?”
“그 녀석이 갑자기 이상한 가게에 들어가서 따라갔더니만 회원제인지 뭔지 해서 아는 사람만 입장할 수 있는 거 같더라고.”
호은은 그제야 서류를 훑어봤다. 마약 유통에 관련된 내용과 박기현과 안면이 있는 사람들을 추려 놓은 내용이 정리되어 있었다.
“마약을 하는 건가요?”
“추정 중이긴 한데. 이능력인지 마약인지 구별이 안 된단 말이지. 그래서 아마 우리 중 한 명이 고객으로 들어가야 할 거 같아서 루트를 짜고 있어.”
호은은 깡패 소굴로 들어가야만 박기현을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에 슬쩍 남운수를 쳐다봤다.
‘마약 손님으로 간다면 조금 어울릴지도 모르겠네.’
“뭐 덕분에. 박기현 쪽은 반정부도 지금 당장 움직이기는 어려울 거 같고. 한여울은?”
“여기도 반정부는 딱히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도인호는 한 박자 쉬고 말을 이었다.
“한여울과 직접 접촉해 보려고 합니다.”
눈썹을 위아래로 까딱인 배연우는 도인호를 쳐다봤다.
한여울의 현장은 두 사람이 참여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아는 듯한 모습이었다.
반정부에게 들키지 않게 변장만 하면 될 텐데 굳이 한여울에게 직접 접촉까지 한다니.
호은이 말했으면 한 소리 하려고 했으나 대상이 도인호였기에 배연우는 더 들어 보기로 했다.
“이유는?”
“아동 학대 의심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누구 의견인지 알겠네.”
배연우는 곧바로 호은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하. 시험 문제 팔아다 돈 받는 것도 이상하고. 뭔가 신경이 쓰여서요.”
“현장에 잠입할 방법은 찾았고? 걔 초등학생이잖아. 어디서 접근하게?”
“안 그래도 인사부는 이능력품 사용해서 같은 학원 학생으로 접근하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 이능력품은 너무 비싸서. 성인의 모습으로도 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뭐? 비싸?”
호은의 말을 듣던 배연우는 좁혔던 눈을 제대로 떴다.
“그 알약 같은 건데 한 알당 육천오백만 원이라 했나…….”
“하 참나. 우리도 지원금 내려오는데. 감히 홍보부한테 돈으로 잘난 척을 했어?! 그것보다 더 좋은 거 사 줄게. 그래서 이능력품 이름이 뭔데.”
호은을 잡아먹을 듯 몰아붙이는 배연우의 눈은 뜨거운 용암처럼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자리에서 반쯤 일어난 배연우를 앉히며 호은은 자신이 말실수를 한 건 아닌가 싶었다.
“현장 다니면서 쓰는 돈은 지원금으로 처리하면 되니까. 영수증 사진이나 문자 내역 결재 올리고 부담 없이 사용해.”
“네…….”
인사부만 나오면 급발진 하는 배연우를 본 호은이 이마에 흘린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잠깐만 돈이라……. 뭐야! 한여울을 볼 아주 쉬운 방법이 있잖아. 걱정하지 마라, 호은아. 내가 내일 한여울 볼 수 있게 해 줄게.”
한 소리 하려고 했던 배연우는 어디로 간 건지. 인사부의 코를 납작 눌러준다며 음흉한 미소를 지은 배연우는 어디론가 급하게 전화를 걸러 나갔다.
“무슨 짓을 하시려는 걸까요.”
불안한 듯 호은이 중얼거리자 남운수가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초, 초등학교니까, 자, 장학금을 주고 교내 행사 가, 같은 걸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럴싸한 남운수의 의견은 전화를 끝낸 배연우를 통해 정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동 심리 상담 센터로 장학금 주는 대신에 학생들 몇 명 상담해 주고 싶다고 말했어. 이거면 한여울 직접 볼 수 있겠지.”
“네! 감사합니다.”
도인호는 기뻐하는 호은의 뒤통수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회의의 화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한여울과 박기현 현장에서 특별한 일이 있었는지, 반정부의 다른 이슈가 있었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끝날 기미가 보였다.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무리하고. 권호은 너는 몸 좀 풀다 가지?”
“넵 알겠습니다.”
저녁 시간에 가까워지자 배가 고픈 호은이었지만 배연우가 해 준 것도 있으니 거절하기 어려웠다.
“인호야, 너 오늘도 그거 제작하러 가?”
“네. 두 시간 정도 하다 들어올 거 같습니다.”
이능력품에 이능력을 주입해야 하는 도인호를 보내 주며 호은은 배연우를 따라 훈련실로 갔다.
“이능력품 뭐로 만들어 준다냐?”
“아직 거기까지는 안 물어봤어요.”
“그걸 알아야지 최대한 비슷한 무기로 연습할 텐데.”
배연우는 목도를 건넸다.
“화염 이능력자는 보통 불을 휘감은 이능력 검을 많이 만드니까. 일단 검술을 연습할까.”
“좋습니다.”
몸을 푼 호은은 배연우에게 받은 목도를 위아래로 내리찍었다. 단순한 동작임에도 숨이 쉽게 흐트러졌다.
검도는 섬세함이 필요하다. 힘을 주는 방법부터 손목을 트는 동작 하나하나 집중하지 않으면 금방 허점이 생겨 제압당하기 쉬웠다.
배연우는 기다란 막대로 호은의 몸을 쿡쿡 찌르며 가르쳤다.
“너 오늘 생각이 많다.”
놓쳐 버린 목도가 바닥에 떨어진 걸 보는 호은의 턱 끝으로 땀방울이 맺혔다.
“생각…… 없습니다.”
입술이 마르는지 연신 혀로 핥은 호은이 배연우를 흘긋 쳐다봤다.
사실 홍보부 회의실로 들어오는 내내 박기현 현장에서 배연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나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 난 또 인시부랑 나랑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볼 줄 알았네.”
“물어봐도 되는 걸까요?”
배연우가 던진 싸구려 미끼를 물어 버린 호은은 너무 빨리 대답해 아차 싶었다.
“생각 없다고 한 거 아닌가.”
“새, 생각은 없지만, 관심은 많습니다…….”
“참나. 뭐 내가 티를 많이 내기도 했으니까.”
배연우는 훈련장 창문 너머를 봤다. 어둠이 모든 것을 덮은 밤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