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호은은 세 사람의 사진을 손으로 훑었다.
“에스퍼 의심자가 아니면 좋겠다.”
학원이 있는 건물로 들어가는 폴과 강힘찬이 화면을 통해 비쳤다.
“드디어 정착할 수 있는 가족이 생긴 건데…….”
호은의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도인호는 무심한 시선으로 한여울의 사진을 쳐다봤다.
학원 강의실 안으로 들어간 강힘찬과 폴의 앞자리는 비어 있었다. 잠시 후 학원 차를 타고 도착한 아이들이 강의실에 차례대로 앉기 시작했다.
학원 소음과 동시에 헤드셋을 통해 강힘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울아 안녕?”
맨투맨 티셔츠와 검은색 스키니를 입은 한여울이 자리에 앉자 강힘찬은 연필로 한여울의 등을 콕콕 찌르며 인사했다.
한여울은 강힘찬을 흘긋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호은은 혹시라도 강힘찬이 이상한 말투를 여기서까지 쓸까 걱정했으나 어린아이 말투라도 배워 왔는지 다행히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울아. 너 영어 숙제했어?”
가볍게 무시당한 강힘찬과 반대로 폴은 영어 교재를 내밀며 한여울에게 말을 걸었다. 마치 텔레비전을 보듯 감상하던 호은은 나이스 질문이라 외쳤다.
“했어.”
한여울의 대답은 단답형이었다. 시니컬한 한여울의 모습은 열 살처럼 보이지 않았다.
“4주나 학원을 같이 다녔는데 안 친해 보이네.”
호은의 말에 도인호는 두 손으로 턱을 괴었다. 감흥 없는 눈길이 화면에 닿았다.
“벽이 있는 거 같습니다.”
“벽이라.”
도인호가 내뱉은 단어를 중얼거린 호은은 떠드는 아이들 사이에서 홀로 영단어를 외우고 있는 한여울을 지켜봤다. 그녀는 혼자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저렇게 어릴 때부터 열심히 공부할 이유가 있을까.”
호은은 한여울의 성적표를 봤다. 모든 과목이 백 점이었다. 잠시 후 화면에서 영어 강사가 들어와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이 시작하고 십 분 정도 흘렀다. 강힘찬의 카메라 화면이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졸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흔들리는 화면을 응시하고 있던 호은은 한여울 책상에 누군가 쪽지를 건넨 걸 확인했다.
한여울은 쪽지를 펼쳐서 읽고 곧바로 답장을 썼다. 강사가 칠판으로 뒤를 도는 순간 쪽지는 옆 분단의 아이에게 넘어갔다.
“폴 씨, 지금 쪽지 돌리고 있는 거 보셨어요?”
호은이 헤드셋에 있는 마이크로 말하자 노트북 화면에 쪽지창이 떴다. 확인했다고 쓰여 있는 쪽지창은 수업 중이라 말을 하지 못하는 폴이 보낸 것으로 보였다.
폴은 졸고 있는 강힘찬의 팔을 툭툭 건드리며 책 한쪽에다 뭐라 쓰기 시작했다. 아마도 수업이 끝나면 해당 쪽지를 찾아 확인해 보자고 말하는 거 같았다.
지루하던 수업이 마침내 끝나고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한여울과 쪽지를 주고받던 아이가 쓰레기통에 쪽지를 버리고 밖으로 나갔다. 폴은 쓰레기통에 손을 넣어 쪽지를 주웠다.
[네가 원하는 거 가져왔어
ㅇㅇ
소문은 사실 맞아?
못 믿겠으면 하지 마
아니야 믿을게!
쉬는 시간에 거기로 와
ㅇㅋ]
“소문이 사실이었던 걸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거기가 어딜까요.”
쪽지를 확인한 호은이 말하자 폴이 조용히 속삭였다. 쉬는 시간의 아이들은 화장실을 가거나 친구들과 떠드느라 소란스러웠다.
“한여울 따라가면 알게 될검다.”
자리에 앉아 있던 한여울이 시계를 한번 쳐다보더니 조용히 일어섰다. 나가는 한여울의 뒤를 두 사람이 몰래 따라나섰다.
학원 골목길 뒤에는 낮은 담장이 있었다. 주변에 따라오는 사람이 있나 없나 확인한 아이들은 쓰레기 더미에 숨겨진 벽돌 세 개를 쌓아 올리더니 담장을 넘었다.
멀리서 그것을 지켜보던 폴은 담장 위를 쳐다봤다. 건너편에 가로등이 있는 걸 발견한 폴은 강힘찬의 손을 잡고 순간 이동을 썼다.
가로등에 몸을 숨긴 두 사람은 한여울과 여자아이를 지켜봤다. 여자아이는 흰색 돈 봉투 같은 걸 한여울에게 건네고 있었다.
봉투를 확인한 한여울은 작은 손으로 봉투를 여러 번 접더니 주머니에 넣었다.
“내년에 영재학원 들어갈 건데. 예상 질문지를 네가 알고 있다고 해서.”
“이렇게 들어가 봤자 오래 버틸 수 있겠어? 나야 돈 받았으니 상관없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독설을 뱉은 한여울은 핸드폰을 들었다. 서로 핸드폰을 맞대고 있는 아이들에 폴이 본사로 무전을 쳤다.
“특별 관찰 대상 한여울 근처에 있는 CCTV 화면 공유 부탁드립니다.”
폴이 서 있는 가로등에는 CCTV가 달려 있었다. 정면으로는 핸드폰 화면이 보이지 않았지만, 가로등 위에서 본다면 보일 거 같기도 했다.
호은이 보고 있던 노트북 화면이 자연스럽게 분할되더니 새로운 화면이 떴다. 폴이 요청한 가로등에 달린 CCTV 화면이었다. 호은은 핸드폰 화면을 확대했다.
“문제집처럼 보이는데요?”
한여울이 보내고 있는 건 사진이었다.
“테스트 문제는 내가 보낸 거 위주로 나올 테니까 이것만 공부하면 될 거야.”
“믿어도 되는 거지?”
“그건 내년에 확인해 봐.”
긴장하며 봤던 장면은 학원 시험 문제 유출이었다. 물론 한여울이 보낸 것은 그녀가 직접 적은 거 같은 문제로 내년에 있는 시험의 예상 문제인지는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냥 똑똑해서 문제 알려 준 거 아님까?”
“미래를 봐서 실제 시험지에 나왔던 문제를 알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거래를 끝낸 두 아이가 담을 넘는 걸 보며 강힘찬과 폴이 한 마디씩 뱉었다.
“그런데 방금 돈 받은 거 아닌가요?”
호은이 의아한 목소리를 뱉었다. 한여울의 나이는 10살이다. 부모님이 주는 용돈으로도 충분히 생활이 가능한 나이였다.
그녀는 왜 문제를 알려 주는 대가로 돈을 받은 걸까.
“최근에 즉석 복권에 당첨됐으면 집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닐 겁니다.”
호은의 말을 뒷받침하듯 도인호도 한마디 거들며 중요한 사항을 확인했다.
“부모님 직장은 확인이 된 상태입니까.”
“기존에 찾았을 때 어머니는 병원 원무과에서 일하셨고 아버지는 택시 기사였습니다.”
“최근 거 요청해서 알아보겠슴다.”
곧 쉬는 시간이 끝나가기에 폴은 다시 강힘찬의 손을 잡고 학원으로 순간 이동했다.
강의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 한여울은 돈을 숨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다.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호은은 수업이 마무리될 때쯤 입을 열었다.
“한 분이 한여울에게 방금 일 봤다고 말해 보는 게 어떨까요.”
호은의 말에 강힘찬이 카메라에 보이게끔 손으로 오케이 모양을 만들었다. 두 시간의 수업이 끝나고 한여울은 영어 학원에서 독서 토론 학원에 가기 전까지 이십 분의 여유가 있었다.
강힘찬은 자리를 빠져나가려는 한여울의 가방을 잡아당겼다.
“뭐야?”
“할 말 있어.”
“난 너랑 할 말 없는데?”
“그래? 그럼 원장 쌤한테 말해야겠다.”
“?”
“나 편의점 가다가 봤거든. 너랑 쟤.”
강힘찬이 미련 없이 뒤를 돌자 이번에는 한여울이 강힘찬의 가방을 잡았다.
“따라와.”
옥상으로 가는 계단은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지 먼지가 쌓여 있었다.
음산한 분위기 때문에 초등학생인 어린아이가 올 만한 장소는 아니었으나 한여울은 굳이 이곳을 선택했다.
“그래서 뭘 봤는데?”
“너. 시험 문제 알려 줬지? 나도 알려 줘.”
“뭔 소리야. 내가 시험 문제를 어떻게 알아?”
“그으래? 그럼 너 주머니 봐봐. 돈 받고 문제 알려 준 거 아니야?”
무표정을 짓고 있던 한여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런 거 아니거든.”
“나도 줄게.”
강힘찬의 말에 한여울은 구겼던 얼굴을 폈다.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강힘찬을 훑어보더니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
“너희 집 어디인데.”
“여기 근처에 살아.”
“XX 캐슬?”
강힘찬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임대는 아니고?”
“뭐?”
점점 어린아이가 말할 만한 주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옷 보면 잘사는 애 같긴 하네.”
한여울은 팔짱을 꼈다. 화면상으로 봤을 때 당황하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그녀는 이제 우위를 선점한 거 같은 태도를 취했다.
“그래, 그래서 무슨 시험 문제가 알고 싶은데?”
“뭐? 그, 뭐냐. 나도 영재 학원 붙고 싶거든.”
“들어갈 인원수 정해져 있어서 너는 안 될 텐데.”
“뭐야? 돈 줘도 안 된다고?”
“알려는 줄 수 있지만 네가 붙을지는 장담 못 한다는 소리야.”
도도한 한여울의 말에 강힘찬은 볼을 긁적였다.
“상관없으니까. 알려 줘.”
“그래. 돈 준비하면 보내 줄게.”
“돈은 얼마나 가져오면 돼?”
강힘찬의 말에 한여울은 세 손가락을 폈다.
“삼만 원?”
“장난하니? 삼백이지.”
“열 살이 삼백만 원을 어떻게 구해.”
“너 비싼 집에서 살잖아. 엄마한테 달라 해.”
할 말을 끝낸 건지 한여울은 입에 지퍼 모양을 만든 채 강힘찬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특별히 싸게 해 주는 거니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열 살 어린아이의 카리스마는 결코 무시할 게 못 됐다. 강힘찬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여울은 뒤도 안 돌아보고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강의실에 대기하고 있던 폴은 기가 빠진 듯 터덜터덜 걸어오는 강힘찬을 데리고 상황실로 복귀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돌아온 두 사람은 옷부터 갈아입으러 갔다. 약 효과는 두 시간 정도가 다인지 둘 다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확실함다. 한여울은 에스퍼 아님다. 그냥 공부 잘하는 걸로 돈 뜯어내는 조폭 마누라 같은 검다!”
어린아이에게 무시당한 강힘찬은 바보 취급당한 게 분했는지 거친 콧바람을 내뿜고 있었다.
“확실히 예상 문제라는 건 누구나 만들 수 있긴 하죠.”
폴은 녹화된 영상을 돌려보며 말했다.
“기존에 출시된 문제를 변형해 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확인은 내년에 가능하니 지금 들킬 일은 없으니까요.”
“한여울은 일반인임다. 전생에 나라라도 구해서 복권에 당첨된 것뿐이지 소문도 다 헛소문임다!”
가만히 듣고 있던 호은은 이상하다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돈을 받고 시험 문제를 알려 주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요? 중고등학생도 아니고 초등학생인데.”
“옆 동네가 대치동인 걸 보면 여기도 학구열이 높아서 가능성은 있습니다만.”
호은의 말에 대답한 폴은 말을 하다 중간에 핸드폰을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방금 강힘찬 씨가 부탁한 건 알아보셨나요?”
내용을 듣던 폴의 동공이 커졌다.
“일단 알겠습니다.”
폴은 전화를 끊고 당황한 눈길로 호은을 바라봤다.
“한여울 부모 두 분 다 두 달 전에 퇴사했다고 합니다.”
“복권 당첨된 것도 두 달 전이니 사업이라도 하려고 관둔 거 아니겠슴까?”
호은은 화면 속 한여울의 모습을 되짚었다. 입고 있던 맨투맨의 소매 부분은 지워지지 않은 음식 자국이 선명했다.
기장이 짧아 보이던 스키니진과 누렇게 바랜 흰색 운동화. 눈여겨보지 않은 사람은 한여울이 그런 차림새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
시험을 알려 주는 대가로 돈을 받고, 친구가 사는 아파트를 통해 잘 사는지 구별한다. 호은은 자신이 생각이 틀리길 바라며 입을 열었다.
“한여울을 직접 만나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