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좋아 결정했다.”
노트북을 닫은 호은이 사뭇 진지한 표정과 힘을 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대신 복수해 주자. 에스퍼 의심자 이능력 쓰는 것도 보고! 반정부 나타나면 잡고!”
“…….”
“인사부보다 홍보부가 더 뛰어나다는 걸 보여 주는 거야!”
도인호는 결의에 찬 호은을 보며 자신이 배연우의 계략에 걸려든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꼭 보여 줄 필요가 있지는…….”
호은은 이미 열정에 불타올라 도인호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은 도인호는 집에서부터 가져왔던 보조 가방을 꺼냈다.
“일단 이걸로 갈아입죠.”
열린 보조 가방에서는 가발과 안경이 나왔다. 정장을 입은 상태로 모자와 마스크를 쓰는 건 이상할 거 같았기에 미리 주문했던 것이었다.
“확실히 갈색 머리는 눈에 좀 튀겠지?”
호은은 군말 없이 가발을 받았다. 검은색 더벅머리와 눈이 작아 보이는 안경까지 쓰고 나니 도인호를 제외한 누구도 호은을 몰라볼 거 같았다.
“인사부도 우리 못 알아보면 어떡하지.”
거울로 자기 모습을 확인한 호은이 어색한 듯 검은 인조 모발을 만지작거렸다. 의외로 실제 머리카락과 비슷한 머릿결에 자꾸만 손이 갔다.
호은은 거울에 같이 비치는 도인호를 쳐다봤다. 목덜미를 깨끗하게 드러내던 평소 도인호의 머리와 다르게 기장이 길었다. 자신과 다른 디자인의 뿔테 안경을 쓴 도인호는 사나운 눈매를 가렸다.
“그래도 잘생긴 건 가려지지 않는구나.”
단번에 못생겨진 자신과 다르게 도인호는 여전히 잘생겨 보였다.
“?”
“아니. 이런 건 언제 준비했나 싶어서.”
거울로 시선이 마주친 호은은 얼버무리며 고개를 돌렸다. 도인호는 보조 가방을 잠그며 말했다.
“지난주 토요일에 한 번…….”
“아. 남운수 팀장님이랑 외근 나갔을 때?”
“네.”
“둘 중에 누구 현장에 간 거야?”
“박기현 쪽이었습니다.”
도인호의 대답에 호은은 박기현의 프로필을 훑어봤다. 겉모습으로 상대방을 판단하면 안 되지만 찍힌 사진으로만 봤을 땐 피부에 보이는 문신이나 걸음걸이가 그를 불량한 사람이라 말하는 듯했다.
“이쪽 변장은 비교적 쉬웠습니다. 주변 인물들이 다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어서.”
호은은 껄렁한 옷을 입고 있는 도인호를 상상했다. 단추를 서너 개 정도 풀어놓고 셔츠도 팔꿈치까지 접는 거다. 왼쪽 팔을 휘감고 있는 이무기는 그림인 걸 알면서도 눈을 마주치기 어렵다.
거기다 시원하게 깐 앞머리를 고정하는 새까만 선글라스…….
“혹시 사진 있어?”
무슨 상상을 한 건지 양 뺨을 발갛게 물들인 호은이 넌지시 물었다.
도인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렇구나.”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은 호은이 아쉬움을 달래며 도인호의 뿔테 안경을 손으로 살살 만졌다.
준비를 끝낸 두 사람은 먼저 현장에 도착한 인사부가 보낸 주소로 이동했다.
***
한여울이 다니는 초등학교를 벗어난 골목길에 만들어진 카페는 클래식 재즈 음악이 틀어져 있었다.
조명 밝기가 어두운 편인 카페 내부는 한낮인 밖의 모습을 가늠치 못하게끔 커튼이 쳐져 있었다.
널따란 홀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자 룸 형식의 방이 있었다.
“누구심까.”
호은이 안으로 들어가자 강힘찬이 처음 보는 사람을 봤다는 듯 경계했다.
“저 권호은입니다.”
호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 강힘찬은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호은이 쓴 안경을 벗겼다.
“?!!!”
굳어 버린 강힘찬이 들고 있는 안경을 뺏은 도인호는 다시 호은의 얼굴에 안경을 씌워 줬다.
“안경이 어떻게 된 검까? 눈이 세 배는 작아졌슴다!”
“힘찬 씨 일단 앉아 보세요.”
옆에 있던 폴이 의자를 두드리며 강힘찬을 도로 앉혔다.
“놀라신 걸 보니 변장이 잘 된 거 같네요.”
배시시 미소를 지은 호은이 반대편에 앉았다. 모두 앉은 걸 확인한 도인호는 들고 있던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인사부는 변장 안 하시나요?”
호은은 어제와 같은 모습의 폴과 강힘찬을 보며 질문했다.
“저희는 이것만 먹으면 됩니다.”
폴은 테이블 위로 흰색 알약이 든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한여울 의심자는 초등학생이다 보니까 성인의 모습으로 다가가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거 같더라고요.”
“그러면 이건?”
“초등학생 모습으로 만들어 주는 알약입니다.”
호은은 유리병을 들어 흔들어 봤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알약은 아무리 봐도 평범했다.
“이걸 먹고 나면 몇 시간 동안 어린아이의 모습을 유지해 줌다.”
“제작하느라 고생 좀 했어요. 복용하는 사람에 따라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 해서 검사까지 진행하고 받아 왔거든요.”
“맞슴다! 거기다 알약 한 개가 육천오백만 원 임다.”
금액을 알게 된 호은은 들고 있던 유리병을 조심스럽게 테이블에 놓았다.
“여러분도 드시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맞춤 제작이다 보니까 따로 주문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폴의 말에 호은은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비싼 걸 제작하고 싶지 않았다.
“자 그럼 학교 끝나기 전까지 작전을 짜 볼까요.”
폴은 이곳에 온 이유를 상기시키듯 손뼉을 쳤다.
“일단 한여울 스케줄은 저희가 보내 드렸는데 받으셨나요?”
“네. 받았습니다.”
폴은 스케줄표를 보여 주며 하교 후 일정을 가리켰다.
“화요일은 영어 학원에 가는 날입니다. 저랑 강힘찬 씨는 영어 학원에 다니는 학생으로 잠입 중입니다.”
“밀린 사무 업무도 많은데 화요일마다 영어 학원까지 다니니 죽겠슴다.”
앓는 소리를 낸 강힘찬은 에이드를 쭉 들이켰다.
“관찰이라는 게 멀리서 하는 게 아니라 생각보다 더 가깝게 다가가네요?”
호은은 같은 학원에서 수업을 듣는 두 사람을 떠올렸다.
“눈에 보이는 이능력은 멀리서 관찰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예민한 계열의 이능력은 보통 지인으로 접근해야지 볼 확률이 높습니다.”
“맞슴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관찰하는 경우는 발현 예정일이 5년에서 한 달 정도 남았을 때 투입되는 경우임다.”
“5년이면 5살 때부터라는 소리네요?”
권호은의 날카로운 질문에 폴은 서류 뭉치를 호은에게 건넸다.
“한여울이 2차 발현을 한 건 5살이 되는 해였습니다. 너무 어리기도 했고 저희 쪽에게서는 에스퍼 의심자인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었는데 아이가 이상한 말을 한다는 소리가 있더라고요.”
호은은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마치 이력서처럼 한여울이 태어난 해부터 큼지막한 사건이 적혀 있는 서류였는데, 파양과 입양이 여러 번 반복된 게 눈에 들어왔다.
“고아였네요.”
“맞습니다. 처음 입양을 보낸 집에서 아이가 헛소리한다며 파양했고 다음 집에서도 아이가 어린이집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이상한 말을 한다며 파양됐죠.”
호은은 파양이라고 적힌 종이를 손으로 쓸었다. 5살에 첫 입양, 그리고 6살에 파양. 7살에 다시 입양, 석 달 후 파양. 마지막으로 8살에 지금의 집으로 다시 입양됐다.
“이번 부부에게서는 아무런 말이 없어서 역시 에스퍼 의심자가 아닌, 관심을 받고 싶었던 아이로 결론을 내리던 중이었습니다만.”
폴은 사진 한 장을 올렸다. 복권 가게 창문에는 1등 당첨이라는 A4용지 종이가 붙여져 있었다.
“올해 즉석 복권 당첨이 됐고 학교 내에서는 한여울이 미래에 관련된 점을 봐준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점을 봐준다고요?”
“네. 어떤 식으로 봐주는지는 같은 또래 중 소수의 애들만 알고, 또 그 아이들이 보기보다 입이 무거워 정확한 내용까진 파악이 안 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미래를 보는 에스퍼가 맞는 게 아닐까요?”
호은의 질문에 가만히 듣고 있던 강힘찬이 입을 열었다.
“75%”
“?”
“에스퍼가 아닐 확률이 75%임다.”
강힘찬에 말에 폴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갖다 댔다.
“에스퍼로 각성 직전에는 이능력 컨트롤이 어렵습니다. 저만 해도 잠을 자고 있다가 공원 벤치에서 눈을 뜨기도 하고, 씻고 있다가 동아리 방에 들어가는 등 시도 때도 없이 이능력이 발생했죠.”
그때를 떠올리면 끔찍하다는 듯 폴은 소름이 돋은 팔을 매만졌다.
“하지만 한여울의 이능력은 미래시입니다. 미래가 연속으로 보인다고 해도 본인을 제외하고는 모르겠죠. 거기다 10살짜리 아이가 그런 일을 겪으면 어떻게 할 거 같습니까?”
“음. 이능력이라는 생각을 안 할 거 같기도 하고. 또 신기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말할 거 같기도 하네요.”
“그렇죠. 하지만 저희 측에 들려온 소식은 즉석 복권과 신빙성 없는 소문이 답니다.”
호은은 열심히 설명하는 폴을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처음에는 순간이동 이능력을 남발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인턴 안내를 도와주더니 어느새 같이 일하는 사이가 되었다.
“뭐 의심 기간이 열흘 정도 남았으니 곧 그녀가 의심자인지 아니면 에스퍼인지 알 수 있을 거지만 말임다.”
어느새 다 먹었는지 강힘찬이 물고 있는 빨대에서는 빈소라만 들려왔다.
“호은 씨 같은 경우에는 첫 인사부 현장이기도 하니 오늘은 저희가 하는 걸 지켜봐 주시면 될 거 같습니다.”
폴은 가져온 노트북을 테이블 위로 세팅하고 헤드셋을 한쪽씩 연결했다.
“저희가 학원에 잠입했을 때 보는 장면과 소리를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능숙하게 헤드셋을 착용한 도인호는 소리가 잘 들리는지 테스트했다.
“이제 곧 학교 끝날 시간임다.”
알약 두 개를 꺼낸 강힘찬은 한 알은 자신이 먹고 다른 한 알은 폴에게 줬다.
두 사람은 옷가지를 들고 밖으로 나갔고 잠시 후 어린아이 두 명이 방으로 들어왔다.
뽀얀 피부와 통통해진 볼살을 가진 강힘찬은 동네에서 흔히 보이는 개구쟁이 꼬마처럼 보였다. 뒤이어 들어온 폴은 부모님 속 한번 안 썩일 거 같은 순한 인상으로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팔다리가 굉장히 길었다.
“우와! 진짜 변했네요?”
호은은 무심코 강힘찬의 말랑말랑한 볼을 손으로 꼬집었다.
“으으 아픔니다!”
“두 분 다 어릴 때 엄청 귀여우셨네요.”
키가 반 토막이 난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호은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당장이라도 말랑한 볼을 가지고 놀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호은 씨. 저희는 임무 중입니다.”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근엄하게 말하는 폴은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도인호는 손을 가만히 못 두고 자꾸 움직이려는 호은의 양손을 붙잡았다.
호은의 손에서 벗어난 두 사람은 카메라가 달린 안경과 귀걸이를 착용했다. 까만 화면이던 노트북이 폴과 강힘찬이 찍고 있는 화면으로 바뀌었다.
“오 잘 보여요.”
“오늘 하루 카페 대여했으니까 상황실로 편하게 사용하고 계시면 됩니다.”
똘똘하게 말을 끝낸 폴을 품 안에 안고 싶어 손을 움찔 떤 호은이었지만, 커다란 도인호의 손에 막혀 그저 아쉬운 눈길만 보낼 뿐이었다.
“그러면 다녀오겠슴다!”
책가방을 멘 강힘찬과 폴이 방에서 나가고 나서야 도인호는 잡은 호은의 손을 놓아줬다.
“강지안, 김시우. 이름도 요즘 애들 같네.”
폴이 준 서류에는 두 사람의 가짜 신분이 놓여 있었다.
마지막 장에는 학원에서 찍힌 듯 한여울 바로 뒷자리에 앉은 어린 폴과 강힘찬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